분단/냉전의 거부와 재일(在日)의 사상 - 김시종 ‘초기 4부작’ 완역에 즈음하여
상태바
분단/냉전의 거부와 재일(在日)의 사상 - 김시종 ‘초기 4부작’ 완역에 즈음하여
  • 곽형덕 명지대·근현대일본어문학
  • 승인 2022.08.28 13: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옮긴이의 말_ 『일본풍토기』 (김시종 지음, 곽형덕 옮김, 소명출판, 338쪽, 2022.07)

 

 

『일본풍토기』(완전판)가 지난 7월 번역 출간되면서 김시종 시인의 ‘초기 4부작’ 한국어판이 완성됐다. 초기 4부작은 『지평선』(1955), 『일본풍토기』(1957), 『장편시집 니이가타』(1970), 그리고 1960년 무렵 조선총련의 외압으로 출간이 무산됐던 『일본풍토기Ⅱ』를 말한다. 그 동안 『일본풍토기』와 『일본풍토기Ⅱ』를 한 권의 시집으로 쳐서 3부작으로 불렀으나, 이를 개별적인 시집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해 초기 4부작으로 다시 명명한다. 일본에서 출간된 순서대로 보면 『지평선』(1955), 『일본풍토기』(1957), 『일본풍토기Ⅱ』(1960년 무렵 출간이 무산됐다가 올해 일본에서 출판됐다), 『장편시집 니이가타』(1970) 순이지만, 번역은 『장편시집 니이가타』(2014), 『지평선』(2018), 『일본풍토기』(완전판, 2022) 순이다. 초기 4부작이라는 명칭을 붙인 이유는 네 권의 시집에서 남북 분단에 대한 거부와 인간 해방, 그리고 현실 인식의 혁명이라는 일관된 주제 의식을 발견할 수 있어서다. 

『일본풍토기』와 『일본풍토기Ⅱ』는 김시종의 초기 4부작 중에서도 독특한 제목의 시집이다. ‘지평선’이 부모님을 더 이상 뵐 수 없게 만드는 냉전의 바다를 향해 기도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한다면, ‘장편시집 니이가타’는 냉전과 숙명의 위도인 38선을 니가타에서 넘어서려는 분투를 담고 있다. 시집 제목부터 김시종이 벌인 시대와의 쟁투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풍토기’라는 제목은 시집을 읽어봐도 좀처럼 뜻이 와 닿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풍토기』와 『일본풍토기Ⅱ』에 실린 시는 마치 암호문과도 같아서 직역을 해놓으면 뜻 자체가 이어지지 않았다. 1950년대 당시에는 통용됐을지 모르지만 반세기를 훌쩍 넘긴 현재 많은 시어가 암호처럼 느껴졌다. 난해함의 원인은 시인이 한국어판 「서문」과 「인터뷰」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일본풍토기』가 ‘일본 현대시’를 의식하며 쓰였기 때문이다. 시인이 의미를 특정하기 힘든 시어로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선총련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김시종 시인 이코마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 (사진=정해옥 시인)<br>
         김시종 시인이 이코마 자택에서 필자와 인터뷰를 하는 모습 (사진=정해옥 시인)

‘일본풍토기’라는 제목이 처음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풍토기』와 『일본풍토기Ⅱ』에 실린 60여 편의 시를 모두 번역한 후였다. 일본풍토기라고 하면 일본NHK 방송프로그램인 ‘신일본풍토기’ 등이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일본 각지에 남겨진 아름다운 풍토나 삶” 등 일본 민족의 전통과 이어져 있어서 마이너리티가 쉬이 붙일 수 있는 시 제목은 아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제목으로 ‘일본풍토기’를 골랐고 두 권의 시집으로 출간하려 했다. 그런 만큼 ‘일본풍토기’라는 제목은 1950년대 말 재일의 실존을 둘러싼 쟁투를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이에 관해 지난 7월 있었던 『일본풍토기』 출간 기념 인터뷰(『제주작가』 가을호에 수록 예정)에서 시인에게 물었을 때 이런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나도 여러 사정으로 일본에 살고 있지만, 일본인이라고 해도 일본에서 살고(在日) 있지 않냐는 의문도 있었습니다. 풍토라는 것은 일본 각 지역의 다른 습관이나 문화 등을 말합니다. 내가 속한 재일조선인도 풍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과 의지가 있었습니다. 일본인과의 마주보기였던 것도 있고, 조선총련이 시비를 걸지 못 하게 하려는 제목 짓기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용감했던 것 같습니다. ‘귀국사업’ 이야기 나오던 시기였기에 당시의 시대상과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재일하는 것이 아니라 귀국으로 향해가던 시기였습니다. 

