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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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 김완종 숭실대·철학
  • 승인 2022.08.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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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_ 『의심하는 인간: 확증편향의 시대, 인간에 대한 새롭고 오래된 대답』 (박규철 지음, 추수밭, 448쪽, 2022.06)

 

회의주의라는 주제는 고대 서양철학사에서 그렇게 지배적이지 않다. 회의주의하면 떠오르는 서양 고대철학자들은 모든 지식과 도덕적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상대주의와 절대적 진리는 획득 불가능하고 인식할 수 없으며 믿을만한 지식은 없다고 주장하는 회의주의를 지향한 소피스트(σοφιστής, BC. 4~5)이다. 또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Σέξτος Ἐμπειρικός, AD. 2~3)를 통해 소개된 피론(Πύρρων ὁ Ἠλεῖος, BC. 360-270)의 회의주의 철학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출간된 박규철 교수의 『의심하는 인간』은 회의주의 지평에서 서양철학사를 꿰뚫은 보기 드문 책이며 한국철학계의 학문 수준을 높이는 기념비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고대 회의주의 계보는 호메로스로부터 시작해서 피론까지 이어진다.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인 크세노파네스 (Ξενοφάνης ὁ Κολοφώνιος, BC. 570~478),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Πρωταγόρας, BC. 490~420), 고르기아스(Γοργίας, BC. 483~375)이며 소피스트와는 대립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르케실라오스(Ἀρκεσίλαος, BC. 316/5~241/0)에 따르면 회의주의적 원천이었다는 소크라테스이다. 이후 소크라테스를 시초로 하는 아카데미 학파(아르케실라오스)와 (피론 사후 200년 지나) 피론을 시초로 아이네시데모스(Αἰνησίδημος, BC. 1세기)가 세운 피론학파가 있다. 소크라테스처럼 피론도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피론주의 개요』를 저술함으로 고대 회의주의인 피론주의가 절정에 이른다. 

저자에 따르면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어떤 일이든 긍정과 부정을 넘어 판단유보의 개념을 보다 정교화하여 이를 통해 마음의 평안과 궁극적 행복을 제시하였다. 섹스투스는 철학자를 3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첫째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진리 탐구의 길을 포기한 긍정적 독단주의자 범주이며 스토아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에피쿠로스의 추종자가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진리는 발견될 수 없다, 즉 진리는 인식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부정적 독단주의자가 있으며 아르케실라오스와 같은 아카데미 학파가 이런 범주에 속한다. 셋째는 모든 형태의 독단주의를 배격하면서 계속 탐구를 진행하는 진정한 회의주의자 범주이며 이런 부류에는 섹스투스와 피론학파가 속한다(박규철 2022, 73).

회의주의의 핵심적 개념은 대립, 판단유보(ἐποχή), 파악불가능성, 이해 불가능성, 그리고 마음의 평안(ἀταραξία) 등이다. 아카데미 회의주의와 피론주의는 대상에 대한 파악불가능과 판단유보를 공통으로 전제하며 마음의 평안을 지향한다. 차이점은 전자는 개인적 감각표상을 강조했지만, 후자는 모든 논변에서 동일한 힘을 가진 대립적인 논증이 양립가능(ἰσοσθένεια)하다는 점이다. 

 

아르케실라오스는 신념이 없이는 어떠한 행동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독단주의자들이 회의주의자들의 판단유보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행위 불가(ἀπραξία, 대상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되면 삶에서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다는 논증)를 비판한다. 아르케실라오스는 회의주의자들의 판단유보 원리를 따르더라도 합리적인 감각표상에 근거해서 인간의 행위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으며 일상적인 행위가 실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박규철 2022, 60). 마치 섹스투스가 자연의 인도, 느낌의 필연적 요구, 법률과 관습의 전통, 전문 기술교육에 근거해서 일상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제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고대 후기의 회의주의가 중세시대에 그리스도교 철학자겸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새로운 회의주의로 나타났다는 것을 탐구한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일차적으로 고대 회의주의에 반대 입장이었지만,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고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신앙주의 지평에서의 회의주의적 관점을 새롭게 모색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류를 범하는 인간’을 의심하는 주체로 제시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갈망하면서 자기 자신까지도 의심함으로써 내면적, 경험적 회의주의를 탐구한 새로운 형태의 회의주의를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피론주의적 회의주의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섹스투스의 회의주의를 확장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화해를 갈망했고 회의주의와 신앙주의 간의 결합을 모색한 르네상스 시대의 몽테뉴를 다룬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저자는 불안 가운데 의심의 활동을 하는 인간 주체의 내면을 향한 탐구의 길을 열어 주며 과거 고대 회의주의와는 다른 탈아타락시아 지평에서의 회의주의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회의주의자들의 사유를 통해 우리가 판단하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통찰과 함께 일상에서 회의주의자가 누릴 수 있는 삶의 지혜와 기술까지 배울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지식의 획득을 위해 회의주의를 사용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는 다르게 의심의 긍정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의심은 제거나 회피가 아니다. 의심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의 지혜와 기술이다. 

본서를 통해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현대의 의심하는 인간을 부활시켰다. 인간은 의심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호모 두비탄스(Homo Dubitans)의 출현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만이 최고, 최선이며 이것을 통해 획득한 부(자본)와 권력과 사회적 지위로 그렇지 않은 타자와 공동체의 관점(타자의 형이상학)을 쉽게 무시하고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결국에는 자신까지 위협하는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공감능력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본서를 통해 고대, 중세, 근대 서양 회의주의 역사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다. 의심하거나 회의하는 인간은 서로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의 관점이나 신념,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감하고 자신의 생각이 독단적일 수 있다는 탐구의 길을 열어 준다. 본서는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Peter Wason)이 주장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빠져 있고, 다시 말하면 정치, 문화, 경제, 종교, 과학, 인종, 이념, 신념 등의 편향성에 빠져 있고, 더 나아가 이로 인한 심리적 불안 현상으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사회에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김완종 숭실대·철학

연세대학교에서 마르틴 하이데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B를 수행하며 지금은 숭실대학교 외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논문 “포스트모던인들의 삶의 조건 비판: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죽음관을 중심으로”, “불안과 일상성: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불안관을 중심으로” 등이 있으며, 공역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철학과 신학』, 『신‧자유‧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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