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발달과 인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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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발달과 인간의 자유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8.08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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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16강_ 손화철 한동대 교수의 「기술 발달과 인간의 자유」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두 번째 섹션 ‘자유와 민주주의: 역사와 전개’ 제16강 손화철 교수(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 강연 중 주요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기술 발달과 인간의 자유


손화철 교수는 “근대 사상의 이란성 쌍둥이”라 할 기술과 자유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둘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 답으로 간단하게는 서구의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기술은 자유의 도구”라는 명제가 제시될 수도 있겠으나, 양자의 연결 고리가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약하고, 그 관계는 미묘하고 복잡”하다고 밝힌다. 이와 같이 “둘의 연관성과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와 분석이 필요”한 상황인데, 먼저 큰 틀의 배경으로 “기술이 자유를 위한 도구로서 역할하지 못하는 현실”과 관련해서 “기술철학자 알버트 보르그만(Albert Borgmann)의 이론”을 따라가 본다. 그에 이어 “기술과 자유가 서로 어긋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세 가지 다른 입장”을 살펴본 다음 실질적인 “두 가지 기술의 사례”, 즉 “기계나 건물, 자연 현상 등을 디지털로 재현하는 것”을 말하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과 “인터넷 상에서 사용자가 다양한 정보를 서로 연결지어 사용할 수 있는 하이퍼링크(hyperlink)를 넘어서 정보가 사용자를 찾아가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는 하이퍼리드(hyperlead)를 통해 그간의 논의를 뒷받침한다. 이런 탐구의 끝에 마지막으로는 “기술과 자유의 바람직한 미래”란 어떠해야 하는지 조심스레 가늠해본다. 

 

지난 7월 16일, 손화철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1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근대의 이란성 쌍둥이: 기술과 자유

기술과 자유는 근대 사상의 이란성 쌍둥이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는 개념이지만 그 뿌리와 상호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기술과 자유의 관계를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한다면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자유를 성취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이런 이해는 개념적, 역사적 근거에 기반한다. 

나아가 ‘자유의 도구로서의 기술’은 단순히 철학적 구호가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자연적 한계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과 인간 자유의 개념이 근대 사상의 이란성 쌍둥이 같다고 해서 그 둘이 서로를 지지하면서 발전해온 것만은 아니다. 그 연결 고리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약하고, 그 관계는 미묘하고 복잡하다. 인류가 자연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표현은 그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근대가 꿈꾸었던 인간 주체의 ‘주변 세계 만들기’는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이는 개별 기술 단위에서의 논의나 역사적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유 실현과의 시기적 중첩성은 정반대로도 서술할 수 있다. “기술은 자유의 도구”라는 명제를 전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둘의 연관성과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와 분석이 필요하다. 

 

2. 기술의 약속과 그 파기

기술철학자 알버트 보르그만(Albert Borgmann)은 ‘기술의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근대에 들어와 기술이 행복의 문제와 연결된 상황을 묘사한다. 근대주의의 꿈은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고, 기술은 바로 이 꿈을 이루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이 ‘기술의 약속’은 다시 모든 이가 자유를 누리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자연스럽게 연동된다.

보르그만에 따르면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 약속은 왜곡되었다. 그는 기술이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wealthy) 할 수도 있고 풍요롭게(affluent) 할 수도 있는데, 기술의 본래 약속은 풍성한 삶이었던 데 반해 현대 기술이 제공한 것은 풍요로움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현대 기술이 과거의 기술과는 달리 삶의 구체적인 맥락과 분리된 채 작동하면서 그 산물 혹은 상품(commodities)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술의 산물과 그것을 산출하는 기계류가 철저히 구분되어 후자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보르그만은 현대 기술을 특징짓는 ‘장치(devise)의 패러다임’이라 부른다.

장치의 패러다임은 기술 발달의 초기에 주어진 기술의 약속을 절반만 성취한 셈이다. 맥락 없이 주어지는 편리와 안전은 당연한 삶의 일부가 되고 때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이는 좋은 삶을 추구할 자유를 잃은 것이며 그 결과는 막연한 불안과 불만이다. 보르그만은 현대 기술 사회가 장치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토론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르그만은 풍성함과 풍요함을 구분해서 현대 기술이 후자만을 제공했다고 했지만, 실은 그 풍요함의 공급도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 오늘날 기술 사회의 시민은 기술이 주는 혜택을 골고루 누리지 못하고 극단적인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 기술이 발달한 곳에서도 계급과 인종, 나이에 따라 기술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지역 간의 격차는 더욱 심각해서 지구상의 한쪽에서는 10여 년 전까지 상상도 하지 못하던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깨끗한 물조차 마실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첨단 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 때문에 그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술이 약속한 자유는 일부에게만 해당하였던 셈이다.

