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세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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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이셔널!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2.08.1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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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경 칼럼]

한국의 자랑스러운 축구선수 ‘손흥민(Son Heung-Min)’과 ‘센세이셔널(Sensational)’의 합성어가 ‘손-세이셔널(Son-sational)’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한두 해 전 이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을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는 한국산 양발잡이 축구선수 손흥민에 대한 특급 칭찬 정도로 가볍게 여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억만 리 타지에서, 그것도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특히 심한 편인 영국에서 그처럼 조국을 빛내고 있는 그 젊은이가 무척 자랑스럽고 흐뭇하고 고마웠다. 

그 시점부터 나는 토트넘 경기 반드시 챙겨보고 그의 소식 밑에 제일 먼저 ‘좋아요’ 찍는 열성 팬으로서 그를 응원했다. 지난 2021~22시즌 최종전이 있었던 5월 22일 노리치전에서 그가 마침내 골든부트 수상자로 확정되었을 때는 정작 손 선수는 시종일관 의연했지만 23일 늦은 새벽까지 경기를 지켜보던 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 많은 패널티킥과 프리킥 기회 한 번 누리지 못하고 필드골로만 23번을 차 넣어 득점왕에 오르다니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사실 그건 ‘손-세이셔널’이란 말로 부족한 거의 불가사의에 가까운 대(大)사건이었다.

토트넘이 최종 4위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지은 이후 지금까지 불과 석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손 선수와 그의 주변에 정말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한 사건들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Son Heung-Min’이란 이름이 세계 축구계의 ‘밈(meme)’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본래 손 선수의 축구 실력을 칭찬하는 어휘였던 ‘Son-sational’이 ‘Son’, ‘Sonny’, ‘nice one Sonny’, ‘Son-mania’ 등과 함께 뭉쳐지면서 하나의 ‘어족(語族)’이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최근 ‘SON’을 뒤집은 ‘NOS7’처럼 어족의 외연 확장 조짐도 뚜렷해지고 있다. 이른바 ‘손흥민 현상’, 나는 오늘 이것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영국 런던 북부의 한 거리에 손흥민의 ‘찰칵 세리모니’가 벽화로 재현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이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한 바 있다. 그런데 얼마 전 1848년 문을 연 유서 깊은 워털루역에 손흥민 선수의 멋진 무릎 슬라이딩 세리모니 옥외 전광판이 등장했다고 한다. 영국의 스카이스포츠가 2022~23 프리미어리그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연간 2억 명이 드나든다는 이 역사(驛舍)에 초대형 광고판을 설치하면서 축구에 열광하는 영국인들의 황태자 해리 케인도, 지난 시즌 리그 우승팀 맨시티의 얼굴 케빈 드 브뤼너도, 또 2위 팀 리버풀의 골든부트 공동수상자인 모하메드 살라도 아닌 바로 손흥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정말 ‘손-세이셔널’하지 않은가. (이 네 사람 모두 8월 12일 발표된 2022년 발롱도르 최종후보 30인 명단에 올랐다!)
 
지난 5월 손 선수는 리오넬 메시와 함께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공인구의 메인 홍보대사로 선정되었다. 6월에는 전통적이고 기준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의 상징적 명품 브랜드 버버리의 글로벌 홍보대사가 되었다. 7월에는 유엔세계식량계획(UFP)이 손 선수를 글로벌 친선대사로 위촉하였다. 그리고 바로 얼마 뒤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핫’한 남성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으로 유명한 ‘캘빈 클라인’의 언더웨어 차림으로 포스터를 찍어 젊은이들의 팬심을 ‘무자비하게(?)’ 자극했다. 이렇듯 이 한국인은 전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활동 영역을 무한히 확장해 가고 있다. 정말 ‘손-세이셔널’ 그 자체이다.

지난 달 토트넘의 한국 방문은 우리 기성세대가 그 ‘손-세이셔널’의 위엄을 직접 체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지난 7월 10일 토트넘의 다니엘 리비 회장은 파라티치 단장을 위시하여 콘테 감독 및 선수단 28명과 경영진 등 총 107명의 ‘초대형’ 군단을 이끌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환영 팻말을 들고 자기 동료들을 직접 마중 나온 손흥민 선수와 그를 에워싼 3천여 명의 거대한 팬덤 그리고 그들의 순도 100%의 솔직하고 강렬한 환대 방식도, 그 군단이 체류한 1주일 내내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한국이 아닌 다른 어떤 나라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을 세련된 ‘관종(關種)’의 품격도 따지고 보면 다 ‘손-세이셔널’의 한 단면이었다.

