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자유, 반짝이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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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자유, 반짝이는 이름
  •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 승인 2022.07.1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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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1912. 7. 1.’ 백석이 이 세상에 나온 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석 시가 내뿜는 아우라 때문에 겨울에 그를 많이 떠올리는 모양이지만, 나에게는 여름이 그렇다. 7월 1일이 백석 시인의 생일이어서 여름, 특히 7월이면 백석이 더욱 그립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 든 달이니 단연코 사무칠밖에.
   백석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가을이었다. 해사한 표정으로 삶의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들려주던 그의 목소리는 애잔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가 유영하는 시의 여정들이  마치 서글픈 자유처럼 다가왔다. 시를 왜 읽는가 또는 왜 쓰는가에 대한 나의 고민을 다독여주던 책이 바로 백석 시집이어서, 1989년 가을 그와의 첫 만남이 여전히 생생하다.

   꼭 10년 전인 2012년에 ‘백석 탄생 100주년 기념판’이 나온 일은 상당히 의미 있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한다. ‘백석’ 두 글자만 들어가는 책만 나오면 죄다 사 모으던 나에게 ‘백석 탄생 100주년 기념판’으로 3권의 평전과 함께 『백석 시 전집』이 나온 일은 단연코 압권이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의 나머지 삶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발표 시와 동시와 번역시까지 모두 담은, 그야말로 백석 시인의 전부를 맛볼 수 있는 ‘전집’이어서 참으로 감격스러워하면서 받아들었던 감회가 새록 새록하다. 
   꽤 오래 전부터 ‘귀중 서고’ 목록을 만들어 나가고 있어서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챙겨 읽고 있다. 새로 나오는 책들을 읽기에도 마음 바쁘고 분주하지만, 읽은 책들 가운데 그리운 옛사랑처럼 마음을 설레게 하는 책들을 다시 살피는 즐거움이란. 그 가운데에서 ‘백석 탄생 100주년 기념판’ 네 권은 단연코 으뜸이다. 2022년 7월 여름에도 어김없이. 
      

   2012년에 백석 시인의 모든 것을 제시한 3권의 평전과 『백석 시 전집』이 나오기까지는 송준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그가 국문학도가 아닌 경제학도였기에 더더욱 눈길이 갔다. 6개 국어에 능통했다는 백석과 관련된 자료를 찾기 위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를 독학으로 익혔다는 송준이다. 백석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 일본을 수차례 방문하였으며, 백석이 머문 곳 그 발걸음들을 차근차근 따라간, 그래서 백석 관련 자료를 가장 내밀하게 모은 사람으로는 유일무이한 사람이 송준이다. 얼마나 사랑이 깊었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헤아리고 받아들이기를 마다하지 않았을까.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사랑의 태도에 숙연해진다.
   백석의 삶을 전체적으로, ‘본격적으로’ 들여다 본 평전은 모두 3권으로 꾸려졌다. 1권은 『시인백석1: 가난한 내가 사슴을 안고』. 2권은 『시인백석2: 만인의 연인 쓸쓸한 영혼』, 3권은 『시인백석3: 산골로 가자 세상을 업고』. 허준, 임화, 정지용, 오장환 들의 관련 글들도 풍성하고 문단의 이런저런 풍경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은밀하다. 백석 시인의 알려진 삶을 새롭게 들여다보고 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삶을 들여다보는 내밀함도 상당하다. 
   특히 1권과 2권의 표지에 실린 사진은 송준이 직접 발굴한 것이라 하니 백석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는 반가움이 엄청나다. 세 권의 평전을 배경으로 삼아 ‘백석 탄생 100주년 기념판’이라는 부제가 붙은 『백석 시 전집』이 ‘전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련된다. 3부로 꾸려진 시 전집은 여느 시집과는 달리 북한에서 쓴 시와 번역시, 미발표시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말 그대로 ‘백석 시 전집’인 셈이다. 책 뒷부분에 「백석시어사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3,200여 개 정도의 백석의 시어가 오롯이 모여 있는 풍광도 감사하다. 

   놓칠까 해서 서둘러 덧붙이는 말. 그리움과 사랑 가득 담은 위 책들이 꽤 오랫동안 품절이 된 상태다. 절판이 아니어서 다행인가. 얼마 전 백석 시에 관심을 보이는 대학원생에게 이 책을 추천했더니 품절이 되어서 헌책방에서 거금을 주고 샀단다. 그 책을 귀하게 마음에 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빛이 바래져 버린 건 아닌지. 의미 있는 책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속 출간되지 못하고 하나둘 사라져가는 현실이 못내 안타깝다 여기는 것은 비단 나만의 푸념일는지. 

