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다시 만나다 - 『조선, 지극히 아름다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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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다시 만나다 - 『조선, 지극히 아름다운 나라』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2.07.0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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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고요함 속에서 말없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 일본인의 달그락거리는 게다 소리와는 너무나 다르게 짚신이나 고무신을 신고 소리 없이 나타나는 이 사람들은 말할 때조차 눈에 띄지 않고 신중하다. 조선인들이 싸우는 소리도 듣기 힘들다.’
 
‘특히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조선 남녀 특유의 꼿꼿하고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 아시아 다른 민족과는 달리 걸을 때 양발의 각도를 60도 정도 바깥으로 번리고 걷는 습관이다. 조금 어색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러나 결코 비굴하지 않은 공손함,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마음, 협조적인 태도도 조선 민족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여러 해를 살면서 나는 90세가 훨씬 넘는 조선인들을 많이 보았고 100세를 넘긴 사람도 여럿 보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장수를 인삼뿌리를 먹은 덕으로 돌리지만, 나는 건강에 좋은 조선반도의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조선, 지극히 아름다운 나라』라는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은 구절들이다. 20세기 초의 조선을 상상할 때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짚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을 나는 외세의 위협에 풍전등화로 흔들리는 존재, 가난과 무지 속에서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고고하고 멋진 모습이라니! 내 오해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따져보아야겠고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반성도 해야 할 일이다. 

이 귀중한 기록을 남겨준 이는 독일인 신부 안드레 에카르트(1884-1974)이다. 그는 25세이던 1909년 12월 말, 제물포 항을 통해 조선에 들어와 20년 동안 한반도와 간도 등지에서 지내다 1929년에 독일로 돌아가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그는 열심히 한국어를 익혀 한국인들과 소통했고 한자를 공부하지 않으면 한국어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당에 가서 어린 서생들 틈에 끼어 훈장님의 수업을 듣기도 한다. 그런 노력 덕분에 조선 여러 계층의 남녀노소와 고루 만나면서 당시의 한국을 누구보다 깊숙이 들여다본 것이다. 여행을 떠나서는 지방의 양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고, 호랑이 출몰로 공포에 떠는 마을 주민들을 위해 직접 총을 들고 호랑이 사냥에 나서기도 한다. 주막에서 묵으면서 기지를 발휘해 좀도둑을 퇴치하는 모습도 흥미롭다. 20년이 흐른 후 조선을 떠나면서 그는 ‘생각하고 말할 때, 느끼고 행동할 때, 그리고 생활 습관에서조차 나는 조선인이 되었다’라고 자신을 평가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현재 조선 민족은 혼혈종이지만 인류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러 고유의 특성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그리고 만주와 동등한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여행기는 물론이고 학술서까지 조선을 완전히 중국에 예속된 나라로 이야기한다.’

조선의 독자적 정체성을 이렇게 분명히 밝혀주는 구절을 읽으면서 어쩐지 가슴이 찡했다. 외지인의 눈에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던 나라, 무방비 상태의 열등한 나라로 여겨진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 고마워서였나 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절감한 것은 기록의 가치이다. 에카르트가 관찰하고 기록했던 많은 것이 이제는 어느새 낯설고 아득한 것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삶, 너무도 일상적이고 당연하여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 삶도 언젠가는 낯선 존재가 될 것이고 그때 그 존재를 되살리는 건 우리가 남기는 기록이 아닐까.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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