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위에 발을 디딘 이를 위한 철학 … 평범한 일상 속에서의 도(道)를 전한 『장담의 열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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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에 발을 디딘 이를 위한 철학 … 평범한 일상 속에서의 도(道)를 전한 『장담의 열자주』
  •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동양철학
  • 승인 2022.07.3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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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읽기_ 『장담의 열자주』 (장담 지음, 임채우 엮고 옮김, 한길사, 880쪽, 2022.06)

 

부조리한 세상

인간은 영리하면서 욕심을 부리는 이기적 존재이다. 전자의 입장은 인간의 본성 속에 완전히 선(善)한 천리(天理)가 내재해 있다고 한 성리학이나 인간의 본질을 이성(理性)에 두었던 서양의 이성주의 철학이 대표하고, 후자는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荀子)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주장한 토마스 홉스가 잘 보여주고 있다. 

누구든 인간이라면 풍요로움 속에서 안락과 영생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늘 부족하고 결핍에 시달리며, 세상은 언제나 갈등과 혼란 속에 있다. 인간의 영리함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문명한 사회를 일궈내기도 하지만, 이것이 이기적 욕망과 함께 잘못 작동하게 되면 때로 동물보다도 못한 비참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도를 넘은 인간들의 욕망은, 완벽한 청정상태에 있던 자연을 공해투성이로 오염시키고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던 상생의 생태계를 상극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든다.


유가의 치세의 도(道)와 그 문제점

춘추전국의 혼란을 겪으면서 태동한 유가는 누구보다도 현실의 부조리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선(善)하다고 애써 주장하면서, 현실세계에 삼강오륜과 인의예지라는 윤리를 세우고, 상하존비의 계급적 질서를 세워서 사람들의 욕망을 절제하게 하면 유토피아가 열릴 것으로 낙관했고, 이를 위해 일단 왕을 중심으로 세상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상주의적 낙관론은 현실주의적 비관론보다 훨씬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군주의 욕망은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 천하에 영향을 미치게 되니, 만백성을 헐벗고 굶주리게 하며 전쟁의 불지옥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유가는 이 끝간 데를 모르는 왕의 욕망을 충직한 간언으로 보좌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역시 순진한 낙관론에 불과했다. 양을 훔치는 아버지에게 효자가 눈물로 호소하듯 하면 왕도 마음을 돌이키리라는 설정은 너무 순진했고, - 거의 그런 경우도 없지만 - 만에 하나 왕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고 해도 간신배들과 왕당파들까지 그 순진한 눈물로 인해 자신들의 금은보화를 포기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코드정치니 진영논리니 하는 패거리 정치판이 온 사회에 횡행함을 목도하는 바와 같다. 예나 지금이나 지성(知性)이나 양심(良心) 따위는 교묘한 수사(修辭) 속에 감춰져 있을 뿐, 결국 누가 더 힘이 센가 누가 더 많은가로 결정나지 않는가! 먹잇감을 앞에 놓고 싸움판을 벌이는 승냥이 떼와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논어』를 보면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를 구별하면서, 무도한 때에는 어리석은 듯 침묵하고 있으라는 말을 6차례에 걸쳐 8번을 반복하고 있다.(『論語‧公冶長』 子謂南容 “邦有道 不廢 邦無道 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論語‧公冶長』 子曰 “甯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論語‧泰伯』 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論語‧憲問』 憲問恥. 子曰 “邦有道 穀 邦無道 穀 恥也.” 『論語‧憲問』 子曰 “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 『論語‧衛靈公』 子曰 “直哉史魚! 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 君子哉蘧伯玉! 邦有道 則仕 邦無道 則可卷而懷之.”)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무도한 세상일수록 현자가 앞장서서 발언을 하고 개혁의 수범(垂範)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배웠다는 지성인이나 재덕을 갖추었다는 군자가 물러나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 세상은 누가 바로잡는단 말인가? 이렇게 공자 같은 불세출의 지혜로운 성인조차도 서로 모순되는 말을 이중적으로 해야 할 정도로, 왕의 무도(無道)함을 제어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이 왕을 보좌한다고 자임했던 유가의 한계였다. 유덕자(有德者) 대신에 유력자(有力者)에 충성하다 보니, 생겨난 태생적 문제였다.