토트넘의 방한에 앞서 손흥민은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토트넘 동료들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내가 한국에서 엄청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실망시킬까 봐] 걱정된다”라고 겸손하게 말했었다. 그러나 토트넘의 ‘107명 초대형 방한단’과 공항에 나타난 ‘3천여 명의 팬덤’, 두 차례의 친선경기에 물 샐 틈 없이 꽉 들어찬 관중석 정경(情景)은 ‘엄청 대단한 사람’ 손흥민의 ‘밈’이 지닌 위력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쯤 되면 ‘손-세이셔널’은 단순한 칭찬어를 넘어 특정 현상을 설명하는 모종의 사회과학적 개념 범주로 이해해야 합리적일 것 같다. 

그러한 사회과학적 관점에서는 그 ‘손-세이셔널’이라는 ‘밈’이 현재 우리 한국사회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나는 1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팀K리그’ 대 토트넘의 경기와 16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된 토트넘 대 ‘세비야’의 경기를 찾은 관중의 특성에서 설명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각각 64,100명과 4만 명으로 집계된 관중들이 마치 2002년 6월 개최되었던 한일월드컵의 황홀한 응원의 추억들을 소환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응원 복장이 빨강에서 하양으로 바뀌고, 북과 꽹과리 대신 콘테 사진과 토트넘 응원가가 적힌 부채와 손풍기를 든 훨씬 정제되고 세련된 관람 문화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족을 달자면, 13일 경기는 마치 하늘이 도운 듯했다. 두어 달 전 온라인 판매로 티켓 6만 6천 장이 불과 25분 만에 매진되었고, 우천의 불편도 아랑곳하지 않고 6만 4천 백 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온종일 쏟아지던 폭우도 게임 시작 한 시간을 앞두고 거짓말처럼 딱 그쳤다. 덕분에 평소 같으면 제아무리 야간경기라도 섭씨 30도를 훌쩍 넘겼을 7월의 무더위가 28도 정도로 내려가서 선수도 관객도 ‘쾌적하게’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행복 바이러스가 넘실대는 관중석, ‘팀K리그’나 ‘토트넘’ 선수를 가르지 않고 좋은 플레이에 환호하고 실수한 선수에게 격려를 보내는 관중, 그날 경기장의 분위기는 정말 숭고하고 ‘손-세이셔널’했다.

16일 치러진 토트넘 대 세비야의 경기 역시 13일의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두 경기 모두 텔레비전 생중계로 관람하였는데 예상과 달리 관중석 대부분이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어서 약간 놀랐다. (어쩌면 나보다 토트넘 선수와 관계자들이 그 사실에 더 놀랐을지도 모른다. 영국의 축구 관중은 연령대가 상당히 높은 편이니 말이다.) 내가 놀랐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보다 주머니 사정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우리 젊은이들이 결코 만만찮았을 티켓값을 기꺼이 부담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의 자신만만하고 긍지 넘치는 표정이 20년 전 월드컵 경기장을 가득 채웠던 그때 그 재기발랄한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온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많은 청년이 토트넘 친선경기장에 나타난 것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그 ‘손-세이셔널’의 마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흡인력은 한 아시아 출신의 재능 있는 축구선수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플레이하면서 온갖 인종차별의 설움과 불리한 룰 적용의 부당함에 맞서 부단한 노력과 좋은 인성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월클’의 자리를 꿰찬 현대적 영웅담에서 비롯되었다.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실력만으로 극한의 경쟁상황을 뚫고 정상에 등극함으로써 스스로 정의를 실현시킨 인물, 어쩌면 우리 젊은이들은 부지불식간에 그 영웅담의 주인공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했을지도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 ‘손-세이셔널’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싶었을지 모른다. 

손웅정 감독은 손 선수의 ‘월클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흥민이는 아직 월드 클래스가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여러 차례 유명세를 탔다. 이에 대해 손 선수가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했다. ‘아버지 말씀에 동의합니다. 제가 월클이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벌어진다면 아직 월클이 아닌 거지요.’ 이렇게 말한 게 지난 5월이었는데 불과 3개월 사이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더 이상의 ‘월클 논쟁’은 없을 것 같다. 손흥민 선수가 우리에게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패러다임,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2017), 『한국 민주주의의 새 길: 직접민주주의와 숙의의 제도화』(공저, 2022), 『문화의 이동과 이동하는 권리』(공저, 2022), 역서로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와 하이데거』,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과거와 미래 사이』 , 『책임과 판단』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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