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의 재창조 … 중국과 한국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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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의 재창조 … 중국과 한국 ⑪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2.07.1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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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중국에서 동아시아 한시문의 고전을 이룩했다고 인정했다. 시에서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문에서는 한유(韓愈)가 줄곧 높이 평가되어 불변의 규범을 제시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시대가 달라지니 반론이 제기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이에 대해 반발하면서 다른 길을 찾겠다고 했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알려면 원문을 살펴야 한다. 출처를 밝히는 번거로움도 피할 수 없다. ”何似李杜死飽醉”(어찌 이백과 두보처럼 잔뜩 취해 죽겠는가)라고 했다.(<復答崔大博>) “雕刻心肝作一家 於韓於杜可堪過”(심장이나 간을 새겨 일가를 이룬 것이, 한유나 두보를 많이 넘어선다.)고도 했다. (<兒子涵編予詩文 因題其上>)

후배 진화(陳澕)를 칭찬하면서 “李杜於君定孰勝”(이백과 두보와 그대 가운데 누가 마음가짐이 빼어난가)하고 물었다. “風流不落李杜後”(풍류가 李杜에 뒤지지 않는다)라고도 했다. (<陳君見和 復次韻答之>) 진화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심각한 술회를 했다. (<奉使入金>)

西華已蕭索         서쪽 중국 이미 삭막하게 되고,
北寨尙昏蒙         북쪽 진지는 아직까지 몽매하다.
坐待文明旦         앉아서 문명의 새벽을 기다리니,
天東日欲紅         하늘 동쪽에서 해가 붉으려 하네.

서쪽 중국은 남송이다. 남송은 삭막해졌다고 했다. 북쪽은 금나라이다. 진지를 쌓고 군사력이나 자랑하지만 아직까지 몽매하다고 했다. 남북 모두 어둠에 잠겼다. 동아시아 문명이 위기에 이르렀으므로 소생해야 한다. 그 사명을 동쪽의 고려가 맡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런 자각에서 중세후기문학이 시작되었다. 중세보편주의를 독자적으로 구현하려고 한문학을 쇄신해 민족과 민중의 문학이게 했다. 그런 움직임은 중국 안보다 밖에서 더욱 분명했다. 

요나라의 왕족이고 금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원나라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전환의 주역이었다. 칭기스칸의 군대가 서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기리는 웅대한 시를 지었다. “猿猱鴻鵠不能過 天兵百萬馳霜蹄”(원숭이나 기러기도 넘지 못할 곳을, 천병 백만이 준마를 타고 달려간다.)고 했다. (<過陰山>) 

중국 밖 고려의 이규보는 고구려 건국 시조 동명왕의 내력으로 서사시를 지었다. (<東明王篇>) 그 서문에서 동명왕의 내력을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가 거푸 탐독하니 “非幻也 乃聖也 非鬼也 乃神也”(환이 아니고 성이고, 귀가 아니고 신이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欲使夫天下知我國本聖人之都耳”(무릇 천하가 우리나라는 본디 성인의 고장임을 알도록 하고자 한다)는 것이 창작의 동기라고 했다. 한문학이 민족문학이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농민의 참상을 고발하는 시를 여럿 지어 민중문학이기도 하게 했다.

한문학이 민족문학이고 민중문학이게 하는 데 월남의 완채(阮廌, 응우엔 짜이)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월남을 침공한 명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주권을 되찾는 투쟁을 맡고, 그 의의를 알리는 시문을 지었다. “蠢爾蠻酋敢寇邊 積凶稔惡已多年”(너 오랑캐 괴수 감히 변방을 침범하는가, 흉하고 악한 일 쌓은 것이 이미 여러 해로다”(<賀捷>)이라고 하다가, “朔浸已淸鯨浪息 南州萬古舊江山”(북쪽의 침략이 그쳐 고래 물결 잠잠하니, 남쪽 지방이 만고의 옛 강산이로다)라고 했다. (<賀歸藍山>) 월남어 국음시(國音詩)도 지어 민중과 소통했다.

완채(1380-1442)와 조선왕조 세종(1397-1450)은 동시대 사람이었다. 완채는 명나라의 침공을 물리치고 여조(黎朝)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종은 고려를 대신해서 일어난 새로운 왕조를 안착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왕조는 물론 월남의 여조도 명나라와 국교를 맺는 방식은 책봉이었다. 명나라를 물리친 월남이 책봉을 받는 것이 자주권의 포기가 아니고 신장이라는 사실이, 전쟁을 거치지 않고 책봉을 받는 조선왕조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세종은 조선왕조의 건국을 칭송하는 노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스스로 창제한 문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이용해 손수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한시로 옮긴 악장(樂章)도 여러 편 내놓았다. 이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작품을 들어 말할 필요가 있다. <대동>(大同)의 서두를 보자. 

於皇我祖宗         아아, 우리 할아버지 임금께서
受命旣溥將         받으신 명이 넓고 장구하도다.
繼繼敷文德         이어 받으면서 문덕을 펴시어
載用緩四方         사방을 편안하게 하시도다.

    선대의 통치자를 ‘王’이라 하지 않고 ‘皇’이라고 했다. “受命”의 ‘命’은 ‘天命’이다. 천명을 직접 받은 것이 넓고 오래 이어진다고 했다.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고, 대대로 ‘文德’을 펴서, 나라 안뿐만 아니라 사방을 편안하게 한다고 했다. <용비어천가>에서는 하지 않은 말로 주체성을 분명하게 했다. 이런 노래 악장을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노래로 불러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하도록 했다. 오늘날 애국가를 제창하는 것과 같았다.

고려후기에 이규보가 시작한 한문학이 민중문학이게 하는 작업이 조선전기에는 더욱 확대되었다. 이석형(李石亨)은 건설 노동에 동원된 민중의 참상을 고발했다. “千人輸一木 萬人轉一石”(천 사람이 나무 하나를 나르고, 만 사람이 돌 하나를 굴리는), “民可惜誰能識 惡卒捶督如電擊“(백성들 애석한 줄 누가 알아주겠나, 못된 병졸들은 벼락같이 독촉하네)라고 했다. (<呼耶歌>) 

강희맹(姜希孟)은 농민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어려움에 동참했다. 민요로 부르는 기음 노래를 “竟長畝畝正荒 日煮我背汗獎”(사래 길고 장찬 밭 다 묵었는데, 해가 등을 쪄서 땀만 몹시 흐르는구나)라고 옮겨놓았다. (<竟長畝>) 어무적(魚無迹)은 어머니가 천인이어서 관노 노릇을 하는 처지였다. 한시문을 지어 하층의 고난을 알렸다. “蒼生難 年貧爾無食”(창생의 어려움이여. 흉년에 너희는 먹을 것이 없구나)라고 탄식했다. (<流民嘆>)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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