그나마 이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이었으나, 수많은 백성이 굶어죽고 쇠절구가 핏물에 떠내려갈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뒤에야 혁명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군주의 일탈을 미연에 교정하거나 방지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결코 풀지 못했다. 또 신민이 무도한 왕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군사부일체라는 유가의 논리에 정면으로 모순 충돌한다. 아무리 아버지가 무도하다고 해서 자식이 바꿀 수 없는 것은 천륜(天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성혁명론마저도 현실권력에 의해 불온사상으로 금지되었으니, 유가는 군주의 횡포 앞에서는 자신의 도(道)를 구현할 길을 잃은 채 침묵할 뿐이었다.

 

도가의 비판과 기능

도가는 유가처럼 현실에서 도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부정을 통해 중국사상사에서 가장 비판적이면서도 가장 형이상학적인 사상을 구축했다. 도가는 황금과 권력으로 치장한 제국(帝國)을 비웃고 부조리한 세속과 불합리한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영원불변의 도(道)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 도는 만물이 생성되어 나온 근원이면서, 뭇 존재의 본질이자 원리였으며, 목표이자 귀결처라고 했다. 인간은 도에서 나왔고 도를 따라 살다가 죽으면 다시 도에로 돌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고향집을 잊어버린 고아처럼, 도에로 가는 길을 잊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유가는 세상을 안정시키고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학이나 윤리사상으로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인간 이성을 스스로 반성하고 우주본체론에까지 사유를 확장한 도가가 없었다면, 중국사상은 매우 초라했을 것이다. 혜시(惠施)·공손룡(公孫龍)의 명가(名家)나 법가·병가·음양가·황로사상 등 제자백가에 끼친 노장사상의 영향은 절대적이었고, 공맹순의 유가사상도 광접여(狂接輿)나 양주(楊朱)를 비롯한 노장의 비판이 없었다면 전제왕권을 위해 봉사하는 관학(官學)을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훗날 서역에서 새로운 불교철학이 들어왔을 때에도 그 낯설고 난해한 사상을 이해하는 바탕을 마련해준 것은 도가사상이었고, 그 결과 중국사상계가 유도불 삼교의 중세 체제로 재편되도록 인프라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 유가가 난세에 무력하게 침묵하면서 터럭 끝 하나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라고 변명하며 명철보신(明哲保身)하고 있을 때에, 생사(生死)를 물거품처럼 보는 도가의 세례를 받은 지성인들은 겁 없이 나서서 지배층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독재왕권을 비판했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조리와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조를 열 때는 언제나 도가가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중국철학의 중심은 유가가 아니라 도가사상이고, 유가·묵가·법가 등이 보조적으로 발전해왔다고 보았다(陳鼓應, 『노장신론』). 또 영국의 과학사가 죠셉 니담(1900-1995)은 중국에 과학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도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명언을 남겼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과학뿐 아니라, 중국인의 사유방식 속에는 무상한 현실을 넘어서 영원을 추구하는 도가의 정신이 깊숙이 스며있다. 

열자라는 책

열자는 노자·장자와 함께 도가의 3대 사상서라고 불리는 중요한 고전이다. 노자·장자·열자는 인명이기도 하지만, 이 3명의 철학자가 사실상 실존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래서 이는 서명으로 보고 어느 시대에 등장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편찬되고 전수되었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좋다. 이들 모두 어느 개인이 특정 시기에 저술했다기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편집되고 수정 보완되어 현재와 같은 고전으로 정립되었다. 그 저작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분분해서, 그 등장 시기나 편집과정에 대해 명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어떤 학자는 노자보다 장자서가 더 앞선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략 춘추 말에 노자가 나오고, 전국 말기에 장자가 편집되었고, 한위(漢魏)시대에 열자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지음(知音)이나 기우(杞憂)의 고사, 우공이산(愚公移山)·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이야기가 열자서에 등장하는 고사들이다. 하지만 정작 열자서에 대해서는 노자나 장자에 비해 그다지 알려져 있지는 않다.

