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감옥’에 대한 반성적 인식과 사회적 삶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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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 대한 반성적 인식과 사회적 삶의 윤리
  • 박윤우 서경대·국문학
  • 승인 2022.08.21 01: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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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중국 서진(西晉)의 구양건은 인간이 언어를 떠나서 결코 살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 대신한 바 있다. “성현이 말을 능히 떠나지 못한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진실로 이치를 마음에서 얻어도 말이 아니면 펼 수가 없고, 사물을 말에 고정시켜도 이름이 아니면 구분할 수 없다.” 흔히들 말과 글을 그 사용주체인 인간 개개인의 마음을 드러내는 창이요,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라 비유하는 것은 언어와 사고의 밀접한 관련성을 증명하는 데 활용되지만, 정작 구양건의 사변은 기호로서 언어가 가지는 인식적 규정성, 말하자면 감옥과도 같은 언어의 이율배반적 존재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일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사유와 사고의 생산적 표현을 위한 현실과 삶에 대한 인식의 풍요로움을 위해서라도 언어가 초래할 수 있는 규범적, 고정적 관념화의 덫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야말로 탈근대적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와 인식 사이의 정당성과 필요가치에 대한 의미화마저 부인하게 된다면 ‘파국의 불입문자(不立文字)’가 만연하는 예측불가의 경지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중등 국어교육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선취하고 있는 화용론적 접근과 담화주의는 기존의 이론적 범주화를 위한 <화법>교육에서 나아가 표현인문학적인 취지에서 말하기와 글쓰기의 결합을 통한 <화법과작문>으로의 과목 통합, 그리고 언어교육의 총화로 인식되었던 <문법>과목의 과감한 해체와 ‘매체언어’ 교육의 시대적 당위론을 넘어서 언어사용의 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언어와매체> 과목의 신설이라는 제3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이제는 언어에 관한 한 더 이상 ‘법적’ 통제가 무화되는 지경이 된 것인가, 아니면 ‘언어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시대적 소망과 소명에 대답하게 된 것인가? 

한편으로는 대중매체가 쏟아내는 담론들에, 다른 한편으로는 뉴미디어를 이용하는 현실적 소비주체들의 무한생산의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언어는 규범과 탈규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소모적 진자운동 속에 새로운 클리셰적인 언어사용에 눈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a. “이번 타석에서는 변화구를 노릴 것으로 보여집니다.” 
과도한 영어식 문장표현에 익숙해진 나머지. 텔레비전 스포츠 중계 해설위원의 중독된 이중 피동형 서술어 사용은 이제 웬만한 뉴스 보도에서 기자의 말에도 당연시되며,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 도도한 장강의 물결로 흐른다.      

#1-b. “이번 태풍으로 경남지역 항구의 건물들이 파손하여 수십억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탈문법 시대에 새삼 문법학자의 심각한 자문을 받은 것인지, 방송국 내 자체 반성이 혁신을 이룬 것인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방송 뉴스에서 피동형 서술어 사용이 100% 사라졌다. 문제의 핵심을 과연 정확히 파악한 것일까? 한국어에는 피동형이 애초에 없어야 정상인 것인가? 

#2-c. “차량 진입 잠시만 대기하실게요~”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 지하주차장에서 흔히 보듯, 주차요원들의 대상을 오도한 존칭의 담화는 마치 그곳의 상품판매를 위한 홍보용 풍선인형들의 의미 없는 몸짓과도 같이 과잉서비스의 극치를 보여준다. 

#2-d. “환자분, 입 크게 벌릴 게요.”
오류의 시정은 어느 치과병원에서 치료를 위해 누워있는 방문자의 심사를 뒤틀어놓는다. 역시 최근 모든 병원에서 간호사나 접수대의 획일적이고 획기적인 어법의 변화는 정상적인 사고를 부정하는 소위 ‘멘붕’의 언어를 창조한다. 누가 입을 벌리는 것인가?

[#1]과 [#2]의 두 장면이 보여주는 배반의 역설은 언어가 지닌 인식적 본질과 언어표현을 통한 사고와 소통의 합리적 의미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유 없는 ‘좋아요’ 클릭하기, 타자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일방통행의 댓글 달기를 거쳐, 급기야 ‘전지적 참견’의 ‘뒷담화’ 예능을 통한 관음증의 만연에까지 이르면 호모 로쿠엔스로서 인간의 존재가 종말을 고하는 때가 도래하리라는 암울한 망상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이 시대 ‘청춘’들에게 삶이란 살아 있음에 대한 인식이자, 살아감에 대한 가치화를 통해 현실화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곧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언어의 감옥’은 파옥이나 탈옥을 통해 해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수감’의 의미에 대한 생생한 체득과 들여다보기를 통해 주체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3. “소격동 언덕 위에서 함께 나무를 바라봤을 때 좋았어요. 한번은 만나보고 싶었어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자폐를 가진 젊은 변호사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의 해후에서 담담하게 말한다. 그처럼 인생은 언제나 불확정성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며, 옳고 그름이나 진실과 거짓 역시 그 의미를 규정하기 위한 개개인의 실천적 노력의 과정 속에서 진정한 언어로 구체화된다. 이때 언어는 타자를 이해하려는 마음과 공감을 위한 판단의 결실로서 스스로 ‘출감’하게 될 것이다.

1교시 수업을 위해 대학 정문을 들어서곤 강의실 앞에서 마주친 친구와 100원짜리 자판기커피 한 잔을 놓고 벤치에 앉아 ‘열혈토론’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해 지는 교정을 다시 돌아 나오던 ‘라떼’ 세대들의 추억 되새김질은 어쩌면 마스크로 입 가리며 소통에 굶주려온 MZ세대에게 새삼 사회적 삶의 윤리에 대한 하나의 자그마한 반딧불이 역할을 할 수 있지는 않을까.  


박윤우 서경대·국문학

서경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교수. 한국현대시 및 문학교육 전공.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한중인문학회장, 한국시학회장, 국어국문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한국현대시와 비판정신』, 『현대시와 문화교육』, 『변혁의 역사, 월경의 문학』 등 연구서와, 평론집 『서정시와 대화적 상상력』, 『환경의 재구성』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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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일 2022-08-25 18:33:18
교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문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사범대 한문교육과에서 한시(漢詩)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의 국어교육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지만, 주전공이 아니라 따로 논문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용하신 용례 중 세번째에 나오는 지명은 '소격동'이 아니라 '소덕동'이랍니다. 저도 종로구 소격동에 견인되어 그런 줄 알았었는데, 찾아보니 '소덕동'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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