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인 여성의 정동으로서 수치심과 이에 맞서는 여성적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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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인 여성의 정동으로서 수치심과 이에 맞서는 여성적 글쓰기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7.2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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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수치심: 젠더화된 수치심의 문법들 | 에리카 L. 존슨·퍼트리샤 모런 엮음 | 손희정·김하현 옮김 | 글항아리 | 548쪽

 

사회적인 감정인 수치심은 다분히 젠더화되어 있다. 부당한 수치심에 맞서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치심을 느꼈다는 이유로 타인을 죽이는 사람도 있는 것이 수치심 사회의 동학이고 우리는 이 사회에서 그 동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수없이 목격했다. 

20세기 여성 작가들의 텍스트를 ‘수치심’이라는 주제로 분석한 열다섯 편의 글을 엮은 이 책은 수치심이 한 여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부터 그 여자가 수치심과 관계 맺는 과정, 그 관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청산하거나 치환하거나 완성해내는 궤적을 각기 다른 작품과 주제를 통해 탐구한다.

‘여성적 수치심female shame’을 꿰는 분석 틀은 크게 세 가지다. 신체, 가족, 그리고 사회. 이 책은 여성이라는 젠더 자체, 여성 신체와 여성 섹슈얼리티, 동성애 수치심,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종차별, 이성애 관계와 제도에 매인 여성 예술가, 소녀들의 세계와 집단 괴롭힘, 여성의 수난과 불행, 국가에 의한 여성 신체 착취, 여성성을 모욕하는 민족과 종교, 힌두 및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에게 자행되는 잔혹한 폭력과 멸시, 소외감과 수치심의 관계 등 광범위한 이슈를 아우르며 여성적 수치심의 장場인 신체와 가족, 사회를 재사유한다. 

이 사유에는 수치심학의 계보에서부터 문학, 정동 이론,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 장애학, 포스트 식민주의, 문화 이론 등 다양한 학문 영역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논의가 동원된다. 수치라는 이데올로기, 젠더화된 수치심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 책의 목표는 그것이 여성의 삶에 행사하는 고통스러운 영향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사회적 통제와 기대, 조작의 대상이 되어온 여성의 삶은 젠더화된 수치심의 구도를 이해하는 핵심 현장이다. 이 책은 20세기 세계 여성 작가들의 작업을 검토함으로써 몸에 부여된 수치, 가족과 사회에 의해 강요된 수치가 어떻게 여성의 자아를 삭제하고 세계에 대한 참여를 차단함으로써 여성성을 불능화하는지 탐구한다. 수치심 사회에서 자아는 수치심을 자각하는 진원지가 되고, 세계에 대한 감정은 억압된다. 수치심이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지를 다각도에서 해석하며 여성적 글쓰기의 저항을 포착한 이 책의 시도는 그 자체로 여성 수치심에 대한 강력한 발화가 된다.

수치심은 오랫동안 인간의 주요 정동으로 여겨져 왔다. 이 정동은 타인을 통한 자아 인식이라는 점에서 자의식뿐 아니라 의식 자체에 관계된다. 저자들은 이것이 “인간성의 표식으로 작동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여성적 인간성의 표식”이라고 설명한다. “그저 월경을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여성은 잠재적인 수치심을 떠안게 된다. 여성은 몸 안에 성적 수치심의 씨앗을 품고 있다.” 이런 감각은 어떤 수치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더 심오한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일상적인 상황에서조차 개인의 경험을 이중화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긴장을 유발하며,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변형시킨다.

경험의 이중성에 주목한 수치심 연구의 궤적은 정동 이론에서 추적할 수 있다. 경험의 이중성은 필연적으로 자아 인식에 혼란을 가져오며 자아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때로는 자아 삭제를 추동하기까지 한다. 타인에게서 비롯되었든 자기 자신의 것이든, 자아를 향한 혐오로부터 숨을 공간은 문자 그대로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수치를 떠안은 개인은 날것 그대로의 혐오와 함께 남겨진다. 

한편 수치심의 이중적 경험은 자기뿐 아니라 타자와도 관계되기 때문에 정동 이론가들은 수치심을 다룰 때 정신내적·간주관적 축과 문화적·사회적 축을 동시에 강조한다. 또한 전자와 후자는 서로를 형성하고 서로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 특히 홀로코스트 같은 트라우마적 사건들에서 자행된 극단적인 모욕 행위는 삽시간에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와 역사 자체로 확대된다. 이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구도로 작동하는 수치의 동학을 이 책은 ‘수치심의 상관적 문법’이라고 부른다.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이어야 하는가? 그런데 누가 고개를 숙이고 누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가? 뻔뻔하고 천연덕스럽게 수치심을 모른 체한 채 부끄러움을 아는 이에게 더한 수치를 안기려는 자들이 있는 한, 우리는 이 문법의 존재와 원리를 인식하고 까발리고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20세기 텍스트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서 어떻게 수치심이 관계를 구조화하고 주체 형성의 세 가지 주요 국면을 횡단하면서 여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가를 보여준다. 책은 이 세 가지 주요 국면―개인적 차원, 가족적 차원, 그리고 문화적 혹은 국가적 차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연구는 여성이 남성보다 수치심을 더 잘 느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왜 그럴까? 여성의 몸은 남성의 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온갖 의미의 양식에 휘감겨 있다. 이 사회는 여성의 몸에 예외적인 문화적 무게를 지우고 그것을 제도화했다. 여기에는 여성의 외모에 섹슈얼리티에 수치를 주고 낙인을 찍는 과정이 동반됐다. 여성의 몸이 ‘깨끗하고 적절한 신체’에 대비되는 ‘불결하고 부적절한 신체’로 규정되어오는 동안, 문화적으로 구성된 여성성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몸이 모욕당하는 동안, 여성은 자기 신체와 양가적이고 수치스러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감춰지고 숨겨질 수밖에 없는 몸은 수치심이 발생하는 장소가 된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여성의 신체는 남체와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어왔고, 그렇기에 여성의 몸은 수치심 담론의 핵심 장소가 되어왔다고 저자들은 설명한다.

수치심을 이해할 때 고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장場 의존적field dependent’이라는 지속적인 연구 결과다. 장 의존성이란 “물리적인 환경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자아를 포착하는 인지적 방식”으로서, “타인들의 시선이 제시하는 이상을 성취하는 데 실패했을 때 오는 실망의 감각을 중심으로 자아에 대한 개인적인 감각을 조직한다”는 의미다. 헬렌 블록 루이스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관계 유지 능력에 의해 평가받는 경우가 더욱 많고, 이 능력은 결과적으로 여성을 전통적 규범에 따르라는 압력에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고 분석한다. 여성이 관계 유지에 책임을 느끼고, 여성이 희생하며, 여성이 분노를 삭이는 방식으로 여성은 친밀한 관계에서 더욱 깊은 수치심을 경험하기 쉽다. 수치심 경험에 대한 여성들의 묘사에 어머니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 연인이나 파트너, 가까운 친구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이런 이유로 수치심을 젠더화된 정동으로 보고, 그것이 어떻게 주체성과 관계, 정체성을 형성했는가를 복합적으로 분석한다. 그 도구는 수치심을 다루는 20세기 여성 작가들의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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