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자유관: 무위·자연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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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자유관: 무위·자연을 중심으로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7.0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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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강연]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10강_ 이승환 고려대 명예 교수의 「도가의 자유관」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첫째 섹션 ‘자유의 이념과 지향’ 제10강 이승환 명예교수(고려대 철학과)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노자의 자유관: 무위·자연을 중심으로 


이승환 교수는 “정치적 자유 특히 ‘간섭의 부재’로서 자유라는 개념”이 “근대의 번역어”인 탓에 “근대 이전의 동양 문헌에서 이 단어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전제하면서, 그처럼 “단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도가 사상에서 정치적 자유에 근접하는 단어를 고르라면 그 후보는 당연히 ‘자연(自然)’이 될 것”인바 『노자』에서 말하는 ‘자연’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모저모 궁구한다.
우선 자연이란 “외부로부터의 개입이나 사역(使役) 없이 만물이 ‘스스로’ 자기 힘에 의해서 자라나고 성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답한다. 이는 노자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무위ㆍ자연”이란 표현과 맞닿아 있는데, 무위야말로 “작위적인 개입의 부재 또는 자의적 간섭의 부재”를 뜻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노자가 그리는 이상적 군주”, 즉 성인(聖人) 또한 “백성들을 불간섭(non-interference)과 비지배(non-domination)의 방식으로” 다스리고, 그에 “백성들은 아무런 강압이나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힘에 의해” 화육하고 번창”해갈 수 있길 꿈꾸게 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무위’가 “문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관심하거나 무기력한” 방기의 정치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며 “분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조세 정책과 엄정한 수취 체계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함도 주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 같은 “백성들의 자화(自化)를 지원”하기 위한 노력이 “이미 남음이 있는 자에게 다시 보태주려는 ‘유위’의 노력이 아니라 ‘천도’의 균평함을 본받으려는 ‘무위’의 노력”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한편 노자의 자연이 “‘스스로 그러함(자발성)’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본래 그러함(본래성)’의 의미도 같이 함유”하고 있다고 그럴 때, 노자에 의하면 유교의 인(仁)과 의(義)란 도(道)와 덕(德)이 사라진 뒤 나타난 “유위적 규범으로서, 사사로움과 편파성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예교(禮敎)의 질서 복원 대신 “원시 상태의 통나무를 뜻하는 박(樸)”으로 표상되는 천진성을 간직한 질박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6월 11일, 이승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1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br>
지난 6월 11일, 이승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1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한문 어법에서 ‘자유’ 

한문 고전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지만, 자유라는 단어가 자유주의 정치 이론에서 말하는 정치적 자유(liberty)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문 어법에서 자유는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개인이 “자기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 또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제멋대로” “방사(放肆)하게” 판단하고 행위하는 일을 가리켰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민권 운동의 전개와 더불어 liberty의 번역어로 자유라는 단어가 채택되었으며, 이후 사람들에게 점차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자유라는 번역어가 일본에 유학/망명했던 량치차오(梁啓超)와 캉유웨이(康有爲) 그리고 옌푸(嚴復)를 통해 중국으로 소개되었고, 점차 오늘날 쓰이는 의미로 확산되었다.

정치적 자유 특히 “간섭의 부재”로서 자유라는 개념은 근대의 번역어이기 때문에, 근대 이전의 동양 문헌에서 이 단어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유라는 단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도가 사상에서 정치적 자유에 근접하는 단어를 고르라면 그 후보는 당연히 ‘자연(自然)’이 될 것이다.

2. ‘자연’의 두 의미: ‘스스로 그러함’과 ‘본래 그러함’ 

한문 고전에서 ‘자연’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노자』이다. 『노자』에 등장하는 ‘자연’은 물리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自) 자와 그러할 연(然) 자가 합해진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형용명사이다. 

