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으로 승부하다 - 〈말리의 어제보다 특별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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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으로 승부하다 - 〈말리의 어제보다 특별한 오늘〉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2.07.12 1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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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사진=제작사 주다컬쳐 제공 (사진작가 권애진)

2022년 여름의 뮤지컬 씬은 대학로 신작 몇 편을 제외하고 대부분 리바이벌 공연들로 라인업을 채우고 있다. 8월 말 오픈되는 라이선스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샘컴퍼니/스튜디오선데이)와 아르코-한예종 뮤지컬 아카데미 작품인 <실비아, 살다>(공연제작소 작작), <비터슈탄트>(미스틱컬쳐) 그리고 김은영 작곡가(<사의 찬미>, <웨스턴 스토리>, <세종 1446>을 작곡했다)가 대본, 작곡, 연출까지 총망라한 <난세>((주)콘텐츠플래닝), 딤프 수상작인 <말리의 어제보다 특별한 오늘>((주)주다컬쳐)이 이번 여름 시즌의 신작들이다. 창작의 경우 한예종 인큐베이팅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는 지원 제도에 비해 실제 제작까지 이어지는 공연은 그다지 많지 않은 모양새다. 

말리 1팀 1st ©Aejin Kwoun<br>
사진=제작사 주다컬쳐 제공 (사진작가 권애진)

그런데 이중 <말리의 어제보다 특별한 오늘>(김주영 작, 박병준 작곡, 정성경 연출, 한성아트홀 1관, 2022. 7. 9~ 8. 14, 이후 <말리>)은 조금 다채로운 작품 개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한예종의 2019 K’Arts Platform Festival에서 선을 보인 이후 2020 창작산실 대본 공모에서 당선되고 2021년 제15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창작뮤지컬상을 수상했다. 또한 올해 제16회 딤프에서는 전년 수상작으로서 공식 초청되어 다시 딤프 무대에 올랐다. 이번 대학로 한성아트홀 공연은 브로드웨이식으로 말하면, 트라이아웃 공연을 마치고 중앙에 입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말리>가 이러한 제도들을 통과하여 결국 대학로까지 안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대본의 힘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말리>는 명확한 뮤지컬 구조 안에 작가의 주제의식이 단단하게 서 있는 작품이다. 대학로에서 이런 작품을 만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다른 현실적 요구들에 밀리지 않고 명확히 들리는 작가의 목소리는 참으로 반갑다. 현재 상당수의 대학로 창작뮤지컬들은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들의 개인기로 서사의 공백을 채우거나, 음악과 서사의 난점들을 배우들이 ‘연기’로 해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스타일의 뮤지컬이 갖고 있는 시장성은 긍정적이지만, 이 스타일이 마치 대학로에서 공연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현상을 마냥 긍정할 수는 없다. <말리>의 대학로 공연은 작품에 진심인 배우들이 공연의 약속대로 움직이며 최종 목적지까지 성실하게 따라가는 풋풋함 속에서 빛을 드러낸다.

 

사진=제작사 주다컬쳐 제공 (사진작가 권애진)

<말리>는 ‘나를 찾는 여정’을 그린다. 인간의 삶은 내가 누구인지, 내 자리는 어디인지 고민하다 끝나는 것이라 한다면, 그만큼 ‘나를 찾는 일’은 긴요하지만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말리>는 그래서 판타지로 주체성 회복의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그 솜씨가(전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예사롭지 않다. 앞에서 말한 <말리>의 최종 목적지는 과거로 돌아간 현재-18세의 서말리가 과거-11살의 자신과 ‘직접’ 마주하며 응원의 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무대에서는 현재와 과거의 말리가 각각 캐릭터로 나뉘어 있지만, 이 장면은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고 기억에서 지웠던 시간을 말리 스스로 극복한다는 극적인 의미를 담는다. 외부의 도움 없이 고통을 마주하고 오롯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말리의 모습은 클라이맥스의 화력을 내뿜으며 작품의 핵심을 그대로 전달한다. 

