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생각함과 말함의 무능력, 악의 근원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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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생각함과 말함의 무능력, 악의 근원을 읽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8.0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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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읽기 | 윤은주 지음 | 세창출판사 | 188쪽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전범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린다. ‘아이히만은 선천적인 악인이 아니라, 그저 생각함에 무능력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대중은 충격에 휩싸였다. 생각함에 무능력하다면, 누구든 아이히만처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아렌트는 재판에서 무엇을 목격했기에 이 같은 결론을 내렸을까?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주장하게 된 사상적 배경은 무엇일까? 어떤 이유로 아이히만은 냉혹한 괴물이 되었을까? 인간의 ‘악’에 대한 섬뜩한 통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한 권에 담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1961년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 재판’을 기록한 보고서다. 재판 참관 보고서이기 때문에 원전을 그냥 읽을 때는 분량도 많고, 평범한 기록도 많고, 무엇보다 아렌트가 왜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배경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 책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전체적인 내용을 압축한 것은 물론,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적 배경, 아돌프 아이히만의 행적 등을 제시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원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정의의 집’이라는 이름의 재판소에서 한 전범의 재판이 열린다. 마른 체구, 커다란 안경, 깔끔한 정장, 당당한 자세.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보이는 이 사람, 바로 피고인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수천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았던, 유대인 말살 정책의 실무자인 그가 너무도 순순히, 그리고 당당히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방청석의 유대인은 물론 재판을 진행하는 재판장마저도 그의 악랄한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고 전 세계에 보도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로 가득 찬 유대인의 바람과는 달리, 아이히만은 대단히 차분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한다. “저는 상부가 시키는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나치 정권 아래의 독일에서 히틀러의 말은 곧 법이었습니다. 법을 준수하는 것은 공직자가 당연히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정의의 집’에서 사람들은 아이히만을 단죄할 정의의 명분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방청석 속에서 ‘한나 아렌트’라는 이름의 한 객원기자만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아이히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법 앞에서는 무죄다.” 아이히만이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내세운 논리다. 아이히만은 재판 중에 자기가 수행한 유대인 말살 과정을 세세히 진술했다. 재판정 입장에서는 그처럼 반인륜적인 폭력에 최소한의 저항도 없이 복종했다는 점이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진술을 들은 아렌트는 잔학한 행위의 원인과 관련하여 두 가지 부분을 지적한다. 하나는 칸트의 정언 명법을 왜곡함으로써 히틀러를 향한 복종을 윤리적 행위로 받아들였던 아이히만 개인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치밀하게 조작된 언어 사용을 통해 유대인 말살의 반인륜적인 성격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언어적 문제였다.

아이히만은 경찰 신문 과정에서 자신이 칸트가 말한 의무에 대한 정의를 따라 살아왔음을 밝히며,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인 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정언 명법을 언급했다. 아이히만은 철저히 독일 나치 구성원으로서 자기 모든 행동의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을 히틀러의 명령으로 삼은 것이었다.

조작된 언어의 문제도 반인륜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아무리 판단의 기준을 히틀러에게 맡겼다고 해도, 유대인 ‘제거’, ‘박멸’, ‘학살’ 같은 명백한 단어는 무의식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나치의 보고서에는 ‘최종 해결’, ‘특별취급’ 등 일상 언어로 자극적인 단어를 대체하고 있었다. 아이히만 역시 대체된 일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점차 반인륜적인 학살 행위에 무감각해졌고, 대단한 범죄가 아니라 단순한 업무로 유대인 말살 정책을 대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자 세간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아이히만이 저지른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아이히만의 악행은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생각함과 말함의 무능력에서 나온다.” 그 누구보다 괴물 같았어야 할 아이히만을 평범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도 모자라, 평범한 대중에게 당신이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법정에 있던 모두가 아이히만의 정상적인 상태와 평범한 모습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을 뿐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렌트는 있는 그대로 세상에 전달했을 뿐이었다. 아렌트가 세상에 발표한 것처럼 누구나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생각함과 말함의 무능력이 아이히만의 전쟁 범죄의 원인이었다. 아이히만은 생각의 전권을 히틀러에게 맡기고, 자기 행동이 어떤 파급력을 불러올지, 자기 행동에 따른 상대의 입장은 어떨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관용어나 상투어를 사용해 끔찍한 전쟁 범죄를 가리키는 용어를 대체했다. 해당 단어가 일상적인 언어인 만큼, 날이 갈수록 유대인을 향한 끔찍한 범죄도 일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는 1961년 법정 진술에서도 습관처럼 의례적인 단어로 범죄 용어를 대체했다. 만약 그가 개인적으로라도 기존의 언어를 유지했다면, 윤리의식이나 책임감에서 벗어나 현실감을 상실할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렌트가 본 악의 근원은 평범함 그 자체였다. 악의 평범성.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생각함과 말함의 무능력. ‘악’에 대한 아렌트의 새로운 통찰은 선과 악의 기로에 선 인간의 선택권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말하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저자는 이렇게 짐작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아이히만을 품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면, 누구나 아이히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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