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에게 열린 길을 걷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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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에게 열린 길을 걷게 하라
  • 민경찬 논설고문/연세대 명예교수·과실연 명예대표
  • 승인 2022.07.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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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찬 칼럼]

지난 7월 5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ICM)에서 허준이 교수가 필즈상을 받았다. 이는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일이다. 필즈상은 국제수학연맹(IMU)이 4년마다 만 40세 미만의 학자에게 수여하는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최고 권위의 상이다. 노벨상보다 어려운 상이라고도 한다. 매년 10월 초부터 노벨상 수상자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한국인 이름이 없어 늘 아쉬워했는데, 수학 분야에서 처음 나온 셈이다. 필즈상은 전통적으로 세계수학자대회 개최국의 국가원수가 시상한다. 

허준이 교수는 대수기하학을 이용해 조합론 분야에서 대표적 난제로 알려진 리드 추측 등 모두 11개의 난제를 해결하고, 대수기하학의 새 지평을 연 공로와 미래 기여 가능성을 인정받아 필즈상을 받았다. 대수기하학은 방정식을 통해 도형이나 공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조합론은 중·고교 교과과정에 나오는 ‘경우의 수’를 기초개념으로 삼는 이론이다. 

허 교수는 미국에 유학 중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2살 때 한국으로 건너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허 교수가 한국 교육에서 어떻게 성장해왔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제2의 필즈상, 노벨상을 기대하는 일이며, 한국 교육이 세계 최고의 인재를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자 하는 일이다. 그의 성장과정에서 한국 교육발전에 주는 메시지를 함께 찾아보자는 의미에서 그동안 언론에 소개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이야기를 엮어본다. 

허 교수는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고,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구구단 외우는 것을 힘들어했다. 초·중·고교 때 수학을 중간 정도는 하였는데, 수능을 볼 때는 수학 과목을 제일 힘들어 했다. 그런데 그는 이 시절에 다양한 친구들과 생활을 같이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지금의 그로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으며, 수많은 경험을 제공해준 소중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중학교 때 글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책 읽기와 시 쓰기에 푹 빠져 있었다.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지내는 대신 자유롭게 글을 쓰면 그럴듯한 작품을 금방 써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그런데 막상 자퇴하고 온종일 자유로우니 아무것도 안 했고, 학교 끝나는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같이 PC방에 가서 신나게 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당시 글을 써보는 과정에 자신의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과학을 더 공부해서 과학기자가 되면 과학에 대한 글을 쓰며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검정고시를 거쳐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막상 대학에 가니 수업 듣기 힘든 것도 여전했고, 공부도 너무 어려웠다. 목표도 점점 잃고 방황하다 결국 3학년 1학기에 모든 과목에서 D와 F를 받았다. 8개월간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정도로 우울증에 걸리고, 진로를 고민하며 학업을 쉬기도 하여 대학교를 6년이나 다녔다.

허 교수가 수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특별하다. 4학년 2학기 때, 서울대 '노벨상급 석학유치 프로그램'으로 초빙된, 필즈상 수상자이며 하버드대 명예교수인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다. 중학교 때 히로나카 교수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기도 했던 그는 처음으로 실제로 수학을 연구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혼자 식사를 하는 히로나카 교수에게 말을 걸었다. 이후 둘은 매일 점심을 같이 먹으며 가까워졌다. 이 과정에서 수학적 영감을 얻게된 그는 히로나카 교수의 권유로 서울대 수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히로나카 교수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미국 유학길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필즈상 수상자인 히로나카 교수의 추천서와 함께 미국 12개 대학에  지원하였으나 다 떨어졌다. 다행히 일리노이대에 추가 합격되어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석사과정에서의 훈련과 히로나카 교수에게 배운 특이점 이론은 박사 과정 졸업 전에 '리드 추측'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한국에서 배우고 연구한 대수기하학의 이론으로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조합론의 문제를 해결했다. 조합론은 미국에 가서 처음 배웠다. 이렇게 리드 추측을 해결한 허 교수는 단숨에 수학계의 스타가 되고, 미시간대학으로 옮겨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허 교수는 배우는 게 느려서 모든 연구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하는데, 모두 차근차근 대답 잘 해 주어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는 수학의 매력은 공동연구에 있다며, 혼자 하는 것보다 동료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멀리 갈 수 있고 깊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모든 연구 결과들은 뛰어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허 교수의 성장과정은 ‘좋은 만남’들과 함께 그가 자신만의 열린 길을 스스로 선택하며 만들어 온 ‘자유로움’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필즈상 시상식에서 “어렸을 때 수학은 나에게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머나먼 땅과 같았다.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시인이 되는 것을 꿈꿨고, 마침내 수학이 그것을 하는 방법이라는 걸 배웠다.”라고 말했다. 