보르그만은 그렇게 기술과 삶의 다른 영역을 구분하고 이 둘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 작금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장치의 산물과 기계류를 구분하고 후자를 삶의 맥락에서 독립시킨 장치의 패러다임이 기술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3. 기술의 실패 원인에 대한 세 가지 설명

1) 기술의 오용

기술이 자유의 증진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가장 직관적인 경우는 기술의 오용이다. 인간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개인으로나 집단으로 그 기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기술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고 그 자유를 박탈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의 도구인 기술이 다른 사람에게는 억압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오용의 가능성을 오용한 사람 혹은 집단의 도덕성 문제로 완전히 치환하고, 처음부터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나 부작용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이 일은 행위자의 잘못으로 취급되어 해당 기술 개발이나 ‘정상적’ 사용 과정에서는 핵심 의제로 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특정 기술을 정의하고 이해할 때 그것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지를 물어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영역에서 누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까지 물어야 한다. 때로는 개발자의 좋은 의도가 사용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발현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사실 기술철학의 여러 이론은 기술의 선용과 악용의 구분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어떤 기술을 통해 생겨난 가능성은 그 자체로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바꾸기 때문에, 그 변화에 주목해야지 선용과 악용을 구분하고 후자를 막겠다는 접근으로는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바람직하지 않은 기술의 주도

기술이 자유 증진을 저해하는 이유를 기술의 오용에서 찾는 견해는 기술을 중립적인 도구로 파악한다. 기술을 중립적인 도구가 아닌 일정한 경향성을 가진 인공물 내지 활동으로 볼 경우, 전혀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는 「권위적 기술과 민주적 기술」이라는 글에서 기술의 역사를 크게 권위적 기술과 민주적 기술의 두 흐름으로 일별한다. 

멈퍼드에 따르면, 권위적 기술은 고도의 중앙집권적 권력 체계와 시스템이 필요한 기술이고, 민주적 기술은 분산된 형태의 기술이다. 권위적 기술은 시스템 중심적이고 강력하지만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민주적 기술은 연약하지만 인간 중심적이고 융통성이 있으며 자율성을 보장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권위적 기술은 한시적으로만 번성하다가 망한 경우가 많지만, 민주적 기술은 미약하게나마 계속 유지되어왔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권위적 기술이 계속 번성할 뿐 아니라 민주적 기술을 제압하여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지속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기술이 주도권을 잡게 된 셈이다. 

이는 기술이 인간 삶의 맥락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람의 활동과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에 근거한다. 나아가 기술이 그 사용의 직접적인 목적이 되는 문제의 해결 이외에도, 한 사회가 공유하는 어떤 원칙이나 미덕(예를 들면 민주주의와 자유)에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용되는 전체적 맥락에서 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아닌지가 기술 선택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 

3) 기술의 자율성

기술과 자유에 대한 가장 비관적인 진단은 기술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는 입장일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근대 사상의 쌍둥이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어 서로 다투고 있다. 자크 엘륄(Jacques Ellul)은 그의 유명한 『기술 사회』에서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고 말한다. 엘륄은 인간이 자율성을 잃었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엘륄에게 있어서 자유의 의미는 선택의 가능성인데, 기술 사회에서는 모든 선택이 효율성의 법칙을 따라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효율성의 법칙이 단순히 기술적이고 물리적인 영역뿐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임의적인 선택의 폭은 점점 줄어든다. 처음에는 기술이 인간의 선택을 돕지만, 얼마 후에는 기술의 선택에 별다른 이의 없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사람이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을 때 발휘되는 것이다. 기술 사회에서는 모든 시민이 모든 영역에서 효율성을 따를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다. 엘륄은 현대 기술 사회가 실질적인 의미에서 선택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가 축소된다고 본다. 이것이 단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사회의 본질적인 특징이라면, 엘륄의 경고를 무겁게 받아야 한다.

