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대담으로 듣는 만해 평전 『당신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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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대담으로 듣는 만해 평전 『당신을 보았습니다』
  • 고재석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2.07.17 18:1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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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게 듣는다]

■ 저자에게 듣는다_ 『한용운의 삶과 문학, 당신을 보았습니다』 (고재석 지음, 동국대학교출판부, 344쪽, 2022.05)

 

 

“내가 태어난 이 나라와 사회가 나를 중이 되지 아니치 못하게 하였던가?”
 

코로나19 하루 확진자가 한 주 만에 2배 이상으로 증가하면서 다시 대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거리에는 이제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삶. 하긴 1975년 봄, 동악에 올랐을 때 만해와 만날 줄 몰랐다. 그리고 2021년 여름, 음압병동의 유리창 같은 모니터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내려와 만해 평전을 쓰게 될 줄은 더욱 몰랐다. 당연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만해의 삶과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환희의 선정禪定과 망국의 통한痛恨 사이에서 운명의 형식을 완성했던 만해. 그러나 우리는 그를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안다. 

관련 자료를 읽으며 이런저런 구상에 잠겼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만해가 1회 졸업생이라고 자랑하지만 정작 아는 건 없고, 평전마다 연보도 다르고 상반되는 평가도 많아 혼란스러운 학생 두 명이 제대 인사차 집으로 찾아온다. 그러자 전화로 이미 그런 사정을 들었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자네들, 복학할 때까지 시간도 많다니 매주 두 번씩 서재에 와서 나랑 1차 자료를 놓고 만해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해보려나?” 순간, 이런 형식의 평전으로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評과 전傳 사이에서 객관적 거리를 지키지 못해 제 이야기로 끝나는 평전에 회의가 많았고, 만해를 일종의 우상 또는 문화기억으로 만드는 경향에 불만이 많아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는 무징불신無徵不信과 자기를 속이지 말자는 무자기毋自欺를 내면의 기율로 삼고 있던 터였다. 

해보자.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사제대담으로 듣는 만해의 삶과 문학’이라는 가제를 정한 후 출가에서 입적까지 40년간의 활동 기간을 6장 24절로 나누고 세목을 붙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1주일에 두 번 만나 1장 4절 분량의 대화를 나누도록 하면 6주로 끝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달력은 이미 10월 하순을 향하고 있어 가상의 첫 모임을 11월 1일로 정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실제 요일에 맞춰 대화를 진행하면서 현장감을 살리기로 했다. 피곤하지만 즐거운 몰입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정 분량의 대화를 날짜에 맞춰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예상보다 늦은 2022년 1월 4일에야 원고를 보낼 수 있었다. 그래도 가슴에 얹혔던 숙제를 끝낸 것 같아 후련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휴식을 깨뜨려서 미안하다며 출판사에서 교정지를 퀵서비스로 보낸 것은 4월 1일이었다. 그리고 5월 9일, 『당신을 보았습니다』로 제목을 바꾼 이 책이 출간되었다. 1차 자료를 중심으로 만해의 삶과 문학을 둘러싼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늘까지 살펴보려고 했던 대화의 논점은 다음과 같다. 

                      한용운 도일 소식

제1장 「시대의 불운과 운명의 행운」에서는 해방적 관심과 혁명적 정열의 소유자인 만해가 1904년 불교를 선택하면서 자아와 세계의 혁명을 기획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그에게 출가란 초월적 결단이자 일본의 정책적 배려로 재편되고 있던 불교계에 입문한 세속적 선택일 수도 있음을 주목했다. 그 역시 “나의 입산한 동기가 단순한 신앙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때 비로소 그는 왜 여러 글에서 출가 시점을 흐렸고, 출가하자마자 1905년에 세계만유를 떠났는가. 그리고 훗날 시베리아에서 겪은 일을 장황하게 회고한 것과 달리 일본 유학은 가볍게 언급했는지 등의 속내를 헤아리게 된다. 1908년 9월, 만해는 단기간이었지만 조동종대학에서 열정적으로 문화 자본과 사회 관계자본을 축적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학식이 섬부贍富’(「사문신숙沙門新塾」 『매일신보』1910.11.27)한 승려로 등장한다. 일본에서도 인정받은 한학적 소양과 보기 드문 유학 경력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제2장 「식민지 적자의 격분과 슬픔」에서는 석전 박한영과 함께 주도한 임제종운동의 전모와 승려 결혼 문제를 살펴본다. 승려 결혼은 인구증산론이자 과열된 유신론이었고, 임제종운동은 실패했지만 그에게 일본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떨쳐내고 정신적 제왕이 되는 기회를 제공했다. 재편된 불교계에 실망하고 만주에 건너갔던 그가 총상의 후유증에도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을 간행한 것은 그 증거인 셈이다. 그러나 신비체험 이후 꽃은 만해의 삶과 문학에서 완상의 대상을 넘어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사제의 연을 맺은 석전과 육당의 후원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걸 주목한 사람은 많지 않다. 만해는 이후 선승이자 문인으로 법보시에 주력한다. 한편, 거사불교운동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조선광문회와 신문관(상리동) 각황사(수송동) 조선선종 중앙포교당(인사동)이 있던 중부 일대는 만해와 거사들을 포함한 신전통주의적 지식인들이 모였던 1910년대의 문화 1번지였다. 

