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의지란 무엇이고 왜 우리는 일반의지를 따라야 하는가? - 코로나 시대의 루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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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의지란 무엇이고 왜 우리는 일반의지를 따라야 하는가? - 코로나 시대의 루소 읽기
  • 이충훈 한양대학교·불문학
  • 승인 2022.08.0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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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_ 『정치경제론·사회계약론 초고』 (장 자크 루소 지음, 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280쪽, 2022. 06)

 

지난 2년간의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나는 자주 루소의 일반의지의 문제를 떠올리곤 했다. 분명 코로나 바이러스는 좀비 바이러스가 아니다. 우리는 속절없이 종말을 향한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방역과 위생에 만전을 기한다면 감염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두 달, 그리고 일 년, 이 년이 흘렀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고,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벌써 희미해졌다. 우리는 생존자라기보다는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포로쯤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했다. 도대체 다소 심한 정도의 감기 따위의 유행으로 사회를 멈춰 세우고, 개인의 자유에 이렇게 족쇄를 채워도 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위기를 과장했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상황을 위기로 규정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일 거며, 시민들은 그런 상황을 받아들여 기꺼이 자유를 포기해도 되는 걸까?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일반의지는 “항상 곧고 항상 공익을 향한다.”(2권 3장)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을 위기 상황으로 규정하고 시민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제한한 것은 이런 일반의지를 따른 것일까? 하지만 이 통제와 규제가 만장일치로 승인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조치가 달갑지 않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의 생존권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국가의 보건 조치는 ‘다수의’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반대 의견에 제한을 가한 것일까? 그럴 때 ‘다수의’ 이익의 추구가 항상 올바르므로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고 결국 전체의 이익에 봉사하는 일이 옳은 것일까? 

루소의 일반의지의 문제가 어려운 것은 그가 이를 전체의 의지와 개별, 혹은 집단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의지는 단 한 명의 반대도 없는 만장일치의 의지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장일치의 의지(전체의지)가 항상 옳거나 모두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수의 의지인가? 소수의 의견이라도 사태를 더욱 정확하게 보고 더욱 합리적인 해결 방안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떤 의견이 더욱 정확하고 더욱 합리적이라는 결정은 누가 내리는가? 전문가들인가?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인가? 그들의 결정이 항상 옳으리라고 누가 보증할 수 있을까? 그 결정이 더욱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여지는 없는가? 

이런 까닭에 루소의 일반의지 이론을 전체주의 이념의 토대가 되었다고 비판하는 입장도 흔하다. 국가와 사회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시급한 해결책은 내부의 불필요한 갈등과 서로 상충하는 개별 이익을 중단하고 포기하는 일일는지 모르겠다. 소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말의 함의가 그것이리라. 

그런데 시민 전원이 동의하는 전체의지가 존재한다고 해도, 이렇게 전원이 찬성한 전체의지의 실현이 항상 올바른 해결책이 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루소가 일반의지와 전체의지를 구분하는 이유는 후자는 결국 “사적 이익에 몰두하는 개별의지의 합일 뿐”(2권 3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염력은 강하지만 치명률은 낮기 때문에 감염 위험을 과장할 필요가 없고 심지어 경제활동에 제한을 가한다면 오히려 빈곤층의 생활이 위협받게 되므로 이 상황을 섣불리 위기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한 사회의 시민들 전원이 동의할 때 이를 일반의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겨울철 감기처럼 어차피 누구나 한두 번쯤은 감염되기 마련일 테니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리라는 확신이 과연 일반의지일까? 

