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허무주의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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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허무주의가 남긴 것
  •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2.07.03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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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빈 칼럼]

정치학자가 정치를 보면서 허무함을 느껴야 하는 이상한 시대이다. 마음과 의식 안에 웃픈 정치를 소거하면 무엇으로 그 공간을 채워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중이다. 입구가 있어서 들어 온 동굴이었는데, 갑자기 입구와 출구가 모두 사라져 암흑만이 보일 뿐이다. 불온한 마음으로 가부좌 틀고 앉아, 나의 의식을 일상에 대한 관조 속으로 밀어 넣어보기로 한다.

언젠가 차를 마실 때, 과감한 패션으로 허리춤에 살짝 드러난 여교수의 팬티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야말로 누군가의 은밀한 색채를 뇌리에 담아두어야 하는 뜻하지 않은 행운의 순간이다. 

어찌하여 그 은은한 색조는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인지, 그리고 차향보다 더 진하고 그윽한 여운을 남기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그저 못 본 척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하여튼 그 길지 않은 찰나의 아름다움은 나를 깊은 명상에 빠지게 한다. 

첫째,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고 하얗고 희미한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땅에 내리비치는 숲길을 산책하는 기분이다. 둘째, 아름답다고? 천만에! 그처럼 추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사실 그 옷은 남녀 모두가 가장 자주 갈아입어야 하는 지저분한 헝겊 조각에 불과해. 셋째, 어허. 비록 그런 장면을 보았더라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게 도리이거늘 어찌 대인이 그런 일에 마음을 빼앗긴단 말인가. 소인배 같으니. 넷째, 요새 여인들은 왜 그리 망측스럽게 허리를 내비치고 다니는지 세상이 한참 잘못됐어. 등등.

이렇게 우리는 일상의 경험에 관한 생각‘들’의 흐름과 함께 살고 있다. 한데 하나의 사건을 놓고서 일어나는 가능한 여러 생각들 앞에서 궁금해지는 게 있다. 

생각이란 게 ‘본연의 나’의 내면에서 발현하는 것일까. 아니면 육체가 습관과 욕망으로 움직이듯이 마음의 습관과 욕망이 나를 지배한 결과일까. 아름답고 추하고 망측하고 엄숙한 생각의 표현들은 혹시 외부에서 이끄는 방향으로 따르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나의 생각이 반드시 본연의 나한테서 나온 것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상상해보자. 나와 많은 관광객이 디즈니랜드 안에서 배를 타고 전자장치로 정해진 뱃길을 따라가고 있다. 각양각색의 많은 인형이 지정된 즐거운 동작을 음악에 따라 연기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전등이 꺼진다. 웬일인지 혼자 배를 타고 칠흑같이 어두운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데 수많은 인형의 눈이 정지한 채 나를 주시한다. 소름이 끼친다. 전기가 꺼지며 모든 게 멈추어 선 것뿐인데도…. 갑자기 불빛이 들어온다. 다시 즐거운 광경이 연출된다. 나도 사람들도 배를 타고 여전히 즐거운 광경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사고실험에서는 우리의 생각이 외부의 변화에 따라 즐거움과 공포가 유동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생각이 외부조건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원효의 해골바가지의 물이 이런 게 아닌가.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은 좋거나 나쁜 맛이라는 나의 생각을 지배하는 외부의 조건이다. 원효는 외부의 조건을 초탈하여 내가 내 생각을 지배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작용도 개의치 않고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밤에 공동묘지에 혼자 있어도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편안하여질 수 있다. 외부의 상황에 지배받지 않는 본연의 나 자신의 생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작용을 무심하게 초탈할 수 있다면, 그게 해골바가지이거나 여인의 팬티이거나 나의 생각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지만, 나의 생각이 국가와 사회의 어떤 작용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본연의 나의 생각이 아니라 타율적인 생각이다. 나는 이런저런 방향으로 생각하도록 교육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나의 생각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의 훈육의 결과로 생성된 마음의 욕망과 습관이 지배하고 있다면 나는 주체적이 아닌 타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본연의 내가 아닌 세상이 규정한 ‘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진정 자기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인지 아닌지 믿음을 갖기 힘들다. 어떻게 세속의 작용으로 생성된 마음의 습관과 욕망을 초탈하여 순수한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아름다운 그녀들의 허리에서 슬쩍 엿보이는 은은한 색채를 훔쳐보았을 때 일어나는 여러 생각 중, 어디에 점을 찍어, 할머니의 맛있는 떡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인가.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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