『노자』의 ‘자연’은 외부로부터의 개입이나 사역(使役) 없이 만물이 ‘스스로’ 자기 힘에 의해서 자라나고 성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지ㆍ만물은 자기 안에 운동과 변화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그러함” 즉 자발성을 본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정치사상은 “무위ㆍ자연”이라는 네 글자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위’의 주어는 ‘도’ 또는 성인이고, ‘자연’의 주어는 만물 또는 백성이다. 도는 천지의 운행 법칙을 말한다. 도는 만물을 주재함에 무위의 방식으로 한다. 무위란 작위적인 개입의 부재 또는 자의적 간섭의 부재를 가리킨다. 도의 무위적 주재에 따라, 만물은 외부로부터의 개입이나 간섭 없이 스스로 자라나고 성장해간다. 만물의 생성과 변화는 전적으로 사물 자신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지 외부로부터의 개입이나 간섭 덕분이 아니다. 도는 만물이 생겨나고 자라나게 돕지만, 명령을 내리거나 간섭하지 않으며, 소유하려 들지도 않고 자신의 공덕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도의 만물에 대한 무위적 주재와 마찬가지로, 노자가 그리는 이상적 군주 즉 성인은 백성들을 불간섭(non-interference)과 비지배(non-domination)의 방식으로 다스린다. 이에 백성들은 아무런 강압이나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힘에 의해” 화육하고 번창해간다. 노자에 의하면 “성인의 통치는 만물이 스스로 그렇게 되어가도록 도울[輔] 뿐 작위적으로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들은 그를 무겁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성인이 앞에 처해도 백성들이 그를 해롭다고 여기지 않는 이유이다.

노자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자발성)’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본래 그러함(본래성)’의 의미도 같이 함유하고 있다. 노자는 자연에서 문명으로의 이행을 긍정적으로 보지만은 않는다. 노자는 인공이 가해지기 전의 본래 상태로부터 국가와 제도가 만들어지고 문명이 전개되는 과정을 질박함[樸]이 손상되어가는 과정, 천진성과 본래성이 상실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인간에게 억압과 굴레가 덧씌워지는 ‘부자유로의 퇴행’ 과정으로 파악한다.

 

3. 이름과 권력 그리고 명교와 예교

질박함[樸]이란 아직 사물에 이름[名]이 붙여지기 이전의 상태로서, 인간의 인식과 관심에 포착되지 않은 혼돈의 상태이다. 사물은 인간에 의해 ‘이름’으로 불리면서 사회 제도와 구조 안으로 편입된다.

미지의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한 사물은 관심의 대상이 됨으로써 이름을 부여받게 되고, 이름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그 이름에 부여된 의미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름 없는 혼돈 상태의 사물 ⟶ 이름으로 부르기[呼名] ⟶ 의미의 탄생”에 이르는 과정은 존재와 인식에 언어가 미치는 비의적(秘儀的) 영향 관계를 보여준다.

노자에 의하면 한 사물에 특정한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 이름에 규정된 의미로 사물을 (구조 안으로) 포섭해 들인다는 뜻이다. 그 자체로 존립하던 사물이 특정한 의미로 규정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본래성을 상실하게 된다. 

노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질박한 본성을 가졌던 인간이 사회화ㆍ제도화의 과정에서 자발성과 본래성(즉 ‘자연’)을 상실하고 억압과 부자유의 굴레에 속박되는 일이다. 노자에 의하면 사회화ㆍ제도화 이전의 인간은 가공되지 않은 통나무처럼 자발성과 본래성을 간직한 질박한 존재였다. 하지만 국가가 생기고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인간은 각기 다른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노자가 살았던 춘추ㆍ전국 시대에, 이름에 부과된 차등의 질서는 엄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름에 따라 차등적으로 규정된 권한과 의무의 체계를 ‘예’라 한다. 이름의 질서 즉 명교(名敎)는 ‘예’의 체계 즉 예교(禮敎)이다. ‘예’는 국가의 법도이며 왕이 국가를 경영하는 대원칙이다. 따라서 ‘예’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곧바로 형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 예(禮): 규범 문화 퇴행의 징표

공자의 정치사상이 이름과 행위의 일치 즉 정명(正名)을 목표로 했다면, 노자는 이름이 부여되기 이전의 자발성과 본래성을 회복하는 일 즉 무명(無名)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혼란을 종식하려는 공자의 해법이 무너진 ‘예’를 회복하는 일[復禮]에 있었다면, 노자의 주안점은 ‘예’의 자의성을 폭로하고 ‘예’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로 사회와 제도를 되돌림으로써 인간의 자발성과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데 있다.

