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시대 생활상을 담은 보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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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시대 생활상을 담은 보물창고
  • 김지현 기자
  • 승인 2020.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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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윤이후의 지암일기 | 윤이후 지음 | 하영휘·문숙자·김영두·이문현 외 4명 옮김 | 너머북스 | 1,272쪽
 

이 책은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공재 윤두서의 생부이며 「일민가逸民歌」라는 가사의 작가로 알려진 윤이후(尹爾厚, 1636∼1699)가 1692년 1월 1일부터 1699년 9월 9일까지 8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의 최초 완역본이다. 함평현감을 마지막으로 해남으로 내려와 죽기 5일 전까지 그의 말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윤이후는 가풍에서 비롯한 문화적 소양과 오랜 기간 갈고 닦은 학문적 배경을 토대로, 양반ㆍ평민ㆍ천민을 아우르는 인간에 대한 소박한 관심과 시대의 격변과 인생의 희비를 반영한 담담한 통찰을, 자신이 경험한 일상 가운데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조선후기 일상사의 보물창고라는 점에 있다.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일기가 적지 않지만 이 정도로 일상을 섬세하고 풍부하게 기술한 자료는 거의 없다. 이 책은 가족과 친족, 이웃과 노비, 관리와 지역민 등 17세기 해남이란 시공간을 무대로 한 생활 및 친교의 기록이며, 인간관계의 기록으로 여기엔 거시사와 제도사가 서술하는 화석처럼 경직된 조선후기 유교사회의 모습은 조금도 없다. 일기 속에는 종횡으로 얽힌 무수한 군상들 사이의 생생한 삶이 약동한다.

게다가 역자들은 하루하루를 순차적으로 기록한 편년체 자료로서 개별 사건을 파악하기 어려운 일기의 단점을 고려해, 일기에 담긴 주요 사건을 추려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각 연도별 일기 앞에 설명하고, 중요한 사건의 경우 그 배경이나 맥락을 해설하는 박스를 일기 중간 중간에 배치하였다. 기록이 자세한 만큼 허다한 인물과 지명이 등장하여 자칫 읽는 이가 길을 잃기 쉬워 등장인물 및 지명의 정리에도 따로 공을 들였다.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비중을 따져 고른 180여 명의 인물 소사전을 책 말미에 덧붙이고, 일기에 언급되는 600여 곳의 고지명에 대한 현재 위치(주소)를 책 말미에 제시했다. 그와 함께 일기의 주요 무대가 되는 해남, 영암, 강진 일대의 자세한 지도도 실었다. 이 책은 최초 완역본이라는 의의도 크지만, 번역 가운데 이루어진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함께 담아냈다는 측면에서, 단순 번역본을 넘어선 해설서로서의 기능 또한 갖추고 있다.

『윤이후의 지암일기』라는 창문을 통하여 17세기 조선이라는 공간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오랜 기간 병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 서울의 세 아들과 괴산의 딸 소식에 애틋해 하고, 정쟁에 휘말려 의금부에 갇힌 셋째 아들 생각에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마음, 인천 사는 누나와 자형의 죽음 앞에 애통해하는 형제의 심정, 천한 노비였으나 자신을 길러 준 유모의 죽음 앞에 그녀의 삶을 기록하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집과 사당을 짓는 건축, 섬과 해안에 제언을 쌓아 농지를 넓히는 개간, 연이은 상례와 장지를 찾기 위해 풍수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 땅을 둘러싼 분쟁,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일상과 정감을 담은 많은 운문과 산문, 노래와 악기를 가까이 한 음악적 취미와 꽃과 나무를 구하여 조경을 하는 열정, 병치레와 치료의 기록, 영암과 강진 일대의 단거리 여행과 서울과 거제를 오간 장거리 여행의 상세한 기록, 오랜 기근과 전염병에 따른 참혹한 풍경들, 갑술환국(1694)을 둘러싼 파란의 정국 상황과 대동미 운영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후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활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17세기 조선의 시대(대기근과 정쟁으로 얼룩진 환난의 시대), 공간(간척과 경영 및 풍수와 유람의 공간), 사람(신분을 초월한 교유와 애정으로 기록된 사람들), 그리고 생활(취미, 질병, 교류 사이에 생생히 드러나는 일상)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얼핏 각자의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삶이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되고 이렇게 역사로 남는다는 사실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들 각자의 삶이 누군가에겐 공감이 되고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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