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 말 죽음의 춤 원형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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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 말 죽음의 춤 원형을 찾아서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7.0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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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텐탄츠와 바도모리: 중세 말 죽음의 춤 원형을 찾아서 | 서장원 지음 | 아카넷 | 476쪽

 

이 책은 유럽 중세 말에 발생한 예술인 ‘토텐탄츠(Totentanz)’와 ‘바도모리(Vado mori)’를 통해 중세 말의 사정을 적나라하게 밝혀냄과 동시에 서양 문화 예술의 발원으로 여겨지는 ‘죽음의 춤’을 넓고 깊게 들여다보는 연구서이다. 죽음의 춤 작품 현장을 시작으로 죽음의 춤 기원, 발생 배경, 죽음의 예술 본질, 전개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예술사, 유럽 중세사, 중세 문학, 민속학, 신학, 철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죽음의 춤 원형이 되는 작품과 사유를 탐구한다. 

근대적 학문성을 과감히 탈피하고 중세적 사유방식을 그대로 연구 방법론으로 적용한 점도 눈에 띈다. 토텐탄츠 현상을 통해 중세 말이라는 개념을 재정립하고, 중세 말이 어떻게 유럽 사회를 개혁하고 동시에 새로운 정신·문화적인 토대로 작용하는지를 천착한다. 이를 통해 르네상스를 발판으로 구축된 근대적 사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중세 말에 발원한 죽음의 춤이 유럽 정신과 문화의 주춧돌임을 시사하는 도전적 학술서다.

토텐탄츠는 유럽 중세 말에 발생한 예술로, ‘죽음’의 형상이 산 자에게 다가와 ‘죽음의 춤’을 강요하는 장면이 교회 담장이나 납골당 벽면에 그려진 벽화이다. 그림과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림에는 죽음과 산 자가 등장하고, 그림의 위와 아래를 장식하는 문자는 죽음과 산 자의 대화로 되어 있다. 그림을 ‘죽음의 춤’이라는 의미의 ‘토텐탄츠(Totentanz)’라고 하는 반면, 문자는 ‘죽음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의미의 ‘바도모리(Vado mori)’라고 한다.

죽음의 춤은 본질적으로 인간 무의식에 내재한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가공할 만한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기근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자 당시 사회에는 이승 세계 경멸 경향이 만연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교단이나 도미니크 교단이 화가 장인들을 동원하여 제작한 것이 죽음의 춤이다. 죽음의 춤은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들춰냈고, 동시에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종교개혁의 기폭제 역할을 담당했다. 개별 인간들에게는 구원 전통을 통해 치유 개념을 제시했다.

중세 말에 발원한 토텐탄츠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르네상스, 바로크, 계몽주의, 낭만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며 쉬지 않고 시대 분위기를 대변하며 하나의 고정된 장르로 정형화되었다. 문학, 회화, 음악, 연극,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예술사학, 심리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새로운 학문이나 물질문명이 태동하는 곳이면 어김없이 토텐탄츠적 요소가 강렬한 원형으로 작용한다.

중세 말 죽음의 춤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지배 계급의 기획 예술이라는 점이다. 기획 예술일뿐더러 지배자 예술이었다. 시인이 시를 짓듯 중세 말 성직자들은 목적성을 지니고 토텐탄츠 예술을 제작했다. ‘그림’과 ‘텍스트’를 통해 ‘가르치고’, ‘대화하고’, ‘감정을 자극’했다. 기획자들이 죽음이라는 모티프를 선택한 이유는 인간이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여 당시 사회의 규범을 적용한 다음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후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교권이 점점 쇠퇴해지고 교회 내부가 사분오열되자 지배자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죽음을 기획했다. 일반인에게 속세의 사물이 아무 가치가 없고 이승에서의 삶이 무상하다는 구원 전통을 통해 그들의 삶의 운영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토텐탄츠가 발생한 시기가 서방 교회 분열 속에 대립교황이 탄생하는 시기와 맞물리는 이유이다.

중세의 유럽 인구는 페스트의 창궐로 50~75%가 감소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죽음과의 싸움은 그대로 죽음의 춤 예술이 되었다. 그와 함께 사람들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죽음 앞에서 차별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토텐탄츠에 나타나는 인간 군상 또한 ‘죽음’이 만든 평등 세상을 보여준다. 교황에서 이교도까지, 황제에서 거지까지 다양한 신분 서열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죽음의 공평성을 강조하고 있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원리의 신분 서열은 가난함 속에서도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회적 원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토텐탄츠가 만들어낸 인간 군상과 사회의 모상이다. 한편으로 춤은 생명이자 축제이다. 혼자 추는 춤은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외로운 춤이지만, 여럿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추는 윤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쾌하게 즐기는 축제가 된다.

토텐탄츠는 서양 문화 예술의 발원 혹은 예술가의 기원에 다가가는 징검다리이다. 이 책은 벽화로 시작된 토텐탄츠의 주제나 모티프가 르네상스를 거쳐 낭만주의 시대 이래로 어떠한 의미에서 서양의 음악, 회화, 문학, 영화, 뮤지컬, 비디오, 컴퓨터게임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그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탐구한다.

이 책은 죽음의 정체를 포룸(form) 즉 형상으로 파악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며 형상들을 보고 이 형상들을 통해 세상과 접했기 때문에 죽음도 형상들의 이미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아직 르네상스라는 개념이 없었고 개혁(reform)이 요구되던 시대로 죽음의 ‘형상(forum)’이 ‘개혁(reform)’의 선봉장이 된다. 세계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연 것이 죽음이고 죽음의 춤이다. 죽음의 형상은 개혁을 자극하고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되어 나타난다.

죽음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이 책은 엑세게시스(주석)와 안알뤼시스(분석)라는 두 방법론을 동시에 적용했다. 주석만 적용할 경우 주관성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분석만 적용할 경우 토텐탄츠가 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의미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석과 분석은 단순히 방법론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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