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살인의 추억 -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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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살인의 추억 -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문학
  • 승인 2022.08.2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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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Frère d’âme by David Diop

1차 세계대전이 지루한 참호전이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장교의 호각 소리가 울리면 병사들이 참호를 뛰쳐나가 몇 발짝 가지 못하고 적의 총탄에 쓰러지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도 익숙한 장면이다. 참호나 벙커에 숨은 군인들은 공포심을 넘어 지루함을 경험했고, 참호 밖으로 나가게 되면 바로 죽음이 현실이 되는 것이 당시의 전쟁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에서 두 나라의 젊은이 말고도 수많은 식민지 청년들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생각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 벨기에, 프랑스는 자국의 식민지에서도 병력을 동원했다. ‘식민통치의 완화’, ‘제국에 대한 충성심’, ‘돈과 시민권’ 등이 서로의 이해관계였을 것이다.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희담, 2022)는 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에 참전한 세네갈 용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백인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하고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투철하며 나아가 프랑스 시민이 되고자 하는 바람이 간절한 세네갈의 젊은이는 프랑스군으로서 기꺼이 전쟁터에 나간다. 물론 그들이 맞닥트린 전쟁의 현실은 달랐다. 백인 병사들은 그들을 전우가 아닌 ‘깜둥이들(darkies)’ 혹은 ‘초콜릿’이라고 불렀고 참호를 나오는 순간 싸울 기회조차 놓치고 고꾸라지는 것이 그들이 경험한 전쟁이었다.

소설의 저자 다비드 디옵의 이력은 흥미롭다. 파리에서 태어나 세네갈에서 자랐고, 18세기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프랑스 대학의 교수로서 소설을 통해 이름 없이 쓰러져간 세네갈 병사의 곡절을 끄집어냈으니 말이다. 세네갈 병사는 여성의 자궁과 성기에 비견되는 참호 속에서 대위의 명령에 따라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그들의 왼손에는 소총이 오른손에는 이른바 ‘정글 나이프’가 쥐어져 있다. 어찌 보면 총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팔 길이만 한 칼은 거추장스러울 수 있겠지만 프랑스인 장교는 아프리카 병사의 ‘야만성’과 몸을 직접 베는 칼의 잔인성이 적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간접적인 익명의 죽음을 만들어낸다면 칼은 직접적인 살인의 도구로 사용된다. 주인공 ‘알파 니아이’는 참호를 떠난 뒤 돌아오진 못하는 동료 대부분과 달리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비법은 광기와 잔인성이다. 적진에서 돌아온 그의 손에는 항상 적의 잘린 손이 전리품으로 들려있다. 그는 “일시적 광기는 전장에서 필요한 용기의 자매와도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의 잔인성은 적들을 넘어 동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극한으로 치닫는다. 백인 지휘관 역시 아프리카 병사들에게 칼을 준 목적이 적에게 공포심을 주려는 것이었지 ‘야만적인’ 잔인성을 최대한 발휘해보라는 것은 아니었다.

독자들은 세네갈 병사가 살아남기 위해 더 잔인해지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은 이해가 가지만 싸움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해 할 것이다. 돈과 무훈만으로는 그들이 생명을 담보로 싸워야 하는 이유를 알기 어렵다. 장교의 호각 소리를 듣고 진격하지 않는 병사는 등 뒤에서 날아온 총알에 죽을 수밖에 없으니 싸워야 하고 지휘관도 명령과 생존 이외에 전쟁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어찌 보면 전쟁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정작 전쟁터에 있지 않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참호전에 이어 일어난 2차 세계대전 초기의 ‘이상한 전쟁drôle de guerre’을 다룬 줄리앙 그라크의 소설 『숲속의 발코니』에서도 병사들은 일어나지 않는 전쟁을 기다리며 절해의 고도 같은 벙커에서 전선을 타고 오는 명령에 따라 삶을 이어갈 뿐이다.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에서 저자 다비드 디옵의 문학적 재능이 발휘되는 것은 소설의 중반 이후부터이다. 동료들에게조차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알파 니아이’는 후방으로 강제 휴가를 가게 되고 그는 요양소에서 ‘그림 치료’를 받는 중에 자신의 출생과 어머니, 가족의 사연, 전쟁에 함께 참전하여 죽은 고향 친구, 여자 친구와의 몸의 결합 등의 이야기를 진술한다. 식물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두 팔을 망고나무 줄기로, 두 다리를 바오밥 나무줄기로 간주하며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소설 전반부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전쟁의 공포와 잔혹성은 작품 전체를 압도한다. 또한 수많은 세네갈 병사가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여 죽어간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 묻게 된다. 태어나서 고향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조선인 강제 징용자가 푸른 산호초가 있는 남태평양의 고도에서 미군의 포격으로 죽거나 포로로 잡힌 사연처럼 말이다. 전쟁의 이유에 관해 묻다 보면 소설에서 말하는 “인간이 사건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인간을 이끌어간다는” 깨달음에 공감하게 된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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