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칼은 누구를 겨누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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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은 누구를 겨누고 있는가
  • 구미정 숭실대·기독교윤리학
  • 승인 2022.08.0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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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이 전시된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2019년 여름에 그곳에서 <키스>를 직접 보았다. ‘황금의 화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형캔버스 위에 가득 뿌려진 황금빛이 그토록 찬란할 수 없었다. 왜 이 그림이 클림트의 대표작인지, 어째서 이 그림만 다른 나라 어느 미술관에도 대여해 준 적이 없는지 어렴풋이 알 만했다. 

한데 내 눈길은 <키스>보다도 <유디트 Ⅰ>에 더 끌렸다. 클림트의 ‘황금 시기’를 연 첫 작품이다. 세기말 화가답게 이 그림에서도 퇴폐적인 관능미가 돋보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여인의 손에 남자의 머리가 들려있다. 클림트는 이 남자의 이름까지 그림 속에 적어놓았다. 구약성서 외경 『유디트』에 등장하는 아시리아 제국의 홀로페르네스 장군이다. 천하의 명장으로 소문난 그였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전력이 한창 기우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여 패한 것도 부끄러울 판에, 자신의 목을 일개 여인에게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그 여인이 유디트이다. 과부의 몸으로 수절하며 지내던 중 자기가 살던 성읍이 위기상황에 놓이자 과감히 상복을 벗고 ‘남자들의 눈을 홀릴 만큼 요란하게’ 꾸민 뒤 적진에 잠입해 적장의 목을 베었다. 우리 역사 속 논개 이야기와 놀랍도록 닮지 않았나?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남편이 죽자 기녀의 복장을 하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유디트는 ‘유대인 여자’라는 뜻이다.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에 가깝다. 어쩌면 성서 저자는 주인공의 이름을 이렇게 처리함으로써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역사적 책무를 일깨우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명량>에 나오는 정씨 여인을 떠올려 보라. <한산>에도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사회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기득권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는커녕 제 잇속만 챙기는 ‘불의’한 모습을 보일 때, 변방의 인물들이 오히려 ‘의’에 복무하니, 이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역이겠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던 시기와 맞물려 연세대학교 재학생 3명이 교내 청소노동자들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시급 440원 인상과 샤워실 설치 등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집회를 벌이는 소리 때문에 ‘학습권’이 침해당했다는 이유다. 이들은 또한 ‘미래에 겪을 정신적 트라우마’를 고려해 손해배상 소송도 냈다. 여기에 여당 소속 청년 구의원이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이 사건에 사회적 눈과 귀가 쏠리게 되었다.

대학 내 청소노동자들의 지위와 처우에 관한 집회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0년 전에도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유사 집회가 홍대에서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는 재학생은 물론 다른 대학교 학생들까지 나서서 집회에 동조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번처럼 재학생들이 대놓고 집회에 시비를 건 적은 없었다. 

고작 3명이 벌인 일 가지고 웬 소란이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한데 지난 총선에서 불거진 젊은 세대의 보수화 현상을 떠올리면 ‘고작 3명’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지난 10년 사이에 우리 사회는 더 닫히고 굳어지고 뒤틀렸다. 신자유주의 시장질서가 보통사람의 삶에서 이웃과 타자를 소거해버렸다. 나/동일자 외에는 모두 경쟁자이고 적이라는 가공할 이분법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오늘의 대학생들은 무한경쟁으로 포장된 총성 없는 전쟁에 강제동원된 세대다. 전시 상황에서는 파충류의 뇌가 작동하는 법이다. 꼬리를 자르고라도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표현하는 포유류의 뇌, 합리적 추론을 통해 이상적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뇌가 발동할 여력이 없다.

그러므로 대학생들이 자기보다 힘없는 약자를 향해 칼을 겨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장애인 단체의 이동권 투쟁에 대해 “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다”며 볼멘소리를 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당대표의 발언을 생각해 보라. 이로써 그는 ‘시민’에 장애인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명백히 공표했다. 학벌을 지독히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하버드 출신’의 이준석은 ‘일단 먹히는’ 상품이었다. 그가 티브이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며 자신의 소신을 마음껏 펼치는 사이에 우리의 대학지성은 도덕성 마비라는 중병에 포획되고 말았다.

그가 추락했다고 해서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죽은”(2010년 김예슬 선언 중 일부) 대학이 당장 되살아날 성싶지는 않다. 병증은 생각보다 깊다. 국가가 기업의 하수인이 되고 기업이 대학의 원청업체가 된 이력을 먼저 짚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불의한 ‘삼각 동맹’이 해체되지 않는 한, 파충류의 뇌는 호시탐탐 청춘의 불안을 자극할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권민우, 그러니까 ‘공정’의 칼날을 강자가 아닌 약자에게 들이대며 ‘역차별’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터져 나올 것이다.

길은 어디에 있을까?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상투적인 처방은 괄호 안에 넣어두자. 순진하게도 내 귀에는 사람이 희망이라는 시구가 이명처럼 들려온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최수연 같은 사람, 자기 살기도 바쁘지만 그래도 힘든 삶을 꾸리는 타인에게 잠시나마 ‘봄날의 햇살’이 되어주는 사람이 희망이다. 세이렌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죽음의 협곡을 지날 때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야 살아남을 수 있다. 대학교육의 목표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구미정 숭실대·기독교윤리학

다양한 인문학적 글쓰기와 강연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기독교여성학자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기독교학과를 졸업했으며 기독교윤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교회 밖 인문학 수업』, 『두 글자로 신학하기』, 『호모 심비우스』, 『핑크 리더십』, 『구약 성서: 마르지 않는 삶의 지혜』 외 다수가 있고, 옮긴책으로 『교회 다시 살리기』, 『생명의 해방』(공역), 『과학의 윤리』(공역), 『낯선 덕: 다문화 시대의 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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