 

사진=제작사 주다컬쳐 제공 (사진작가 권애진)

<말리>가 ‘(여)전사의 모습’으로 주체 회복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 또한 눈여겨 볼 지점이다. <말리> 공연의 결은 명쾌하면서도 따뜻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쾌활하다. 공연의 이러한 정서는 현재의 말리가 과거로 돌아가 가장 사랑했던 인형 더기가 된다는 설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말리는 유명 아역 스타로 한때 세상을 주름 잡았던 인물이었다. 귀엽고 깜찍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른스러워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스타 말리는 더기에게만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실상은 외로운 아이였다. 

인공의 이미지로 세상과 마주하던 말리는 학교도 잘 가지 못해 친구가 없고 부모에게도 자신을 털어놓지 못했지만 (그리고 매니저 삼촌은 이런 말리를 그냥 방치하는 수준으로 매니징하고, 연기 학원에서는 말리에게 스타가 되기 위한 정답만 가르친다), 오로지 더기를 친구 삼아 소통한다. 말리는 사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고 (모르고) 세상에 대한 온갖 질문으로만 가득 찬 아이였다. 엄마가 만들어 놓은 옥상정원이 자신의 이상향이라는 사실만 어렴풋하게 인지하고 있을 뿐, 스타로 살고 있는 삶이 항상 버거웠다. 이런 말리는 스트레스를 더기에게 풀기도 하고, 자신의 진짜 생각을 더기와 나누기도 하며 아무도 몰래 삶을 근근이 버틴다. 

 

사진=제작사 주다컬쳐 제공 (사진작가 권애진)

현재의 말리 역시 모종의 이유로 스타의 삶을 버리고 부모와 함께 한국을 떠나 영국 고등학교에 정착했으나 인종차별을 겪으며 세상과 불화 중이다. 그리고 잘 나가던 과거의 자신을 TV로 보며 위안과 증오의 양가적 감정으로 역시 삶을 버틴다. 따라서 이런 극적 설정 안에서 더기로 타임슬립 한다는 아이디어는 ‘내가 과거에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원했는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존재가 되어’ 끊어진 기억을 복원하고 주체를 세운다는 설정에 설득력을 더한다. 

말리가 더기가 됨으로써 주제는 명쾌해지고 공연은 말캉해진다. 춘천국제인형극학교의 개소(2022년 8월)로 현재 공연계에서 핫한 ‘인형극’을 11살의 말리(박설아)가 주도하고 18세 말리(임소라)는 인형과 호흡을 같이 하는 공연 문법은 주제와 정서를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공연에는 배우(조용휘)의 연기로 구현되는 더기 캐릭터와 현재의 말리가 소통하는 또 다른 차원의 층위가 있어 말리의 타임슬립을 관객이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극의 문법에 의해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여 더기의 선물로 말리‘들’ 사이에 놓여 있었던 인형이 사라지고 두 캐릭터가 직접 마주보고 대화하는 장면-최종 목적지는 순수하고 강력한 에너지를 갖는다. 

 

사진=제작사 주다컬쳐 제공 (사진작가 권애진)

<말리>의 또 다른 미덕은 모든 장면에 음악이 다채로운 스타일로 잘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음악과 드라마가 한 덩어리로 결합되어 장면을 구축하는 방식이 볼 만하다. 대학원 동기인 작가와 작곡가의 합이 공연 안에서 내내 빛을 발한다. 또한 영상 대신 세트로 극의 공간을 만들고 세트를 ‘움직여서’ 장면을 전환하는 아날로그적 무대는 공연의 순수한 차원을 시각적으로 표상한다. 다층적인 플롯을 공간 구획과 소도구들을 사용하여 해결하는 연출은 작은 무대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연극적 해법을 보여준다. 

<말리>가 가족극 레퍼토리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단, 11세의 말리가 ‘질문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초반부의 발랄함이 끝까지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은 고민이 필요할 수 있다. 또한 엄마와 아빠가 자기 드라마를 가진 보조적 캐릭터로서 애매한 지점에 걸쳐 있는 것 역시 공연의 약점이 될 수 있다. 삶의 자리를 찾으려 분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려는 <말리>의 목적이 향후 <말리>의 프로덕션 항로 위에서 잘 수행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를 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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