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세계시민주의와 슈미트의 노모스를 철학픽션으로 해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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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세계시민주의와 슈미트의 노모스를 철학픽션으로 해독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8.0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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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계의 칸트: 우주정치적 철학픽션 | 페테르 센디 지음 | 이은지 옮김 | 필로소픽 | 236쪽

 

이 책은 독일 정치철학의 두 거목, 칸트와 카를 슈미트의 저서에 외계인에 관한 논의가 있다는 다소 자극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는 자칫 미심쩍은 가십으로 오해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두 철학자가 외계인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깊숙이 파고든다. 저자는 이들이 인간 및 지구 중심주의를 넘어선 보편적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허구적 가설로서 외계인의 존재를 저작 곳곳에서 소환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SF에 빗대 ‘철학픽션’(philosofiction)이라 명명한다.

저자는 사실 철학사에서 외계인을 다루려는 시도들이 꾸준히 존재했으나, 헤겔의 『자연철학』 이후로 중단되었으며 그리하여 서구 철학은 인간 및 지구 중심주의로 귀결되었다고 진단한다. 저자가 보기에 외계인에 대한 상상은 칸트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다. 칸트의 시대에 근대적 의미의 국민 국가가 형성되고 인류라는 공통 주관으로서의 주체 개념이 정립되면서, 인간과 지구를 보편적이고 총체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허구적 외부로서의 외계의 거주자가 요청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를 슈미트의 ‘노모스’ 개념에서 우주가 요구되는 논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간의 원초적 취득과 분배를 의미하는 노모스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취득되지 않은 공간, 즉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외부 공간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지에 대해 바다가, 유럽에 대해 미 대륙이 자유로운 공간으로서 노모스의 존립을 받쳐주었듯이, 지구에 대해서는 우주가 그러한 역할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저자가 칸트의 외계인과 슈미트의 ‘우주해적’, ‘우주 파르티잔’ 이야기에 매혹된 이유는 이들의 사유가 오늘날 세계화라 불리는 이슈와, 생태 및 난민 문제, 인공위성과 우주여행을 비롯한 우주의 지배와 분배 문제 등 우주정치적 쟁점들과 구조적으로 연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우주정치적으로 해독하는 책의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 센디는 카를 슈미트의 노모스 개념, 즉 최초의 공간 취득과 분배를 통한 원초적 질서 확립이라는 개념을 도래할, 아니 이미 진행된 우주 공간의 분할과 지배라는 새로운 전망 속에서 살펴본다. 즉 지구의 노모스에서 우주의 노모스로 지평을 넓혀 우주와 외계인을 정치적인 사유의 장소와 대상으로 삼으려는 정초 작업을 한다. 

그러나 1962년 출간된 『파르티잔론』에서 그는 땅을 벗어난 ‘우주 파르티잔’을 통해 세계화 이후의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인류의 다음번 새로운 노모스를 형성하게 해줄 우주의 텅 빈 공간을 발견한 뒤 센디는 “이미 우주선이 되어버린 ‘우리가 거주하는 지구 자체’의 닻을 올릴 준비”를 마치고는, 세계시민주의와 ‘영구평화론’을 기획하는 칸트의 외계인에 대한 성찰로 넘어간다.