   백석 시인은 본명이 백기행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그는 6·25전쟁 중 남하를 권유받았을 때 가족과 고향을 버리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한다. 조만식 선생을 모셔야 해서 그러겠노라 했다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없는데도 북한에 거주한 시인으로 치부되었기에, 그는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우리에게 가려졌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시인뿐만 아니라 영어 교사, 연극 총감독, 축구부 감독, 기자, 번역가, 아동문학가 들로 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다.
   백석 시인은 1936년에 첫 시집 『사슴』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 당시 윤동주 시인은 시집에 밑줄을 그으면서 “그림 같다” “걸작이다”라는 메모를 남겨가며 직접 베껴 쓴 필사본 『사슴』을 읽었다 한다. 내가 그만큼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도 백석 시인을 흠모했다 하는데,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평안도 방언을 그대로 시어로 가져왔어도 백석 시를 감상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평가나, “시단에 한 개의 포탄을 던지는 것” 등의 찬사는 그의 작품이 얼마나 빼어났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나라 잃은 시기에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우리글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서 백석이 애잔하게 남긴 시편들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의 세계관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으로 요약된다. 곧, 자아와 세계가, 나와 네가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하는 것이 시가 지닌 궁극적인 서정적 세계관이다. 그래서 다른 장르보다 공감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시라는 장르이다. 백석의 시를 한 편 한 편 읽노라면, 온 몸과 마음이 시가 그려내는 이야기와 풍경 속으로 풍덩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동일성이 지닌 화합과 사랑의 정신 덕분이 아닌가 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다른 작품을 인용할까 하다가 이만한 작품이 없겠다 한다. 백석 시의 대부분은 서술시(narrative poem), 곧 이야기시이다. 감각적 이미지에 의존하기보다 인간의 행위나 생생한 삶의 모습에 의하여 인간의 의미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이야기의 매력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살아 있는 다양한 실제의 사람들이 포괄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시에 ‘이야기’라는 친숙한 요소를 끌어들임으로써 보다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백석 시인의 이야기시에는 다른 이야기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매력이 있다. 백석의 시가 서술성을 활용하면서도 대단한 압축과 생략의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곧,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소설의 이야기처럼 낱낱이 들려주지는 않는다. 대신, 나머지 이야기의 완성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우리의 흐드러진 상상력으로 온전히 열려 있다는 사실은 내내 흥미롭다. 위에서 인용한 작품의 시작 부분을 보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는 3행의 서술로, 우리는 나와 나타샤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의 이랑과 고랑을 상상할 수 있다. 가난한 나와 아름다운 나타샤와의 아련한 관계에서부터 상상력을 발동시켜도 좋겠다. 

   백석 시인은 내가 꼽는, 우리 문단의 최고 미남 시인이다. 작품으로 봐도 그는 최고의 미남 시인이다. ‘내 사랑 백석’, 아니, 우리가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인, 백석. 김소월 이후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시로써 얼마나 삶을 진솔하게 건드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최고의 시인이 백석이다. 좋은 작품은, 고전은 항구적 보편성, 곧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감동을 준다. 1930년대 시인 백석이 2022년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것은 바로 그의 시 한 편 한 편이 항구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에 백석 시인을 만나더라도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시를 외면서 그가 탄생한 7월의 생명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가 손수 옮겨 사랑을 고백한 나짐 히크메트의 시들도 정성 들여 낭송하고, ‘백석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음반’이라는 부제를 단 김현성 작곡가가 만든 13곡의 노래도 감성 깊게 읊조린다. 한 인간으로서 누렸던 자유를 서글프게 그러나 생명력 가득하게 품고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백석, “1930년대의 어둠을 밝힌 틀림없는 일등성”뿐만 아니라 2022년에도 내내 반짝이는 이름, 백석!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인·문학비평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현대시)을 전공하였다. 1990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당선, 1991년 『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익숙한 소리』(시집), 『현대시와 문화의식』, 『한국전쟁과 시』 등이 있으며, 그 외 공저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 『한국 현대문학의 성과 매춘』, 『몸의 역사와 문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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