저자 스케치<br>
                      저자 스케치

제3장 「행동적 수양주의와 문체개혁」에서는 박한영의 소개로 오세창을 만나 1,291인의 고서화를 배관하면서 역사의 정통성과 정신문화의 우월성을 확인한 만해가 「고서화의 삼일」(『매일신보』1916.12.7-16)을 연재하면서 지식인 사회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때 합석했던 지인들 대부분은 『유심』(1918)의 필자가 되고 3·1운동의 주역이 된다. 만해는 1917년 정선강의 채근담을 간행하면서 정신수양운동에 앞장선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대표적 승려와 학자들이 만난 자리에서는 정신적 귀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해 연말의 견성과 「오도송」은 이런 정신적 높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유심』은 만해가 주장한 행동적 수양주의의 원천이며, 3·1운동에 이르는 정신사적 교두보 역할을 한 불교 교양지로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만해가 여기서 한글체로 문체개혁을 하고 근대적 시인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제4장 「3·1운동과 민족적 자존심」에서는 3·1운동 초기 단계에서 소외되었던 만해가 불교계 대표로 활약하게 되는 과정과 공약삼장 추가설의 이면을 살펴본다. 공약삼장을 육당 최남선이 작성했다는 사실은 이치카와 마사아키市川正明의 『3·1독립운동』 3권에 수록된 심문조서나 판결주문 및 사건의 경과로 미루어볼 때 명백하다. 더구나 만해는 자신이 작성했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를 숭앙한 후학들은 역사적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바로 보는 것’ 그것은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근거 없는 사실에 집착하고 강변하기보다는 만해가 육당의 독립선언서에 대한 불만을 「조선 독립의 이유의 서」로 해소하고, 당당하고 준열한 최후변론을 통해 민족적 자존심의 화신이자 민족의 사표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약삼장 추가설은 만해에 대한 우호적 관심이 빚어낸 감정론적 오류로 생각된다.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고마자와대학 열람실

제5장 「이별의 의미와 재회의 환희」에서는 미발표작 「죽음」의 주제와 선화게송집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의 상관성을 살펴본다. 인간의 도덕적 본질 또는 정수를 제시해서 당시의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풍조를 바로 잡고자 했던 만해는 1920년대에 열병처럼 번지고 있던 연애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점검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랑, 자발적 의지에 의한 정조, 여기에 신식과 구식은 따로 없으며, 따라서 조선 사회에는 도덕적 인격과 근대적 주체의 자율성이 결합한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죽음」에서 그는 이상적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십현담주해』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을 간결한 시적 언어와 불교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했고, 『님의 침묵』에서는 이별과 재회라는 원형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시적 화자에게 대립을 지양하는 힘을 부여하면서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시의 본질을 성취했다. 이들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두 편이라 할 수 있다.

 제6장 「운명의 형식과 유산의 계보」에서는 심우장에서의 말년과 문학관 및 『흑풍』과 『박명』의 주제를 살펴본다. 만해는 『흑풍』에서 참사랑이야말로 독립정신의 원천임을 알려준다. 가장 완성도가 높은 『박명』은 모든 것의 포기와 희생을 전제로 한 참사랑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네 작품은 참사랑의 의미를 추구한 4부작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이들 작품의 주인공처럼 초발심을 잃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의인이며 영웅이었다. 번뇌를 끊고 영혼의 해방을 추구했던 만해. 훼손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개혁의 길로 뛰어들었던 만해. 낡은 의미의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감성의 언어로 현대시의 지평을 열었던 만해. 이는 불교를 통해 자아와 세계의 혁명을 기획했던 한 사람의 세 얼굴이다. 만해의 보이지 않는 유산을 바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님’이 침묵하는 시대가 베푼 운명의 행운으로 출가했던 만해. 그는 고통의 쾌락 속에 삶과 문학의 일치를 이룩한 사람이었다.


고재석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만해연구소 소장 역임. 현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편저와 역서로 『만해학술연구총서』(전5권), 『일본문학·사상명저사전』, 『일본메이지문학사』, 『일본다이쇼문학사』, 『일본쇼와문학사』, 『일본현대문학사』(상하)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근대문학지성사』, 『숨어있는 황금의 꽃』, 『불가능한 꿈을 꾸는 자의 자화상』, 『탕지아唐家의 붉은 기둥』, 『한용운과 그의 시대』, 『수수재隨樹齋 독서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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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2022-07-18 13:02:05
좋은 글 잘봤습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은미 2022-07-18 16:50:03
선생님 멋있으세요!!!♡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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