시인이 『일본풍토기』를 집필했던 1950년대 후반에는 재일(在日)을 임시적인 것으로 보는 풍조가 강했다. 다시 말하자면 임시적인 재일을 끝내고 고국으로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귀국 사업/북송 사업’이 맹렬한 기세로 재일조선인 사회를 뒤덮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시인은 재일조선인만의 풍토기를 구축하려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일본풍토기』와 『일본풍토기Ⅱ』는 재일조선인만의 ‘일본’풍토기였던 것이다.

                        한겨레 아시아문학상 보도

『일본풍토기』를 읽을 때 또 한 가지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은 ‘일본 현대시’와의 관련/대결이다. 『일본풍토기』(1957) ‘후기’에서 시인은 “자신의 창작활동과 일본 현대시 운동과의 결속을 좀 더 마음에 둘 수밖에 없다”고 쓰고 있다. 이에 관해  『일본풍토기』(한국어판) 해설자인 오세종 교수(류큐대학)는 이를 “‘일본’, ‘국민’, ‘서정’을 재구축하려는, 주로 문화영역에서의 시대적 동향에 공명하면서 거기에 ‘우연’을 넘어설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일본 현대시 운동은 전통과의 단절을 외치며 ‘일본’, ‘국민’, ‘서정’을 재구축하려다 실패하고 마는데, 김시종은 고독 속에서 홀로 이를 계속 이어나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60년 무렵 출간이 무산됐던 『일본풍토기Ⅱ』 또한 ‘일본 현대시’와의 관련/단절 속에서 쓰였기에, 출간을 무산시킨 조선총련 간부들이 쉽게 독해할 수 없는 텍스트였다. 그런 시집의 출간을 막았던 것을 보면 1960년은 김시종이 창작자로서 표현 매체를 빼앗긴 해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풍토기Ⅱ』의 출간이 무산된 후, 시인은 조선총련의 탄압 하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다. 동포 사회 안에서도 백안시되고 관계의 단절을 겪었다. 이 시기에 쓴 작품은 그런 절망의 나날을 견디며 길어 올린 시어(詩語)였다. 시인은 아무리 진보적인 일본인이라 해도 그들의 힘을 빌려 동포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려 하지 않았고, 피해자 의식 속에 자신을 가두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인과 조선인의 관계를 가해와 피해로만 고정시키는 것은 “조선인의 주체적 자아 발양”(『재일의 틈새에서』)에 저해된다고 하며 경계했다.

김시종 시인의 초기 4부작이 오롯이 번역돼 나오면서, 그의 시 세계를 한국에서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하지만 ‘뒤늦게’ 한국어로 도착한 김시종의 시는 난해하다. 그 난해함은 분단체제/냉전체제와 등을 맞대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요원해 보이지만, 분단과 냉전의 질곡이 해소되면 될수록 난해함은 심층적인 이해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 난해함 때문인지 김시종의 문학세계는 대중의 눈길이 미치지 못 하는 영역에 머물고 있다. 그런 가운데 김시종 시인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수여하는 제4회 아시아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아시아문학상 심사위원회는 "김시종 시인은 냉전의 분극 세계뿐만 아니라 국가주의와 국민주의에 구속되지 않고 이것을 해방시킴으로써 그 어떠한 틈새와 경계로부터 구획되지 않는 시적 행위를 실천해 왔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아시아문학상은 시인이 국내에서 받는 첫 번째 문학상이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김시종의 문학 세계가 학계만이 아니라 대중에게까지 폭넓게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한다. 


곽형덕 명지대·근현대일본어문학

명지대학교 일어일문과 교수. 일본문학을 동아시아문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읽어내고 있다. 저서로 『김사량과 일제 말 식민지 문학』(2017)이 있다. 『오키나와문학 선집』 (2020), 『무지개 새』 (2019), 『지평선』(2018), 『장편시집 니이가타』(2014)를 비롯해 『한국문학의 동아시아적 지평』(오무라 마스오, 2017), 『어군기』(메도루마 슌, 2017),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2016), 『긴네무 집』(마타요시 에이키, 2014),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던 일본 현대문학』(다카하시 토시오, 2014), 『김사량, 작품과 연구』(1-5, 2008-2016) 등을 옮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