『열자』는 「천서(天瑞)」·「황제(黃帝)」·「주목왕(周穆王)」·「중니(仲尼)」·「탕문(湯問)」·「역명(力命)」·「양주(楊朱)」·「설부(說符)」의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성왕들의 신화와 전설을 비롯해서‚ 공자 노자 등 역사 인물을 위시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는 우언(寓言)으로 되어있다. 「천서」편에는 기(氣)·형(形)·질(質) 개념을 중심으로 우주본체에 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담겨있는데. 이는 선진시대의 노장철학이나 한대의 위서(緯書)의 내용과 비슷하다. 이렇게 본체론이나 인식론의 문제에 있어서는 노장사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나, 인생관에서 열자서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역명」편에서는 인간의 지력(智力)과 천명(天命)을 대조시키면서, 인간의 장수와 부귀는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으니,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체념적 운명론을 말하는 듯하지만, 「양주」편에서는 이렇게 이미 정해져있는 부귀·장수를 구하거나, 헛된 명예를 얻으려다가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적극적으로 살라고 충고해주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도

노자나 장자는 탈속적 태도로 고원한 도를 추구한다. 노자는 달관적 경지에 서서 희희낙락 봄놀이 즐기듯 하는 세상 사람을 바라보며 고독한 탄식을 발하고, 장자는 세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린 채 적멸(寂滅)의 세계에서 홀로 노닐며 천지 정신과 왕래하는 초탈적 태도를 보인다. 노자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경지에 이른 달관한 도인이고, 장자는 우주를 넘나드는 초월적 지인(至人)이라고 한다면, 열자는 도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보통 사람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열자가 바람을 타고 다닌다고 했으나, 그는 천상계의 신선이 아니라 보름이 지나면 다시 땅위에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야 하는 존재이다. 

열자서의 책 제목은 ‘열자’이지만, 열자는 스승이 아니라 스승에게 훈계를 받는 제자로서 등장한다. 또 열자서에는 가난뱅이나 노비 등, 못 배우고 소외된 떠돌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눈물겨운 실패담도 많이 등장한다. 열자는 약간 부족하고 한발 늦으며 어떤 경우에는 열등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 실패로 끝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공감하면서 이것이 삶의 실상이라고 느끼게 되고, 그들의 시행착오를 딛고선 힘겨운 구도행(求道行)에 박수를 치고 격려하면서 우리의 삶도 헛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열자사상은 어떤 관념적 사상보다도 훨씬 더 친근하다.

장자는 하나의 소리를 낸다는 것은 완전한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요 다른 소리를 못듣게 제한하는 것이니, 소리를 멈춘 상태가 도를 간직한 최고의 음악이라고 했다. 장자는 유(有)와 무(無)의 형이상학으로 무음(無音)의 세계를 설명하지만(『莊子 ·齊物論』, 有以爲未始有物者, 至矣, 盡矣, 不可以加矣...有成與虧, 故昭氏之鼓琴也; 無成與虧, 故昭氏之不鼓琴也.),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소리가 끊어진 음악의 경지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에 비해 열자의 이야기는 가슴으로 와닿는다. 

설담(薛譚)은 노래명창 진청(秦靑)에게 노래를 배웠는데 아직 진청의 기술을 다 익히지 못했으나 이제는 다 배웠다고 생각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사직인사를 드렸다. 진청은 그를 말리지 않았고, 교외의 큰길까지 전별을 나갔다. 진청이 떠나는 제자를 전송하며 박자를 맞추면서 슬프게 노래를 하자 그 소리에 숲이 일렁거렸고, 메아리가 흘러가던 구름을 멈추게 했다. 이를 본 설담은 사과하며 되돌아가겠다고 청했다. 진청이 말했다. “옛날 명창 한아(韓娥)가 제나라에 가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옹문(雍門)에 들러서 노래를 팔아 양식을 얻게 되었네. 그런데 한아가 떠난 뒤에도 그 여음(餘音)이 남아 그 집 대들보에 계속 맴돌았는데, 사흘이 되어도 그치지를 않아서 이웃 사람들은 그이가 아직 가지 않고 노래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네.”

