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위한 한국 통사…‘이념’과 ‘해석’보다는 ‘사실 서술’에 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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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위한 한국 통사…‘이념’과 ‘해석’보다는 ‘사실 서술’에 치중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7.02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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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신간]
- 연구자 70명 참여한 한국사 통사
- ‘객관성 담보 역사 개설서 필요’에서 출발

■ 『시민의 한국사: 1 전근대편 · 2 근현대편』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돌베개, 2022.06, 1권 588쪽·2권 574쪽)

 

해석을 절제하고 객관적 사실 서술에 역점을 둔 한국사 통사가 출간됐다. 1988년 창립한 이래, 국내 역사학계 중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하며 학술과 교양 각 부문에서 꾸준한 성과를 축적해온 한국역사연구회의 공동 작업물이다. 선사시대부터 2022년 초 문재인 정부 시절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를 충실하게 소개한 전형적인 통사서다. 

한국역사연구회가 2013년 ‘교학사 교과서 파동’과 2015년 ‘국정교과서 파동’을 겪으며 역사 해석이 권력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해 이 책의 집필에 착수했다. 이념이나 해석을 내세우지 않고 정확한 사실 서술에 집중함으로써 정치적 파동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객관성을 담보한 역사 개설서”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오래된 학설에서 벗어나 한국사 전체를 논리적·체계적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한국사는 비문 속 희미했던 한 글자가 밝혀지고, 익명으로 여겨지던 인물의 친분관계가 드러나면서 그간의 논의가 뒤바뀌며 역사가 새로 쓰이는 학문이다. 엄중함과 치밀함, 그리고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을 전제 삼아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위대한 일임을 증명하는 역사학의 특징은 이번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한국역사연구회 소속의 대학 교수와 박사급 연구자 50여 명이 필자로 참여했다. 또한 20여 명의 교열위원을 따로 두어 집필을 마친 후에는 사실관계를 재점검하고 혹시라도 담겨 있을 주관적인 해석을 재확인하기 위해 각 시기마다 검수 과정을 거쳤다. 이후 공저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문체를 정돈하고 논문투 전달방식을 덜어내기 위해 편집부에서 여러 번의 리라이팅을 진행했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10여년이 걸렸다. 

책의 편찬위원장을 맡은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70여명에 이르는 역사 전문가가 집단적으로 역할을 분담해 정통 통사를 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하 교수는 “시기별·주제별로 전문적으로 연구를 축적해온 필자를 엄선했고, 개인적인 학설이 아닌 학계 전체의 통설을 담아야 한다는 전제를 앞세웠다”고 말했다. 책의 필자가 소절 단위로 세분화된 것은 전문성과 객관성을 담보하고 최신의 연구 성과까지 반영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각 시기마다 ‘문화’ 부문이 다른 정치·사회·경제 부문과 거의 동일한 분량으로 쓰였는데 특히 ‘제5편 조선’에서는 전기의 문화 부문과 후기의 문화 부문을 담당한 필자가 다르다. 조선 전기의 경제 부문도 과전법을 맡은 필자와 신분제를 맡은 필자가 각기 다르다. 또한 그간 한국사 통사에서 소홀하게 다뤄졌던 고대의 ‘부여사’에 지면을 할애한 점이나 고려의 ‘동북 9성’과 관련해 벌어지는 논의의 현주소를 상세히 서술한 것도 전문 연구자가 맡은 부분을 책임질 수 있기에 가능한 결과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사진. 사진=돌베개 제공

한국역사연구회는 책 머리말에서 “어떤 시대나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로 제시하기보다는 사실 자체를 드러냄으로써 독자 스스로 해석하도록 서술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하 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에서도 1980년대까지는 국가가 세금을 걷는 일을 두고 ‘수탈’ ‘착취’와 같은 표현을 많이 썼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수취’라는 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방침으로 하고 있다”면서 “이처럼 독자에게 해석을 강요하지 않기 위해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고 말했다.