 

4. 사례 연구: 디지털 트윈과 하이퍼리드

이 절에서는 첨단 기술이 어떻게 인간을 대상화하는지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를(디지털 트윈과 하이퍼리드)를 제시한다. 이들은 기술의 악용이라는 프레임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기술의 관점에서 포착하기 힘들지만, 기술이 자유와 양립하기 힘든 경우를 보여준다. 

1) 물리주의와 데이터 환원주의

물리주의는 포괄적으로 보아 정신이 물질 현상으로 환원되거나 거기서 창발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특히 물리주의를 받아들이는 경우 물질의 인과관계로 엮인 세계에서 과연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해 다양하고도 복잡한 이론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런 추상적인 논의와는 별개로, 인간의 마음을 다양한 데이터로 환원하여 이해하고 예측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왔고, 일정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의 활용이다. 여러 물리주의의 논의는 원리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데 반해, 이들 기술은 현장에서의 유용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접근을 ‘데이터 환원주의’라 이름 붙여보자. 

데이터 환원주의는 어떤 현상을 데이터의 형태로 환원하여 파악하고자 하는 입장을 말한다. 이때 얼마만큼의 데이터를 확보해야 그 현상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할 수 있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관련 데이터를 많이 모으고 세밀하게 분석할수록 현상에 더 가까워지고, 어느 지점에서는 현상과 데이터의 총합을 비교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논변이 가능하다. 

2) 디지털 트윈

데이터 환원주의를 잘 보여주는 예로 최근 자주 언급되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을 들 수 있다. 디지털 트윈은 기계나 건물, 자연 현상 등을 디지털로 재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개념은 이제 스마트 시티(Smart City)에도 적용되고 있다. 도시 전체의 디지털 트윈을 만들면 도시의 에너지 소비, 대중교통, 보안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문제점을 인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 시티의 디지털 트윈에는 인간의 요소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스마트 시티의 디지털 트윈에서 일어나는 데이터 환원은 인간의 자유를 무시할 공산이 크고, 어쩌면 무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그의 『짓기와 거주하기』에서 이런 스마트 시티의 사례로 인천의 송도를 든다. 송도는 도시의 모든 흐름을 중앙집중적으로 예측하고 관리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도시의 운영 방식이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이곳에서는 모든 문제가 미리 제시되고 해결되기 때문에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또 모든 것이 정밀하게 배치되어 있고 사용자 편리성을 극대화하려 노력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우연적 사건이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다. 나아가 스마트 시티가 추구하는 효율성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람의 독립적인 욕구는 무시된다. 세넷은 이것을 “시민을 바보로 만드는” 시스템이라 비판한다.

 

3) 하이퍼리드

디지털 트윈이 사물의 물리적 변화나 사람의 외면적인 활동의 분석에 관련되는 경우라면, 알고리즘을 이용한 추천 시스템은 사람의 판단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경우이다.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과거 데이터에 기반하여 그의 미래 선택을 제안하고, 그 제안에 근거하여 선택을 하면 그것은 다시 사용자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사용되는 과거 데이터가 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한편으로는 편의성과 적합성이 높아질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용자에게 특정 종류나 성향의 데이터만이 제공되고 그 범위 안에 사용자가 갇히는 이른바 메아리방(echo chamber) 효과나 필터 버블(filter bubble)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발표자는 이런 현상을 인터넷 상에서 사용자가 다양한 정보를 서로 연결지어 사용할 수 있는 하이퍼링크(hyperlink)를 넘어서 정보가 사용자를 찾아가는 것이라 정의하고, 이를 ‘하이퍼리드(hyperlead)’라 이름 짓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이 개념은 맞춤형 정보의 제공을 통해 외부(알고리즘)의 분석과 개입이 개인의 결정을 이끄는(lead) 것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용자의 과거가 미래의 추천을 결정하면서 결과적으로 각자의 판단과 선택을 대신하는 이와 같은 시스템에서 개인의 자유와 개성은 점점 무력해진다.

