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총독부를 통해 한국 근대의 국가 풍경을 그려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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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총독부를 통해 한국 근대의 국가 풍경을 그려내다
  • 윤해동 한양대·동아시아사
  • 승인 2022.07.2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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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식민국가와 대칭국가: 식민지와 한국 근대의 국가』 (윤해동 지음, 소명출판, 456쪽, 2022.05)

 

1. 기이한 근대 국가 논의에 의문을 갖다

1919년 중국 상해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 건국의 기점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1948년 ‘남한’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야말로 처음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유일하고 정당한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컨대 전자는 1919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만이 공식적인 건국이었다고 변호한다. 대략 이런 내용을 가진 것이,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단속적으로 진행된 바 있는 이른바 ‘건국절 논쟁’이다.  

그러나 위 논쟁에서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의 기점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연 국가였는지 아닌지, 혹은 그것이 국가였다면 어떤 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그런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건국이 될 수 없다는 설명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국가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도 없이, 건국인지 아닌지 혹은 건국절을 어디에 설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논쟁하고 있는 격이다. 이를 두고 ‘국가 없는 건국론’이라고 해두어도 좋겠다.

     
2. ‘식민지적 사유중지’ 사태를 돌파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태의 이면에는 조선총독부에 대한 논의의 왜곡 현상이 존재하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 학계에서는 조선총독부라는 권력기구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 식민지기 한국 사회의 다른 모든 측면에 대해서는 국가 상태를 상정하고 있지만, 총독부 권력 자체의 성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제국의 지방정부였던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인 주권을 가진 근대국가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식민국가였던 것인지에 대해 한국학계는 이제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국가론 부재의 국가(조선총독부)’ 논의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식민지기에 존재한 두 개의 국가 혹은 정치체를 둘러싼 이런 불구성 혹은 왜곡현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국가 없는 건국론’(대한민국임시정부)과 ‘국가론 부재의 국가(조선총독부) 논의’라는 이 기묘한 국가 논의가 실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조선을 통치하던 조선총독부를 정면에서 직시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저항권력의 모습도 전면에 드러나지 않게 될 것이다. 우선 조선총독부 권력의 성격을 직시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국학계는 지금까지 식민지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식론적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식민지 이해를 둘러싼 인식론적 함정은 식민지에 대한 사유의 진전을 곧바로 중지시킨다. 이를 두고 나는 ‘식민지적 사유중지’라고 지칭한 바 있다. 나는 식민지적 사유중지를 돌파하는 지점을 이 왜곡된 국가 논의에서 찾았다.    


3. 세 개의 국가개념을 동원하다. 

조선총독부 권력을 국가론적 논의에서 배제해버리고 단지 권력의 특수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조선총독부를 인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게으르고 무책임한 방식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조선총독부는 국가론적 논의에서 배제해야 할 예외주의적 사례가 아니다. 식민지는 인간의 역사와 기억 속에서 폐기해야 할 대상이거나 부끄럽기만 한 경험이 아니다. 식민지는 인류사의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빛나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 경험을 통하여 인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과 종속을 그냥 견뎌야 하는 관습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새로이 개발하고 발견해나가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식민지민의 지속적인 저항을 통하여 식민지 억압의 경험은 빛나는 인간적 가치를 발견하는 극적인 계기로 전환되었다. 실제 한국에서도 그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이중국가, 식민국가, 대칭국가라는 세 개의 국가개념을 사용하여 식민지기의 정치권력 혹은 국가를 분석하였다. 이중국가는 대한제국과 통감부가 병존하던 시기 권력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조선총독부 권력은 식민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였고 이와 대치하고 있던 저항국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칭국가로 개념화했다.  

이중국가는 식민국가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대한제국기의 이중국가는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국가권력을 잠식해나가기 위해 만든 국가 즉 잠식형 이중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책의 중심적인 분석 대상은 조선총독부 즉 식민국가이다. 조선총독부는 총독이 행정만이 아니라 입법과 사법체계를 모두 장악하고 있던 강한 국가였다. 물론 총독의 행정권은 천황에게 직예하는 것이었지만 이왕직과 조선군, 조선은행 등은 천황의 권한 밖에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왕실과 군대 그리고 발권은행을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이었다. 또 총독의 입법권은 본국 의회의 위임의 범위 안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제한적인 것이었고, 조선의 사법기구는 본국 사법기구와 강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국가의 자율성은 제약받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능력을 가진 식민국가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그 자체만으로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제국,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민의 저항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그 권력의 기반이 잠식되어 가는 존재가 바로 조선총독부였다. 

식민국가의 다른 한편에 서 있는 저항권력 즉 대칭국가의 존재를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본제국과 조선총독부 권력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 저항권력이었고, 그런 점에서 저항을 통해 근대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대칭적 성격을 가진 권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영토와 주민을 갖지 못한 게다가 독립적인 주권에 미달하는 반주권을 가진 권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반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강한 자율성을 가진 근대국가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요약컨대 조선총독부=식민국가는 강한 능력을 가진 국가였지만, 반면 자율성은 약한 그런 근대국가였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대칭국가는 반(半)주권을 가진 반(半)국가였음에도, 강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였다.  


4. 세계사적 근대의 국가 풍경을 그리고 싶다. 

20세기 초반 한반도를 비롯한 전지구의 ‘국가의 풍경’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던 식민국가의 한편에서는 대칭국가가 싹터서 자라고 있었다. 전지구적 식민지배의 시대에는 마치 바로크시대 다성음악에서 통주저음과 고음으로 구성된 대위법처럼, 식민국가와 대칭국가가 서로의 존재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국가가 존재하는 곳에서 대칭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싹트고 있거나 자리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것이 전지구적 근대가 만들어내고 있던 ‘국가의 풍경’이었다. 이 책에서 나는 한반도 국가의 풍경을 드러냄으로써, 그런 전 지구적 국가의 풍경을 암시하려 하였다. 


윤해동 한양대·한국사/동아시아사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를 대상으로 한 저작으로 『식민지의 회색지대』(역사비평사, 2003), 『지배와 자치』(역사비평사, 2006), 『근대역사학의 황혼』(책과함께, 2010), 『植民地がつくった近代』(三元社, 2017), 『동아시아사로 가는 길』(책과함께, 2018) 등이 있음. 주요 관심 분야는 평화와 생태를 중심으로 한 융합인문학 연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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