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전(逆轉)’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옹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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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전(逆轉)’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옹호하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8.14 2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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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의 역전 Sexual Inversion | 헨리 해블록 엘리스·존 애딩턴 시먼즈 지음 | 이반 크로지어 엮음 | 박준호·이호림·임동현·정성조 옮김 | 아모르문디 | 512쪽

 

1897년 영국에서 출간된 동성애에 관한 최초의 영문 의학서로서 동성애 연구의 기념비적 저서이다. 이 책은 성과학의 관점에서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저작으로, 의사이자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해블록 엘리스와 시인이자 문화사가였던 존 애딩턴 시먼즈가 공동 집필했다. 집필은 1890년대 초에 이루어졌으나, 1893년 시먼즈가 작고한 후 유고 관리자가 영국에서의 출간을 막은 탓에 한 해 전 독일어판이 먼저 출간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다음에 나온 영문 개정판은 ‘베드버러 재판’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인해 음란 서적으로 분류돼 금서가 되었다. 이후 1901년 미국에서 새 판본이 나왔고, 1915년에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함께 다룬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출간 자체가 섹슈얼리티 역사에 기록될 기념비적 사건이 된 이 책의 존재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도 ‘엘리쓰의 성학전서’의 한 권으로 알려졌다. 서구의 성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입한 일본에서 성과학의 대중화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엘리스의 『성의 역전』이 포함된 총서 『성심리학 연구』가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일본에서 유학하던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첨단 지식’의 일부로서 그 내용을 수용했다. 이처럼 이 책은 성과학이라는 학문적 관점에서 동성애를 연구함으로써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의학과 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사회적 태도와 제도 면에서도 중요한 저작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은 정신의학과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이반 크로지어가 장문의 해설과 주석을 붙여 2008년 출간한 비평판을 저본으로 삼아, 엘리스와 시먼즈의 공동 작업이 이루어진 구체적인 과정과 『성의 역전』이 탄생한 지적 · 사회적 맥락을 상세히 밝혀주며, 정신의학과 섹슈얼리티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완전하게 편집된 텍스트를 제공한다.

책의 제목인 ‘성의 역전’은 이 책이 쓰인 시대에 동성애를 일컫던 표현이며, 동성애라는 현상을 성과학의 틀에서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용어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성 도착(sexual perversion)’이 있으나, 엘리스는 여러 도착 행위와 성 역전을 구분하고자 이 용어를 채택했다. 엘리스와 시먼즈는 세상에는 선천적으로 동성애적 기질 혹은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자연스럽게 혹은 어떤 계기를 통해 비규범적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실천에 빠져든다고 보았다.

오스카 와일드가 남색으로 처벌받기도 했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섹슈얼리티는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동시에 이중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스와 시먼즈는 유럽과 미국에서 막 등장한 성과학이라는 장(場) 안에서 동성애를 연구하여, 보다 긍정적으로 해명하는 증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들은 생물학 · 민족학 · 심리학적 자료에서 수집한 동성애의 본성에 관한 과학적 이론에 관여함으로써 남성들 간의 사랑을 비난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성적 도덕률을 전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34편의 사례사(case history)를 수집하여 제시하기도 하였다. 대부분 영국인인 이 사례들은 동성애적 욕망을 드러내는 모든 이들이 정신질환이 있거나 범죄자이거나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증한다. 다시 말해, 동성애적 행동이 정상이고 자연적인 것이므로 불법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 역전을 구체적인 사례를 기반으로 규명하고 성 역전의 본성과 이론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제시한 이 책은, 동성애에 대한 성과학적 논거를 정식화함으로써 성적 쟁점에 관한 엘리스와 시먼즈의 사회적 신념을 정립해주었다. 엘리스가 특히 과학적 설명에 집중했다면, 시먼즈는 문화적, 역사적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 부록으로 제시된 시먼즈의 「그리스 윤리의 한 가지 문제」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남성 간 동성애를 조명함으로써 ‘게이 역사’ 연구의 기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인간을 성적 존재로 이해하고 성과학의 관점에서 동성애라는 주제에 접근한 이 저작은, 섹슈얼리티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고전이자 결코 낡지 않은 나침반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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