4) 기술의 자유 vs. 기술 사용의 자유

스마트 시티와 하이퍼리드의 사례는 오늘날 기술이 인간의 생활과 사고에 연결되어 들어올 때 취하는 존재론적 전제를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이들 기술을 오용하여 권력이 없는 사람을 대상화하지 않더라도, 이들은 인간을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두 기술이 작동하는 과정에서는 ‘선택의 문제’로 단순하게 정의된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가 설 자리마저 분명하지 않게 된다.앞서 근대의 이란성 쌍둥이라 부른 기술과 자유가 결별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술을 통한 자유의 약속이 아닌 기술의 자유를 주장하는 움직임도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보르그만이 말한 것처럼 기술의 산물과 기계류가 분리되고 그 산물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서, 기계류의 개발을 무조건 추구해야 할 만한 일로 생각하는 이가 많다. 이는 기계류는 삶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보르그만의 지적과 묘하게 일치한다. 나아가 이들은 소위 외삽법(extrapolation)을 앞세워 그동안 과거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가능하게 된 것처럼 앞으로도 엄청난 발전이 가능하리라 본다. 따라서 기술 개발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제나 제약은 가능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잊을 만하면 시작되는 기술 관련 ‘규제 철폐’의 주장은 이런 맥락과 연결된다. 

기술 개발의 자유를 추구하는 입장은 최근 지구 온난화 문제와 관련하여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자의 과도한 기술 사용의 자제를 강조하는 움직임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자연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중요한 도구였던 기술의 개발과 사용이 자연의 훼손을 초래했고, 그 결과 우리는 기술 사용의 자유를 일정 부분 반납할 것을 요구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기술은 인간의 자유를 약속했건만, 오늘날 우리는 그 기술이 자유를 요구하고 인간은 자유의 반납을 요구받는 상황을 맞이했다. 

 

5. 물음을 던질 자유

이 두 기술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자연을 정복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한 기술이 동일한 방법론을 인간에 적용했을 때 불가피하게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술의 악용 가능성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기술의 문제와 함께 기술과 자유가 어긋나는 상황을 심화시킨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서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자유는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인정할 자유’뿐”이라는 엘륄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보고자 한다. 엘륄은 기술 사회에서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자유의 불씨를 살리려 한다.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는 이 역설적인 희망은, 엘륄의 표현대로 현재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이 부자유의 인정은 더 근본적으로 현 상태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엘륄이 말한 대로 기술로 인해 새로 생겨난 부자유를 인정하고 다시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디지털 트윈 개념을 도시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이퍼링크로 제공되는 엄청난 데이터 중 필요한 것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하이퍼리드의 현상을 막기 위해 사용자의 주도권을 더 인정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기술 사용의 자유만 포기할 것인가? 기술 개발의 자유도 포기하거나 보류하는 것은 어떠한가? 기술이 진보를 가져오는가? 무엇이 진보인가? 이런 물음에 더해 고려해야 할 것이 책임에 대한 논의이다. 자유가 없으면 책임을 질 수 없으므로, 책임을 스스로 지는 것을 통해 자유로움을 증명할 수 있다. 

기술 오용의 가능성과 바람직하지 못한 기술이 더 영향력을 가지는 현실은 이런 물음이 제기되어야 할 필요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물음이 구체적인 해결로 이어지는 단초가 된다. 개별 기술을 개발할 때 그 기술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운용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그것을 차단하는 시스템이 처음부터 구축되어야 한다. 나아가 악용의 가능성이 너무 크고 막을 방법이 없다면, 그 기술의 유용성 자체에 대한 검토에 들어가야 한다. 

바람직하지 않은 기술에 대한 평가 역시 현실적인 차원에서 시작할 수 있다. 대량 살상 무기나 유전자 가위 치료를 배아에 적용하는 것, AI를 탑재한 자동 살상 무기에 대해 개발 자체를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은 상당한 정도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합의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분석하여 우리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기술의 특징과 판단의 기준을 탐구할 수 있다. 기술과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의 제기는 이렇게 구체적인 기술 현상에 대한 반추에서 시작된다.

 

6. 결론

현대 기술은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파악한 근대 사상의 또 다른 적자이다. 그런데 그 기술 발전을 성취하는 이성적 인간은 기술의 산물에 의해 다시 영향을 받는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자유에 역행하는 것 같은 현상은 기술을 만들어 사용하되 다시 거기 영향을 받는 호모 파베르의 역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물론 첨단 기술의 시대에 자유라는 개념 자체를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그러나 어떤 자유이건 그것을 보여주는 최소한의 증거는 부자유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기술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능력과 의지이다. 그 물음이 그치는 순간 자유도 함께 멈춘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기술 발달과 인간의 자유 (손화철 한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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