주지하다시피, 백아의 거문고(琴) 소리를 종자기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 지음(知音)의 고사는 우리에게 음의 극치를 찾는 고독한 예술가의 경지를 잘 말해주었다고 한다면, 여기에서의 노래 명창이 박자를 맞춰 노래하자 숲이 일렁이고 구름이 멈추었다거나, 여음(餘音)이 대들보에 남아 사흘 동안이나 계속 맴돌았다는 이야기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 감동의 극치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사실 인간의 목소리는 거문고 소리보다 더 정답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고, 사람들의 심금을 생생하게 울려주는 보편성을 갖는다. 장자와 열자를 보면 이렇게 3종류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백아·종자기가 클래식이라면 진청·한아는 대중가수라고 해도 되겠다. 이에 비해 장자가 말한 거문고 타기를 멈춘 소문(昭文)은 음악가를 넘어서 있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결국 그 궁극의 경지는 엉켜있던 인간의 마음을 풀어서 영원한 도의 세계로 안내한다.

도와 세속이 다르지 않으니...

열자에는 밤마다 왕이 되는 꿈을 꾸는 늙은 종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매일 낮에는 주인에게 시달리다가 밤에는 곯아떨어져 잠이 드는데, 매일 밤 왕이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꿈을 꿨다. 반대로 만석꾼 주인도 낮에는 재산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하다가 밤마다 피곤에 지쳐 잠이 드는데 밤마다 남의 집 종이 되어 시달리며 신음하다가 겨우 악몽을 깨곤 했다. 갑부는 꿈을 통해서 노비의 고달픈 삶을 이해하면서 인간의 운수란 한정되어 있음을 깨닫고는 종들의 일을 줄여주자 곤두섰던 신경도 누그러지면서 그제서야 악몽에서 벗어난다는 스토리이다.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우스꽝스런 코메디를 보는 듯하지만, 세속의 삶에 시달리지만, 그 속에서도 구원의 도를 얻을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열자의 글은 노자처럼 추상적인 형이상학에 치우치지 않고 구체적인 비유를 구사한다. 이는 장자투의 우언(寓言)과 비슷하지만, 장자는 현실에서 유리된 대붕(大鵬)이나 신인(神人), 도깨비 등을 동원해서 초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열자는 평범한 사람들과 비근한 일상을 취해서 도의 경지를 알기 쉽게 비유한다. 

나아가 열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삶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현실 속에서 타고난 자신의 삶을 누리라고 말한다. 열자는 현실과 세속을 부정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부귀영화 따위를 추구하다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상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신의 타고난 바탕과 성정에 따라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면서 각자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라고 말한다.

이런 열자의 사상은 엄숙주의에 젖어있는 도학자나, 권력을 가진 지배층들에게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하고 불편한 사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양주를 극단적인 위아(爲我)주의라고 비판했고, 양계초도 퇴폐적인 쾌락주의(快樂主義)라고 비난했지만, 양주를 이기주의나 쾌락주의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논리이며 양주에 대한 오해이다. 

이기적 쾌락주의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나라를 다스린다고 으스대는 왕후장상의 허위의식과 속물적 가치에 심신을 탕진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강조한 것임을 간과한 탓이다. 열자는 양주의 입을 빌려서, 우리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추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며 참다운 삶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니, 이런 점에서 열자 사상은 다른 동양고전보다도 현대적이며 어떤 동양사상보다도 진보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에서 일궈낸 도(道)의 스토리는 자자(字字)가 꿈틀대며 생동하고, 우리의 무뎌진 생각을 일깨운다.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때로는 환호성을 때로는 장탄식을 자아내게 하면서 도의 세계로 이끈다. 이 점을 간과한 채 이기주의나 쾌락주의라고 말한다면, 열자서를 읽어보지도 않은 무지한 편견이거나 몸체는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쫓아가는 경솔한 견해라 할 것이다. 

이렇게 경험세계 속에서 구현되는 도는 노장사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열자 도론(道論)의 특징이라고 할 만하다. 노장은 현실에 무관심하거나 부정하면서 도를 추구하지만, 열자는 현실 속에서 도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도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내재적이고 현상론적인 도론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이 노자에서 장자를 거쳐 열자에 이르는 도가 사상의 흐름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본다.


