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식민사학의 기원과 궤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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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식민사학의 기원과 궤적을 찾아서
  • 서영희 한국공학대학교·한국사
  • 승인 2022.07.10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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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 (서영희 지음, 사회평론아카데미, 320쪽, 2022.05)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의 목표가 식민사학의 극복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식민사학’은 줄곧 한국 역사학계의 화두로 존재해왔다. 그간의 수많은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내재적 발전론으로 통칭되는 한국사 인식체계가 구축됨으로써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한국사학계의 과제는 거의 달성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식민사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새롭게 ‘식민주의 역사학’의 개념을 제시한 근래의 연구들도 있다. 이들은 식민사학의 극복을 내걸고 출발한 반(反)식민사학 역시 식민사학을 비판하면서 사실은 그를 거울로 삼아 성립한, 민족 혹은 근대 국민국가라는 틀에 갇힌 쌍생아라고 지적한다. 식민주의는 근대 역사학에 부수된 속성으로서 근대 역사학의 성립과정이 곧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성립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근대 역사학의 실증주의적 연구방법론에 의거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의도적인 왜곡 또는 날조라기보다는 식민주의와 결합한 근대 역사학의 범주에서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식민사학에 참여한 일본인 학자들이 일본 사학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 근대 역사학을 대표하는 역사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식민사학을 제국주의와 연동된 근대 역사학으로 보는 이러한 시각은 ‘실증’을 중시하는 ‘근대’ 역사학이라는 관점에 치우친 나머지 식민사학의 침략주의적 본성을 과소평가할 위험성도 안고 있다. 따라서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식민지에 이른 역사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제 식민사학에 의해 병합 정당화의 논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사편찬 과정을 통해 구축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아직도 한국 근대사 학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식민사학 비판이 있었지만 대부분 고대사부터 조선시대사에 집중되었고 식민사학의 근대사 서술에 대한 비판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책이 식민사학으로서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 중에서도 특히 고종시대사 인식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식민사학에 대항해 구축한 반(反)식민사학이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했다 해도 식민사학의 프레임에서 정체성, 타율성의 논리적 귀결인 병합 정당화의 틀을 깨지 못한다면 결국 망국책임론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망국책임론은 자연스럽게 일제에 의한 ‘문명화’의 논리로 귀결되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 재등장의 배경에 깔린 서사구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청사. 사진제공=사회평론 아카데미<br>
                                          조선총독부 청사. 사진제공=사회평론 아카데미

그런데 일제 식민사학의 체계 내에서 한국 근대사에 관한 학술적 저술을 남긴 경우는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가 거의 유일하다. 다보하시의 저술은 식민사학이라고 비판받기보다는 실증주의에 입각한 고전적 저술로 평가받으면서 근대사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다보하시 기요시 역시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최근세편인 제6편 편찬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 왔다. 1894년 6월 청일전쟁 발발 시점까지만 다룬 『조선사』 제6편 제4권을 보면 수많은 근거 사료들을 제시함으로써 엄정한 고증을 거친 사료 편찬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사』가 “정말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료 편찬”이었는지는 사료 원문을 수록하고 있는 『고본조선사(稿本朝鮮史)』와 일일이 대조한 후에 평가 가능하다. 특히 다보하시가 한·중·일 3국의 외교 사료들을 다수 이용했다는 것이 곧 객관적 사료 활용이나 사료의 편향성 논란을 면제해주는 것도 아니다. 대외관계에 편중된 사료 편찬은 그 자체로 고종시대 역사상의 왜곡이다. 고종시대사를 주체적으로 보지 않고 청·일·러시아의 각축 속에 운명이 결정되는 대외관계의 객체로 전락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일제는 역사편찬을 명분으로 조선의 모든 사료들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식민사학 구축에 유리한 사료들만 선별하여 『조선사』를 편찬함으로써 일견 객관적인 증거처럼 실증적인 방식으로 포장되어 제시되는 ‘사료’의 위력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 근대 사료학의 대가라는 도쿄제대 교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가 진두지휘하고 조선총독부가 모든 역량을 동원한 근대적인 학술사업으로서 『조선사』 편찬은 1894년 6월에서 끝나고 정작 일제의 국권침탈 과정인 대한제국기와 병합사는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이왕직(李王職)에서 총독부 학무국 관료 출신으로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오다 쇼고(小田省吾) 주관 하에 ‘왕조의 역사’로서 『고종순종실록』을 편찬했다. 고종 사망 직후 일본 궁내성에서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가 편찬한 『이태왕실록』에서 선구적 모습을 보였듯이, 형식적인 왕실 의례를 부각시킨 ‘왕조의 역사’를 편찬한 것이다. 『조선사』와 같이 사료적 근거를 직접 제시하는 편찬 방식이 아니라, ‘전통’의 형식을 빌려 편찬한 실록은 국권 침탈 과정의 민감한 사료들을 낱낱이 공개하는 곤혹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전통’의 형식을 취한 이왕직의 『고종순종실록』 편찬과 근대 역사학적 방법에 의거했다는 조선사편수회 『조선사』 제6편 제4권은 고종시대사 편찬에서 적절히 역할을 분담하며 식민사학의 근대사 인식의 틀을 형성했다. 

