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호위’냐 ‘호의호식’이냐 하는 논란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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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호위’냐 ‘호의호식’이냐 하는 논란을 넘어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08.1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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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얼마 전에 한 정치인이 국회에서 대통령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을 썼다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대통령이 참모들 뒤에 숨어서 황제처럼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 그 정치인의 주장이었는데, ‘호가호위’에 어울리는 상황은 대통령이 참모들 뒤에 숨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참모들이 대통령의 권력을 등에 업고 경거망동을 하는 것인 만큼 비유가 적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발언이 알려지자 상대편 정당 정치인들 중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이라고 하려다가 실수한 것 아니냐” 하고 힐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호가호위’를 언급한 정치인이 의도한 바는 적어도 대통령이 호의호식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호의호식’ 또한 이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는 표현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정치인은 최근 ‘삼성가노(三姓家奴)’니 ‘양두구육(羊頭狗肉)’이니 하면서 한자성어를 즐겨 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정치인은 예전에도 ‘파부침주(破釜沈舟)’와 같이 낯선 한자성어를 거론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정치인들이 어려운 한자어를 입에 올리면 언론 매체들은 그 말의 뜻을 풀어서 설명하는 데 시간과 힘을 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시민 대중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라 애써 쉽게 풀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정치인의 말을 전하는 기자들조차 말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해 실수를 하는 경우마저 생기곤 한다. 실제로 ‘삼성가노, 파부침주’ 등을 운운한 정치인이 ‘무운(武運)’이라는 말을 꺼내자 한 기자가 이를 운이 없다는 뜻의 ‘무운(無運)’으로 알아듣고 엉뚱하게 보도하는 일이 있었다.

정치인의 언어는 시민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정치인에게 당연하게 요구되는 품격과 품위 또한 시민들에게 쉽고 명료하게 다가오는 언어를 사용해야 비로소 높아질 수 있는 법이다. 단지 비속어를 쓰지 않는 것만으로, 수해를 입은 시민들 앞에서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와 같은 망언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정치 언어의 품격과 품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그저 기본 중의 기본일 뿐이다.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인의 언어야말로 공공언어의 대표 격인 만큼 정치인은 시민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쉽고 명료한 말을 가려서 써야 할 것이다. ‘파부침주’와 같은 말은 같은 정당 소속 정치인들끼리만 모인 자리에서 자기 정당의 선거 승리를 다짐하느라 쓴 말인데 무엇이 문제겠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 나오는 말들 역시 언론 보도를 통해 국민들에게 직접 전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호가호위, 삼성가노, 양두구육, 파부침주’ 등은 한자성어 중에서도 고사성어에 속한다. 그렇기에 그 말들의 기원이 된 옛 이야기들이 있고 그 이야기 속에 교훈 또한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이러한 말들 자체를 배척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도 이런 말들을 아예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되도록 쉬운 말을 써서 상대방이 그 뜻을 쉽고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시민 대중이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말, 그 뜻과 용법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말을 굳이 써서 해석하는 데 힘을 들이게 하거나 심지어 불필요한 오해까지 불러일으키기보다 한 번에 이해될 수 있는 쉬운 말로 국민들과 소통하고자 힘쓰는 것이 이 시대의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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