『사회계약론』만 놓고 본다면 일반의지 개념은 너무도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국가 통치의 원리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모두가 마음 깊이 동의해서 설령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일반의지라면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비록 구성원들의 일부가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더 많은 시민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지라도, 그런 희생을 누가 누구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글을 쓰는 나는 창피하게도 벌써 주저하고 있다. 누군가가 기꺼이 전체를 위해 희생하고 그 희생으로 다른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법으로 정해야 할까?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시민들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기희생 앞에서 주저했던 그 사람을 법으로 처벌해야 할까? 예를 들어 코로나 시대에 어떤 이유에서건 격리 조치를 위반하고 불편한 마스크 착용을 거부한 사람을 처벌해야 할까? 만일 그렇다면 그 처벌의 주체는 누구일거며, 처벌의 이유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루소의 전 저작의 독서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 독서를 할 수는 없으니 여기서는 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1755) 이후, 그리고 『사회계약론』(1762) 이전에 썼던 두 편의 글, 그러니까 루소가 『백과사전』에 실었던 「경제」 항목(이 글은 루소 사후에 그의 최초의 『전집』 출판을 맡았던 뒤페루에 의해 『정치경제론』이라는 제목을 갖게 된다)과 『사회계약론』 집필 이전에 미완성 원고로 남았던 『사회계약론 초고』를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이 두 저작에서 루소는 자신의 일반의지의 문제를 『사회계약론』에서 정식화한 추상적인 개념과는 달리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정치경제론』에서 “노골적으로 일반의지에 반(反)하는 경우 공적 권위를 동원해 일반의지를 가혹하게 저지할 때 일반의지는 오히려 뚜렷이 드러난다”(『정치경제론 · 사회계약론 초고』, 후마니타스, 2022, 44쪽)는 표현이 발견된다. 일반의지는 그것이 공적 권위로 억압될 때 드러난다. 민주주의 원칙이 무너지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 시민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억압될 때 누구나 이 상황은 일반의지의 위기임을 느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그 존재조차 자주 잊으면서 누려왔던 권리가 부당하게 훼손될 때 우리의 마음이 느끼고 이성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의지가 곧 일반의지이다. 그것은 단지 저항의 정신이 아니다. 일반의지가 무너져 소수가 됐든 다수가 됐든 부당한 조치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을 위해 연대한다면 그것은 일반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의지는 그저 감정적인 분노와 막연한 동정심과는 무관하다. 일반의지는 정념이 침묵할 때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가 루소가 『사회계약론 초고』(1권 2장)에서 “각 개인에게 일반의지는 정념이 침묵할 때 그 개인이 자기와 같은 사람이 그 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추론하는 지성의 순수 작용”(위의 책, 116쪽)임이 확실하다고 말하는 지점이다. 내 의지가 다른 사람의 의지와 하나가 될 수 있으려면 이성적인 추론과 판단과는 다른 목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왜 시민들은 자기에게 손해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희생이 필요할 수도 있는 일반의지를 기꺼이 따르는 것일까? 『사회계약론』과 『초고』에서 루소는 “사회계약에서 개별자들이 어떤 것을 정말 포기하게 된다는 말은 너무나 거짓”이라고 잘라 말한다. 작든 크든 한 시민의 손해와 희생이 더 큰 이득과 보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올바른 사회계약으로 성립된 사회이다. 『사회계약론』 1권 6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나는 공동체 전체에 내 모든 권리를 완전히 양도한다’는 그의 언명은 공산주의의 공동소유와 전체주의와는 정말이지 전혀 무관하다. 내가 양도한 내 모든 권리는 강력한 권력을 쥔 개인이나 특정 당파가 전유할 수 없다. 일반의지는 절대로 개인이나 일부 집단의 의지가 아니며, 또 그런 의지는 결코 일반의지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 루소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내가 손해를 보거나 희생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렇지만 올바른 사회에서라면 내가 일반의지에 따라 능동적으로 감수한 손해와 희생은 더 큰 이익과 보상으로 돌아온다. 달리 말하면 내가 어떤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자 한다면 결국 나는 더 큰 손해와 희생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루소가 주장하는 일반의지의 원칙이며, 한 사회가 건강하고 오래 지속되고 번영을 유지하는 데는 사회의 모든 결정이 오직 일반의지만을 따를 때 가능하다.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 착용이며, 격리와 거리두기는 일정 정도 내 손해와 희생을 요구한다. 그러나 내가 그런 강요된 희생을 감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잠재적 감염자가 될 것이고, 내 가족과 내 친구들 모두를 감염시키는 슈퍼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조치는 전체주의적인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조치와는 정말이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 수고를 전제로 하는 위생 수칙의 준수가 나는 물론 우리 공동체의 감염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은 나의 감염을 막는 것은 물론 내가 잠재적인 감염자로서 공동체에(그보다 먼저 내 가족에) 가할 수 있는 위험을 스스로 막기 위한 시민으로서의 의무이다. 아직 코로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다른 위험이 닥친대도 적어도 우리에겐 시민으로서 따라야 할 일반의지가 있다.   


이충훈 한양대학교·불문학

한양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파리 제4대학에서 『단순성과 구성: 루소와 디드로의 언어와 음악론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디드로의 『미의 기원과 본성』, 『백과사전』, 『듣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농아에 대한 편지』, 『자연의 해석에 대한 단상』, 장 스타로뱅스키의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 사드의 『규방철학』, 모페르튀의 『자연의 비너스』등을 번역했고, 저서로 『자연의 위반에서 자연의 유희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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