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스테디셀러’부터 ‘우리 동네 역사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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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스테디셀러’부터 ‘우리 동네 역사책’까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7.25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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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나 볼 수 없는 책: 귀중본이란 무엇인가 | 장유승 지음 | 파이돈 | 344쪽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약 28만 권의 고서가 있다. 그중 963종 3,475권이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책이 귀중한 책일까?

국립중앙도서관의 귀중자료 기준의 항목은 12가지이다. 우선 시기에 관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대체로 고서 전문가들은 임진왜란 이전(1592)의 책을 귀중본으로 간주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의 기준은 조선조 제17대 효종조 이전(1659년)의 책을 귀중본으로 본다. 또 다른 기준으로는 1950년 이전 국내 발간자료나 1910년 이전 한국 관련 외국자료, 1945년 이전 독립운동가의 저작물 등 근현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밖에 하나뿐이거나 몇 없는 책 등 수량이나 소장자에 관한 조건과 자료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인정되는 서화 등이 기준이다. 그러나 저자는 귀중본의 실체는 한마디로 ‘드문 책’이며 귀중본을 결정짓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책의 물리적 특징, 즉 물성이라고 말한다.

귀중본 이야기에 앞서 저자는 조선시대 인쇄술의 실체를 먼저 짚어 본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활자인쇄가 발달한 이유는 인구가 적은 나라에서 다양한 책을 생산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 출판기술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또한 팔만대장경은 책을 찍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호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목판이 결과물이고 책이 부산물이다. 목판의 수명은 고작해야 30년이었으며, 목판본 문집 간행의 목적은 문집의 유통이 아니라 판목의 판각과 보존에 있기 때문에 학문의 소통이나 전승, 담론 형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책에는 조선 시대 최다 간행 문집이자 스테디셀러였던 정몽주의 《포은집》부터 조선 후기에 귀중한 사료로 이용되었던 ‘우리 동네 역사책’ 《훈도방주자동지》까지 26종의 귀중본이 소개된다. 책에 소개된 귀중본 몇 편을 들여다보자.

《난여》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가 만든 책으로 노론으로서 평생을 당쟁의 와중에서 보낸 김재로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역정의 산물이다. 경종의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그 기간 동안 노론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4년’이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으레 ‘적폐 청산’을 시도한다. 노론은 경종 재위 기간 동안 소론이 저지른 만행을 속속들이 기억해 두었다가 요긴하게 사용하고자 《난여》를 만들었다. 특히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영조) 왕세제 책봉문제로 충돌한 신임사화와 관련된 기록이라면 실록보다 자세할 정도로 가리지 않고 모았다.

 

김재로는 《난여》를 통해 신임사화의 책임은 소론에 있으며 노론은 억울한 희생자라는 이른바 ‘신임의리’를 확고히 정립한다. 기록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법. 김재로 가문이 4대에 걸쳐 여섯 명의 정승을 배출하며 영조와 정조조에 권력을 잡았던 배경에는 《난여》와 같은 기록의 힘이 작용했다.

조선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을 사마시,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 명단을 ‘사마방목’이라고 한다. 사마시 합격은 가문의 영광이며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평생을 함께할 동기이므로 합격자에게는 사마방목이 꼭 필요했다. 책에 소개된 1573년 사마시 합격자의 명단인 《사마방목》은 일종의 동기수첩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문헌이고 금속활자 을해자로 간행되어 귀중본으로 지정되었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시험관들의 관직과 성명이, 그다음에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으로 실려 있으며 합격자의 신분과 성명, 자(字), 생년, 본관, 거주지, 부친의 관직과 성명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생원시 1등급 다섯 명과 합격한 동기 187명의 인생행로를 추적해본다. 출세한 동기도 있고 몰락한 동기도 있으며, 임진왜란을 거치며 의병장으로 활약하거나 목숨을 잃은 이도 있다. 전란이 끝난 1602년, 생원 84등으로 합격했던 홍이상이 안동 부사로 부임하여 우연히 동기를 만나 안동에서 동기모임을 열기로 한다. 14명이 모였다. 이날 모임의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 바로 〈계유사마동방계회도〉이다. 이들은 1614년에도 모임을 가져 40년 가까이 합격자 모임을 이어 왔다.

우리나라 화폐 천 원권에 들어가 있는 퇴계 이황은 과연 위대한 인물인가? 퇴계의 생애와 저술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퇴계잡영》은 퇴계가 은퇴를 결심한 1546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1565년까지 지은 시를 엮은 책으로 1576년 간행되었고 퇴계의 친필을 그대로 모각했기 때문에 귀중본으로 분류된다.

1610년 퇴계는 선조 임금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묘 배향은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광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퇴계의 위대함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당시 그의 제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퇴계가 다른 유학자들보다 학문적으로 우수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퇴계가 활동하던 시기가 주희의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정착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퇴계가 남긴 저술 역시 주자학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독창적인 사상을 담은 책은 아니다. 퇴계가 위대한 점은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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