문제는 이왕직의 실록 편찬 과정에서 기초가 된 연대기 발췌 작업을 담당한 조선인 지식인들의 역할이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통치법령 제정을 위한 구관조사 과정에서 엄청난 분량의 기초자료들을 수집했다. 또한 병합 이전 통감부 시기부터 궁내부 규장각 도서과로 취합된 ‘제실도서’들을 ‘조선총독부도서’로 점유하고 목록화, 해제 작성 등을 통해 정리한 후 나중에 경성제대로 이관했다. 조선학 자료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도서와 함께 방대한 분량의 대한제국 정부기록류 역시 식민지 조선학 연구의 중추기관으로서 역할을 부여받은 경성제대에 한꺼번에 이관되었다. 구관조사와 규장각도서 정리는 초기 취조국, 총독관방 참사관실 단계에서는 일본인 관료들이 지휘하고, 조선인 위원 혹은 촉탁들이 실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역사편찬을 준비하면서 1915년 이후에는 조선인들이 포진한 중추원에서 구관조사와 기초사료 조사를 모두 담당하게 했다. 식민통치에 협력적인 조선인 관료지식인들이 모인 중추원에 조사 업무를 맡긴 것이다. 이들 ‘학식과 명망 있는 조선인’들이 결국 식민사학의 가장 근저에서 사료적 토대를 만들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인 실록 편찬위원들이 전통적인 사료 발췌를 토대로 초고 작성에 매진하는 동안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주도한 사료모집부에서는 개항 이후부터 대한제국기에 해당하는 근대사료들을 엄청난 분량으로 수집했다.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투옥된 경험까지 있는 기쿠치 겐조가 『고종순종실록』 편찬의 사료수집을 담당했다는 것 역시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실록 편찬 과정을 보여주는 『실록편찬성안』을 보면 『고종순종실록』은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전통적인 연대기 자료와 『관보』 등의 기사내용을 발췌, 편집한 데 불과했다. 실록 편찬을 핑계로 수많은 근대사 자료들을 이왕직 실록편찬실에 모아놓고도 정작 『고종순종실록』 편찬에는 반영하지 않았다. 개항 이후에는 왕조시대 기록의 형식인 『승정원일기』, 『일성록』이 대내외적으로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제대로 담을 수 없고, 그 이전 시대에 비해 사료의 엄밀성이나 밀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전통’이라는 형식에 맞추어 고종시대의 실제 모습을 축소해서 편찬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방대한 사료들을 수집한 후에도 그 사료에 즉하여 실록을 편찬한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 사료들만 선별적으로 활용하여 역사를 편찬했다면, 그것을 과연 ‘실증’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고종순종실록』은 그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면서 고종시대사 인식의 틀을 제한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 재조선 일본인들이 저술한 수많은 병합사들이 대중적 영향력을 끼쳤다면 『고종순종실록』은 현재까지도 한국 근대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면서 사료적 한계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 파급효과가 더욱 크다. 1910년 식민지화로부터 1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학계는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망국사의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식민사학이 구축한 병합정당화론의 영향이다. 일선동조론이나 임나일본부설,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을 완전히 불식한 한국 고·중세사 인식과 달리 고종시대사 인식에는 여전히 식민사학의 잔영이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와 마찬가지로 『고종순종실록』 역시 ‘실록’이라는 명칭에 오도(誤導)되어 엄정한 사료비판 없이 기초사료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해방이후 한국사학계의 식민사학 극복을 위한 수많은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유독 식민사학의 근대사 인식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부족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기초사료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일반 국민들까지 손쉽게 『고종순종실록』을 검색하고 기초적인 역사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번역본이 공개되고 있는 점이다. 어쩌면 식민사학의 총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종순종실록』을 대신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사료적 권위에 필적할만한, 근대적인 형식의 고종시대사 사료집을 시급히 편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롯하여 일제 식민사학이 구축해놓은 병합 정당화의 논리는 아직도 건재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영희 한국공학대학교·한국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전문위원과 경기도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과 정치세력의 동향에 대해 연구해왔으며,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식민통치를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어떠한 유산으로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아! 그렇구나 우리 역사 근대편』 외에 다수의 공저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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