저자는 ‘왜 없겠는가?’라는 부정의문문을 통해 칸트의 외계인을 불러들인다. 먼저 칸트의 초기작 『천체이론』에서 중기작 『판단력 비판』을 거쳐 후기작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외계 생명체에 대한 질문이 고집스럽게, 반복해서, 책들 곳곳에 은유로, 각주로, 사고 실험으로 나타나는지를 소개하며, 외계인이 칸트의 저작을 관통하는 심오한 논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간학』에서 칸트는 속내를 감추는 인간과 달리 “다른 행성에는 소리 내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성적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고는 “이러한 타자의 행동은 우리 인류의 행동과 어떻게 다를까?” 질문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적어도 우리가 보는 행성 중 일부에 거주자가 있는지 아닌지를 어떤 경험을 통해 결정할 수 있다면, 나는 여기에 전 재산을 걸 것이다.”라고 외계인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다. 『판단력 비판』에는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싸인〉을 상기시키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그려진 의심스러운 기하학 도형을 마주하며 “그 어떤 자연적 원인도 … 이러한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이며, “이성만이 부여할 수 있는 개념”의 결과가 저편에 있음을 주장하며 현대의 SF 영화와의 장르적 유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는 이것을 칸트의 사유 체계에서 ‘관점’이라고 불리는 것과 마주할 때 요구되는 어떤 것, 즉 인간을 지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공정하고 보편적인 시각에서 되짚어 보게 만드는 철학픽션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무엇인지 정의하려면 인간 바깥의 존재를 상정해야 하기에, 칸트가 SF 작가처럼 사유 실험으로 외계인을 그의 철학에 도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자크 데리다의 용어를 빌려 이를 ‘완전한 타자’의 관점이라 부른다. 이 책의 압권은 저자가 칸트의 미학과 정치학을 완전한 타자로서의 외계인이라는 개념으로 이으면서 이 둘을 하나로 묶는 장면, 특히 『판단력 비판』의 숭고 개념을 우주정치적으로 독해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아름다움에 관한 ‘사심 없는 취미 판단’을 정의하는 『판단력 비판』의 유명하고 중요한 단락(§ 2)에서 나타나는 로빈슨 크루소의 관점에서 시작하여 보편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칸트의 사유를 추적한다. 순수한 미에 대한 판단이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즉 욕망에서 고립된 일종의 무인도여야 한다는 조건을 세운 뒤, 칸트는 미에 대한 관심이 오직 ‘사회’에서만 나타난다는 이중성을 통해 판단 주체의 관점을 범세계적 차원으로 확장한 기반을 마련한다.

칸트에게 취미 판단은 객관적 보편성이 요구되는 지적 판단과 달리 주관적 보편성에의 요구, 모두(alle)에게가 아니라 누구나 각자(jedermann), 각각의 타인들(jedes andern)에게 타당해야 한다. 판단력의 규범, 즉 어떤 판단이 보편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으려면, 각각의 타자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저자는 칸트의 이 ‘각각의 타자’를 ‘다른 모든 인간’으로 해석하는 통속적인 번역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이를 외계의 이성적 존재를 포함하는 ‘완전한 타자’로 해석할 것을 촉구한다. 보편적 관점의 문제는 더 이상 지구와 인간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국한될 수 없다. 범세계적 시선을 획득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인류를 외계라는 경계로부터 사유할 필요성이다.” “판단력 비판의 주관적 보편성과 『보편사의 이념』의 범세계주의를 결합하는 쐐기가 『천체 이론』의 우주적 시각에 있”으며, “마치 취미 판단이 지향하는 근거 위의 각각의 사람들 모두가 인류 자체를 포함할 수 있으려면 외계의 지구들에 거주하는 완전한 타자들을 통한 우주론적 우회를 통해야만 하는 것 같다.”

저자의 독창적인 관점은, 칸트의 정치철학과 미학이 어떻게 〈신체 강탈자의 침입〉, 〈화성인 지구 정복〉, 〈우주전쟁〉, 〈아엘리타〉 같은 SF 소설 및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지, 또한 데리다와 랑시에르 등 현대의 철학자들에게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데서 빛을 발한다. 특히 저자는 “칸트가 시나리오를 썼다고 해도 좋을 만한” 미래주의 코미디 영화 〈맨인블랙〉의 분석에서 엄청난 내공을 보여주는데, 주인공 제이가 우주경찰이 되기 위해 익명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되는 것을 ‘보편적인 관점을 얻기 위해 행성에 고정된 속지주의를 넘어, 지구의 땅과 기반을 넘어 우주적 범세계주의로 나아가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우리가 외계인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 되고, 본 것을 기억해서도 안 되는 설정을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로 해석한다. 단, 이것은 감각적인 것의 우주론적 분할로서, 랑시에르가 단순히 감각적인 것의 “인류 및 지구 중심적 분배로 묘사했던 것을 앞서거나 넘어선다”고 분석한다.

도대체 왜 지금 우리가 칸트의 외계인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그것은 전 지구적 세계화와 생태 위기와 난민 문제와 세계 전쟁의 위기 속에서 왜 지금 우리에게 인간과 지구의 시각을 넘어선 보편적 관점, 우주적 관점, 결국 신의 관점이 긴급하게 요구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저자 센디가 칸트의 외계인에게서 발견한 것은 포스트 휴머니즘과 신유물론 등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려는 사상계의 거대한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칸트의 정치철학과 미학을 재고하는 것이 새로운 관점 형성에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믿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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