열자의 주석자 장담

여기에 더해 장담(張湛, AD 330년 무렵)의 주석은 철학적이면서도 논리적이다. 그의 문체는 매우 간결하지만, 함축된 의미는 심장하다. 당시의 철학자들은 간결한 문체로 깊은 뜻을 표현하는 것을 지성인의 품격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장담의 주석은 열자 원문의 맥락을 잃지 않으면서 철학의 깊이에서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그 내면의 의미를 파고 든다. 열자의 원문과 함께 장담의 글을 곰곰이 살펴보면 그 내면에 감춰진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현대 중국철학사가 임계유(任繼愈)는 장담의 열자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현학(玄學)의 본말(本末) 유무(有無) 체용(體用) 문제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인간의 정신적 경지에 대한 구상은, 유가·도가 사상 범위내에서 장담의 열자주가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장담은 제시해야될 것들은 모두 제시했고,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은 모두 바로 잡았으니 이들에 대해 모두 원만하게 변증을 이루었다...사실 수많은 명사(名士)들이 유학에서 현학(玄學)으로 나아갔고, 다시 현학에서 불학(佛學)으로 관심을 이동해갔는데, 장담의 열자주는 현학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任繼愈, 『中國哲學發展史 魏晉南北朝』, 人民出版社,1988. 292쪽 인용.).

장담은 위진현학의 최종적 결론을 제시했으며, 장담을 경유하면서 고대 중국철학은 불교와 더불어 중세시기를 열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열자

유교가 지배층을 위한 이념을 제공했다고 한다면, 도가는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중국사상계를 이끌어온 철학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도가사상은 유교에 비해 다소 거리가 있었다. 우리의 역사기록들을 검색해보면 노자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단편적으로 인용되고 있으나, 열자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단 역사서를 검색해보면, 『삼국사기』에는 노자서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들이 보이고, 『고려사』에는 예종이 노자를 강독했다는 한 줄 기록만이 남아있다(『高麗史』 14卷-世家14-睿宗3, 丙子御淸讌閣 命韓安仁講老子.).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도가사상을 공공연하게 언급할 사상적 풍토마저 사라져버렸으니,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이 경연에서 한번 열자도 읽어보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이를 저지하려는 신하들의 집요한 반대가 기록되어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임금은 마땅히 성현(聖賢)의 글을 보고 고금(古今)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웠던 자취를 상고할 뿐이며, 『장자(莊子)』·『노자(老子)』·『열자(列子)』는 바로 이단(異端)의 글인데 경연에서 진강(進講)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고 여깁니다.”

도승지의 반대에 이어서 홍문관(弘文館)에서도 "『장자』·『노자』·『열자』는 이단의 글이므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의견을 표명하였다. 

성종이 전교하기를,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서 그 옳은 것을 알고 이단의 글을 읽고서 그 그른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아니한가?" 하였다. 

홍문관 박사 이거가 아뢰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이단을 전공하면 해롭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해석한 이가 말하기를, ‘점점 젖어서 그 속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으니, 하필 이단의 글을 널리 본 뒤에야 그 옳고 그른 것을 분변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하고 아니하는 것은 내가 마땅히 처리하겠다. 삼자(三子)에 능통한 자를 기록하여 아뢰라." 하였다.
(성종실록 150권, 성종 14년 1월 20일 계축 1483년)

