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이 민중문학으로…중국과 한국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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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이 민중문학으로…중국과 한국 ⑫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2.07.2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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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한문학이 민중문학으로 나아간 것은 중국에서 먼저 있었던 일이다. 당나라 시인 이신(李紳)의 시 <민농>(憫農)을 보자. 제목을 번역하면 <농민을 근심한다>는 말이다.

春種一粒粟        봄에 한 알 씨를 뿌리면 
秋成萬顆子        가을에 만 알을 거두고,
四海無閒田        사방에 놀리는 땅이 없는데,
農夫猶餓死        농부는 오히려 굶어 죽는다.

왜 이렇게 되는지는 말하지 않고, 다음 대목에서 농부가 뙤약볕에서 힘들게 일을 한다고 했다. 먹고 있는 밥이 “粒粒皆辛苦”(알알이 모두 심한 고생)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 널리 쓰인다. 농부의 수고를 잊지 말라는 교훈이 문제 해결일 수는 없다.  

고려의 시인 이규보(李奎報)는 농부가 할 말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했다. 농부를 대신해 읊는다고 한 <대농부음>(代農夫吟)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의 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농민이 농사를 열심히 짓고도 굶주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했다. 

帶雨鋤禾伏畝中        비 맞고 김을 매며 밭이랑에 엎드리니 
形容醜黑豈人容        검고 추악한 몰골이 어찌 사람의 모양인가. 
王孫公子休輕侮        왕손공자들이여, 우리를 업신여기지 말라.  
富貴豪奢出自儂        부귀와 호사는 우리로부터 나온다. 

농민이 굶주리는 것은 왕손공자라고 하는 특권층이 농작물 가져가 부귀와 호사를 누리기 때문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시인이 농민을 대신해 이 말을 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 해결을 말하는 데까지는 나아갈 수 없었다. 다음 대목에서는 곡식이 익기도 전에 빨리 바치라고 독촉하는 말단 관리들을 나무라기나 했다. 

북송의 시인 왕우칭(王禹偁)은 농촌으로 귀양 가는 신세가 되었다. 농민이 유랑민이 되어 떠나가는 참상을 가까이서 목격하고, 남의 일이 아니라고 여겨, 유랑민이 되어 떠나가는 처지를 공감한다고 하는 시 <감유망>(感流亡)을 지었다. 절실하게 묘사한 대목을 든다.

老翁與病嫗        늙은 영감과 병든 할미
頭鬢皆皤然        머리털이 온통 새하얗다.
鰥呱三兒泣        세 아이는 울어대는데,
呱惸惸一夫        홀아비 홀로 근심만 한다.

농민이라는 총괄 개념이 아닌 실제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자기를 돌아보았다. 자기는 높은 관을 쓰고 벼슬을 하면서 백성을 괴롭히기나 했으니, 쫓겨난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유랑하는 처지에서도 늙은 부모를 모시는 사람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조선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은 귀양 가서 본 유랑민의 모습을 더욱 처참하게 그렸다. <기민시>(飢民詩)라고 한 굶주린 백성의 처지를 노래한 시가 세 수이다. 한 대목을 든다. 

道塗逢流離        거리거리마다 만나는 유랑민 
負戴靡所聘        이고 지고 오라는 데 없어, 
不知竟何之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구나. 
骨肉且莫保        혈육이라도 돌보지 못하네.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말하려고 했다. 생략한 앞 대목에서는 “아득하도다, 천지의 조화, 고금 누가 알 수 있으랴?”라고 했다. 뒤에서는 “엄숙한 조정의 훌륭한 관원들이여, 경제에 나라 안위 달려 있다네”라고 했다. 천지의 조화가 바로 되기를 기대하다가, 국정 담당자들이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같은 시대의 위백규(魏伯珪)는 농촌에서 살면서 농민이 하는 말을 시로 전했다. 보리를 두고 지은 연작시가 놀랍다. <죄맥>(罪麥)에서 보리의 죄를 묻는다는 말을 이렇게 했다.

號穀數爲百        곡식이라 하는 것 몇 백 가지인데
可憎者惟麥        보리라는 놈이 가장 밉살스럽다.
謬以重惡質        몇 겹이나 악질인 녀석이 잘못 되어,
承乏參民食        궁핍을 틈타 백성들의 먹거리에 끼어들었다. 

보리밥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농민의 불평을 거친 말투 그대로 쏟아놓아 웃음이 나오게 했다. <對麥>(보리가 대답한다)에서는 보리가 항변에 대답하는 말을 적었다. 보리 덕분에 춘궁기를 넘기니 그 은혜가 크고, 보리밥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했다.

둘러내자 둘러내자 길찬 골 둘러내자
바랭이 역고를 골골마다 둘러내자
쉬 짙은 긴 사래를 마조 잡아 둘러내자 

이런 시조도 지어 농민이 논매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그대로 옮겼다. 논을 한 골씩 매어나가자. 아주 길고, 움푹 들어간 곳의 바랭이나 여뀌 같은 잡초를 다 제거하자. 시궁창 색깔이 짙고 뻗은 이랑은 마주 잡고 매자. 노래를 이렇게 하면서 신명나게 일을 한다고 했다. 한문과 국문, 서사어와 구두어가 만나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다. 민중의 삶을 다각도로 핍진하게 나타내면서 많은 것을 깨우쳐준다. 중국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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