그는 수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수학의 매력은 자유로움이다. 어떤 대상을 연구할 것인지,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야 하는지 정해진 규칙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어렸을 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훈련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한다. 수학은 꾸준히 진득하게 붙잡고 앉아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가끔은 적당할 때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집착하기 보다는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하고 본인의 마음이 가고 재미있는 방향으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도 조언한다. 

허 교수의 성장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만남’이다. 석사학위 지도교수이던 김영훈 교수와 한국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라는 훌륭한 멘토 그리고 그동안 배우고 연구하는 과정에 좋은 동료들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필요한 것들,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을 때 바로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잘 만났던 것 같다고 하며 자신에게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성장하는 학생들에게 롤 모델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매우 중요함을 알려준다. 그들의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만남은 허 교수가 훌륭한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의 자유로운 생각과 낯선 경로의 선택과 이에 따른 방황을 지지해준 부모가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들을 갖게 된 것이다. 일반 부모들에게 기대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동안 한국 교육은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양성해왔다. 그래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으며, 국내외 대학, 기업 등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대전환의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허 교수와 같은 퍼스트 무버를 키우는 일이다. 우리 산업의 생산성, 국가 경쟁력도 여기에 달려있다. 이제는 학교 교육의 목표와 인재를 양성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허 교수가 입시 교육, 영재 교육 등에 길들여졌어도 세계적인 수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객관성, 공정성이라는 도식적 사고 때문에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표준화, 규격화시키는 획일화된 교육시스템에서 퍼스트 무버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제는 우리 교육도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개개인별로 스스로 열린 길을 만들어가도록 허용해야 한다. 각자 재능이 있는 분야에서 최고로 꽃 피울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국가, 사회가 학생들을 하나의 틀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열린 사회, 다양성을 수용하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새롭고 다양한 체험, 만남들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 도와야 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 정부나 사회가 현재의 경직된 이슈들에만 맴돌고 있는 것은 책임회피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한 사람의 소중한 인생의 길을 막아서는 죄를 짓는 일이 될 수 있다.   

허 교수는 “많은 10대, 20대들처럼 저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런데 다 돌아와 생각해보니까 구불구불했지만 가장 좋고 빠르고 최적화된 길이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고 천천히 차근차근 한 발짝씩 걸어가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한다. 

허 교수는 우리 사회 환경에서 퍼스트 무버로 설 수 있는 길을 실제적인 하나의 사례로 보여주었다.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과 꿈, 자신감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교육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모멘텀이 되게 해야 한다. 이를 한국 교육 생태계에 대한 새로운 국면 전환의 계기로 삼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제는 국민 개개인, 우리 사회와 정부 모두가 함께 열린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민경찬 논설고문/연세대 명예교수·과실연 명예대표

연세대 수학과 명예교수로 연세대 대학원장, 대한수학회 회장, 국제퍼지시스템협회(IFSA) 집행이사, 교육과학기술부 정책자문위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과학기술분과 의장, 포스코청암재단 이사, 국무총리 소속 인사혁신추진위원회 민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 과학자문위원회(SAB) 위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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