주위의 모든 신하가 열자서를 읽지도 말라고 맹렬하게 반대하니, 누구하나 옹호하는 이 없이 왕조차도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다. 왕조차도 이런 상황이니, 일반 지식인들이 도가사상에 대한 연구를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언급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설혹 도가에 관련되는 글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후손이나 후학들에 의해 불살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왕의 학문적 호기심조차 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단으로 부정되는 상황은 마치 교회가 왕권을 압도한 서양 중세시대를 연상케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의 도가사상 관련 저술은 대개가 정주학의 입장에서 노장을 비판하거나 정주학과 일치하는 내용을 언급한 정도에 불과한 것들이며, 열자서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그 사상에 대해 논의해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열자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읽히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의식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오직 유덕(有德)이 받아야할 천명(天命)을 일인(一人)의 사물(私物)로 독점하고 공공의 천하를 개인의 사가(私家)로 조작한 봉건전제왕조와 그에 봉사하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정곡을 찌르는 도가의 촌철살인의 비판을 어찌 ‘이단서’라는 말로 모른 체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올곧은 선비라면 양심이 저려서라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고, 이성을 가진 지성인이라면 논리에 밀려서 심복(心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교 사대부들이 도가를 읽어보면, “점점 젖어 들어간다”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점점 젖어 들어간다’는 말은 그 완고한 사대부들도 ‘자신도 모르게 도가의 논리를 점점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래서 권력에 도취된 지배층들에게 도가의 논리는 더욱더 불편하면서도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붉은 깃발을 들고서 매카시즘적 사상검열을 더욱 심하게 자행했으니, 마녀사냥식의 이단몰이에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양유음도(陽儒陰道)’라는 말이 전해지는 것처럼 겉으로는 유가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도가사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사실 전통시대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도가서를 많이 읽었다. 특히 조선시대는 주자학이 압도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도가서를 이단이라고 경원시했을지라도, 속으로는 환영을 받았으니, 지식인의 필독서였고 문장가들의 소리 없는 베스트셀러였다. 열자는 장자와 함께 문장공부의 텍스트로 소리 없는 각광을 받았다. 심오하면서도 미묘한 도의 경지를 이들만큼 표현할 필력을 가진 동양고전이 또 있을까? 도가의 심오한 사상과 경거오척(鯨呿鼇擲)의 웅혼한 필체는, 질식할 듯한 사상적 매카시즘 앞에 한줄기 구원의 빛과도 같았으리라. 특히 문장의 격식과 경지를 추구하는 문인들 사이에서 열자의 문체는 모범이 되었으니, 남보다 특출난 필체를 갖고 싶어 했던 문인이나 과거고시생들도 남몰래 열자를 열독하며, 문체를 연습하기도 했었다. 


사소한 인연에 대한 사족(蛇足)

이전 왕필의 노자주를 간행할 때는 우연히 송 휘종의 <서학도>(瑞鶴圖)로 장정을 했었는데, 이 책의 표지는 열자서에 등장하는 백아와 종자기의 지음(知音)의 고사를 그린 휘종의 <청금도>(聽琴圖)로 책치레를 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휘종은 열자와 노자를 좋아해서 만기친람(萬機親覽)의 정사에도 불구하고 양서에 주석을 남겼고, 더구나 지음의 고사를 저렇게 절묘한 필치로 그려냈으니, 송 휘종만큼 열자서를 좋아하고 이해한 이도 드물 것이다. 이에 더하여 왕필 노자주를 번역한지 20년 만에 다시 왕필의 외종증손인 장담의 열자주가 같은 출판사에서 나란히 발간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깊은 인연이 있는 듯하다. 아득한 시공간을 뛰어넘어 노자와 열자에 깊은 인연과 공감을 가진 저자·번역자·화가·출판사가 이렇게 수만리 타국에서 한자리에서 모이게 되었으니, 2천년에 걸친 해후는 우연이라기에는 참으로 드문 기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끄러운 일은 이 명저를 녹록치 못한 문장으로 엮어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박옥(璞玉)에 담긴 완벽(完璧)을 바치는 화씨(和氏)의 심정으로, 눈 푸른 강호제현께서는 거친 글보다는 그 속에 들어있는 벽옥(璧玉)같은 도가의 사상을 간파해주시길 바랄 뿐이다.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동양철학

연세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북경대학과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국철학을 연구했다. 현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로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초서(草書) 전공 과정을 수료했고, 원전 자료에 대한 고증학적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로 도가 철학과 주역 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주요 관심 분야는 한국 고유 사상의 정립과 고대 동아시아의 철학적 기원 문제들이다. 저서로 『주역 왕필주』(1998), 『왕필의 노자주』(2005), 『권해의 장자』(2014), 『한국의 신선』(2018) )  『완역 정신철학통편』(2021) 『術數와 수학사이의 중국문화』(2001) )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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