<시민의 한국사>라는 제목에서 짐작되듯, 일반 시민을 위한 쉽고 편안한 서술이 눈에 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요한 개념어들에 대한 설명과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논쟁적 지점을 실은 박스가 삽입됐다. 지도와 사진 등 시각 자료도 배치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탄핵이 이뤄졌고, 국정 교과서는 곧바로 폐기됐다”면서 “책 출간의 필요성 자체를 회의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으나, 학계 전문가의 지식과 안목을 결집한 개설서는 사회 상황에 영향받지 않고 여전히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책은 2권 8편 체제로 1권 ‘전근대편’과 2권 ‘근현대편’을 합해 1100여 쪽에 달한다. 1권 ‘전근대편’은 선사, 고대, 통일신라·발해, 고려, 조선 5편으로 구성돼 있고, 2권 ‘근현대편’은 개항기, 식민지기, 현대 3편으로 이뤄져 있다. 

근현대편 분량이 많은 편이다. 하 교수는 5000년 한국사 중 150년 정도에 불과한 근현대편이 절반을 차지하는 이유에 대해 “어제의 결과가 오늘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문제점이나 성취, 이런 것들의 원인이나 배경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일반 시민들의 관심사도 근현대 쪽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남북국시대로 말하기도 하는 것을 책은 ‘통일신라·발해’로 단출하게 말한다. 개화기의 움직임과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을 상세하게 서술했고 2000년대 이후 촛불집회, 남북관계, 한류 등도 충실하게 다뤘다. 전근대편에서는 그간 한국사에서 소홀하게 다뤘던 고대 부여사에 지면을 할애했다.

 

            1987년 7월9일 이한열의 장례식 도중 서울시청 앞 노제 광경. 사진=돌베개 제공<br>
                    1987년 7월9일 이한열의 장례식 도중 서울시청 앞 노제 광경. 사진=돌베개 제공

책에 따르면 선사 이후 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 역사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에 맞닿은 만주를 무대로 전개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웠다는 것이다. 통일신라는 무열왕계 직계가 왕위를 계승한 1세기 남짓 정치 경제의 번영을 구가하면서 석굴암과 불국사로 대표되는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탄생시켰다. 고려는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을 막은 뒤 1세기 정도 번영했다. 유교 불교 풍수지리가 공존했고, 외래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고유문화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켰다. 

조선은 16세기 이후 사림이 정계를 장악했으며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양반 내부의 대립으로 관료제는 점차 서울과 노론 중심으로 축소 운영됐다. 조선의 지배질서가 탄력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사회변화 흐름이 곳곳에서 싹텄다. 그 변화의 흐름은 그냥 묻히는 게 아니다. 동학농민전쟁은 진압됐지만 그 경험 속에서 민중은 근대적 개혁, 의병운동,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150여 쪽을 할애한 식민지기를 책은 한국 근대사의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전개 과정을 보여준 시기로 조명한다. 역사상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식민지로의 전환은 시련의 역사였으나 그 시련에 굴하지 않고 활발한 민족운동을 펼쳤다. 그 활발한 민족운동은, 우리가 근대를 만들었던 방식 중의 하나였다. ‘일대 사건’인 거족적인 3·1 운동이 일어났다. 전근대의 많은 지류들이 이 호수로 흘러들어갔으며, 다시 이 거대한 호수에서 우리의 현대사가 뻗어나오고 흘러나왔다. 

동학, 3·1 운동, 그리고 4·19까지 그것들은 어쩌면 불연속적인 점처럼 보였다.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에서 다시 시작한 민주화 열기가 1987년 민주화의 열매를 맺었을 때, 아니 그때도 몰랐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었다는 한국사적 통찰과 성취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시민의 한국사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문화적 고양에 이르고 있다. 한류, K-문화가 세계를 활보하고 있다. 고대사가 드넓은 만주를 무대로 삼았듯이 K-문화가 그보다 더 넓은 무대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향한 경제적 과제, 분단된 조국의 통일 문제가 놓여있다. 한국사는 우리에게 책무를 부여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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