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인 줄 모르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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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인 줄 모르고 산다
  • 유종민 홍익대·경제학
  • 승인 2022.08.21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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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게 국가냐’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국가가 당신들 똥기저귀도 갈아줄 무한책임을 가진 부모님이냐고.

J. F. 케네디의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을 바라기에 앞서,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연설 문구는 사실 재신임을 묻는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흔한 ‘뭐든 다 해주겠다’는 식의 정치적 감언이설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표 떨어지는 인기 없는 말이기에 더 진실성 있게 다가온다. 굳이 명사의 명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국민들은 과거 전제군주/식민통치/독재정권 하에서 지나친 억압과 의무에서 벗어나기에 급급했었던 역사적 잔재가 아직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나치게 뭔가를 받아갈 권리만을 주목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시민이라는 개념이 태동하던 아테네, 스파르타, 로마 등 고대의 역사적 배경을 참고해 보면,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민으로서의 자격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가장 좁은 형태의 의무이자 권리 위에서 후일 재산권, 투표권 혹은 과세 의무 등 파생 권리와 의무가 시민의 정의에 덧붙여져 왔다. 이는 마치 로마제국부터 현대 미국까지 군복무라는 지름길을 통해 시민권을 취득함으로써 현지에서의 각종 권리 및 의무를 빠르게 취득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던 것이 로마제정 말기 21대 황제 카라칼라 치세기에 재정수입 확보 및 식민지 주민들에 대한 유화책의 일환으로, 당시엔 충격적인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을 발표해 제국 내 대부분의 속주민 혹은 이방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뿌리게 된다. 특히 근대 들어서는 사회적 평등성을 강조되고 여성 투표권 부여 혹은 보편적 복지국가론 확대 등 권리 측면이 당연시되며, 군역(軍役) 의무와 철저하게 연계되어 정의되던 클래식한 의미의 시민권이 희석된 측면이 있다.
 
게다가 이런 ‘시민’ 개념의 근원도 모른 채 자생적으로 민주주의가 자라지 않고 달콤해 보이는 일부 측면만 서구로부터 수입돼서 그런지, 우리나라 국민들은 아직 시민이 아닌 나라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백성으로서 행동하고 생각하는 듯하다. 뭐든지 자기 책임을 생각하기에 앞서 국가 탓, 사회 탓, 남 탓, 부모 탓, 상대 이성 탓 , , , 죽창만 들고 있다. 심지어 자연재해 피해가 발생해도 국가가 완전히 보상해 주지 못하면 원망을 퍼붓기 일쑤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국가가 세금으로 모든 걸 지원해주니 개인 책임을 전제로 한 보험 등 민간 시장은 클 수도 없다. 무한책임을 요구받는 정부도 사실은 손해 볼 거 없다. 공무원들은 국민들의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며 승진도 하고 민원도 해결하면서 매번 새로운 업무영역으로 확장해가며 정책기금, 산하기관, 낙하산 자리를 만들어 간다. 시간이 지나며 전부 정부의 영역으로 고착화되어 버리며 책임을 당연시한다. 

언론에서도 각종 칼럼과 미디어는 클로징 멘트로 ‘정부의 적극적 대응이 요구된다.’는 식으로 끝맺는다. 오히려 비공감 횟수만 많을 쓴소리 기사를 싣지 못하고, 던지는 돌을 받아줄 화풀이 대상만 찾고 있다. 요즘처럼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 그런 국면전환과 물타기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지 않은가.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현실의 불만을 잠재우고 대신 스트레스 풀이 대상이 될 충실한 희생양들을 소셜미디어 상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정치권에서야 당연히 이를 극복하기 어렵다. 넉넉한 세비와 권력을 추구하는 직업정치인 입장에서 매번 되풀이되는 선거전에서 감언이설로 대중을 꼬드기기도 바쁜데, 누가 낙선을 무릅쓰고 나는 지역구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쓴소리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 수 있겠는가. 자칫 신구(新舊), 좌우(左右) 이분법에 휘말려 국민 정서를 무시한 무개념 꼰대 정치인으로 십자포화를 얻어맞고 조기 퇴진당할 게 뻔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의 밥그릇을 위태롭게 하는 요구를 감히 할 수 있겠나? 

그럴 바엔 차라리 이 세상에 미련이 많이 없어진, 살 만큼 산 사회의 원로들이 모여서 시민운동을 전개해 보는 게 어떨까. 당연히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인내, 수용을 강조하는 어떤 강연이나 저서도 환영받거나 선택받지 못하기 쉽기 때문에 실패한 컨텐츠 메이커가 되는 건 감수해야 한다. 대중의 구미를 맞추기도 힘들고 설득하는 것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군을 확보하기 어렵겠지만, 사회의 소금이 되고자 하는, 단기적인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미움 받음에 괘념치 않을 원로분들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유종민 홍익대·경제학

서울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자원경제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은행, 한국자본시장연구원을 거쳤으며 현재 홍익대학교 경제학부 학과장을 맡고 있다. 에너지, 금융, 탄소 및 재생에너지 시장 내부의 미시적인 작동원리를 주로 연구하며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 등 정부기관 및 다수의 민간기업 자문활동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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