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과 ‘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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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과 ‘청인’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07.18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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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2022년 6월 5일에 이 칼럼에서 속기용 자판을 소개한 바 있다. 오늘은 그 글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수업 시간에 수화언어(준말은 ‘수어’)에 대해 언급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늘 학생들에게 ‘농인(聾人)’과 ‘청인(聽人)’이라는 말을 일러 주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농인’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면 ‘청각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기 쉽겠지만, 그보다 더 좋은 대답은 ‘청각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농인을 ‘청각에 장애가 있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이 풀이는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여기에서 굳이 ‘장애’라는 말을 명시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의문이고, 왜 꼭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식으로 풀이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농인’이라는 말은 ‘청각을 사용하지 않는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여기에는 청각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장애로 간주하기보다 수많은 신체적 특징 중 하나로 이해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농아인’ 역시 마찬가지다. 이 단어에 들어 있는 ‘아(啞)’는 ‘음성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신체적 특징’으로 풀이하는 것이 좋겠다. 이 역시 ‘언어 장애’로 치부하기보다 하나의 신체적 특성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농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바로 ‘청인’이다. 농인이 청각을 사용하지 않는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면 청인은 ‘청각을 사용하는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이다. 청각을 사용하니 ‘청인’이라고 하는 것이고, 실제로 한국농아인협회 등에서도 이 말을 쓰고 있다. ‘건청인(健聽人)’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청각이 ‘건강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청각이 건강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쉽다. 그런 만큼 ‘건청인’보다는 ‘청인’이 더 좋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청인’과 ‘건청인’ 모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그나마 개방형 한국어 사전인 우리말샘에는 ‘건청인’이라는 어휘가 등재되어 있지만 ‘청인’은 두 사전 중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농인을 ‘장애인’의 일종으로 보니 그 반대인 비장애인을 특별히 일컫는 어휘를 굳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농인’이라는 말이 한국어 어휘 체계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그에 대비되는 말 역시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청인’이라는 어휘를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해야 하는 까닭이다. 물론 오직 표준국어대사전만이 ‘표준’이라는 지위를 독점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논란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표준국어대사전이 한국어 사용자들의 언어 생활에 현실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쨌든 일단은 이 사전을 제대로 정비하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분기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수정하고 있다. 그런 만큼 최대한 일찍 ‘청인’이라는 어휘를 사전에 등재하고 ‘농인’의 뜻 풀이 또한 ‘청각을 사용하지 않는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다듬었으면 한다. 우리말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말샘의 ‘건청인’ 뜻 풀이는 ‘청인만이 건강한 사람이고 농인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만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표현’이라는 단서를 달아 두었으면 좋겠다. 같은 이유에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청인’만 등재하고 ‘건청인’이라는 어휘는 되도록 등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현재 수어 관련 업무 또한 관할하고 있는 만큼 ‘농인’과 ‘청인’이라는 어휘에 대해서도 관심을 좀 더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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