노자에 의하면 “예(禮)는 충신(忠信)이 희박해진 시대의 표징으로, 또 다른 혼란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노자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규범 문화의 쇠퇴를 이렇게 파악한다.

“도가 사라진 후에 덕이 생겨났고, 덕이 사라진 후에 인(仁)이 생겨났으며, 인이 사라진 후에 의(義)가 생겨났고, ‘의’가 사라진 후에 ‘예’가 생겨났다.”

규범 문화가 “도 → 덕 → 인 → 의 → 예”로 변천해온 순서는 교사(狡詐)와 지교(智巧)가 늘어남에 따라 인간의 자발성과 본래성이 상실되어가는 반비례의 과정이다. 규범 문화의 변화와 더불어 국제적으로는 영토 쟁탈전과 무력 분쟁이 일상화되었고 국내적으로는 군비 강화를 위해 백성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 증대하게 되었다. 

유교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인’과 ‘의’는 공자와 맹자가 좋은 정치의 표상으로 내세웠던 최고의 덕목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왜 노자는 인ㆍ의를 쇠락한 시대를 상징하는 하덕(下德)으로 여기는 것일까? 노자에 의하면 ‘인’과 ‘의’는 ‘도’와 ‘덕’이 사라진 후에 나타난 유위적 규범으로서, 사사로움과 편파성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노자는 “천도(天道)에는 친/소(즉 편파성)가 없다.”라고 하고, “천지는 인(仁)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5. 예(禮)의 자의성

인ㆍ의보다 한 단계 더 쇠락한 규범은 ‘예’이다. 노자는 “예는 혼란이 일어나는 시작점”이라고 보았다. 서주에서 춘추를 거쳐 전국에 이르는 동안 ‘예’가 너무 번잡하게 늘어나기도 했지만, 제후국들은 종종 상대국의 무례(無禮)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곤 했다. 

공자는 이름에 걸맞은 행위의 실천을 통해 ‘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노자는 ‘예’의 자의성과 허위성에 초점을 맞춘다. ‘예’는 진실함과 미더움이 상실된 시대의 표징으로 단지 침략 전쟁의 구실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고대 사회에서 ‘예’는 자연법적 질서로 정당화되었다. 자연 세계에 높은 곳이 있고 낮은 곳이 있듯이 인간 세계에도 높은 사람[上]과 낮은 사람[下], 큰 사람[大人]과 작은 사람[小人]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상/하와 대/소는 필연적 근거가 결여된, 너무도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권력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노자에 의하면 우리가 부르는 이름들은 본질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이름에는 본질적 의미가 없으며, 다만 “약속에 의해 굳어진 습속의 체계”일 뿐이다. 우리가 소리 내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며,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도’ 그 자체가 아니다. 이름으로 불리기 이전의 무명의 존재, 혼돈 상태의 그 어떤 것이야말로 사물의 본래 모습이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라고 노자는 말한다.

 

6. 무위 정치와 이상 국가

노자에게 정치의 목표는 자의적인 지배와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발적인 삶과 본래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일 즉 ‘자연’의 회복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강압과 간섭 그리고 수탈과 착취를 멈추는 일 즉 유위(有爲)로부터의 탈피가 요구된다.

‘유위’란 무거운 세금과 잦은 부역 동원 그리고 위하(威哧)와 형벌에 의한 권위주의적 통치를 말한다. 유위 정치는 세금, 요역, 형벌과 같은 강성(强性) 수단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교육, 종교, 의례와 같은 연성(軟性) 수단에도 의지한다. 충신전ㆍ효자전과 열녀전, 그리고 이들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내려주는 정려문은 군주제ㆍ신분제ㆍ가부장제 국가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고안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교화’는 가르쳐서 변화시킨다는 뜻으로, 무지하고 몽매한 존재들에게 ‘민’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이 이름에 합당한 분한(分限)을 가르쳐서 명교와 예교의 체계 안으로 편입시키는 정치화의 과정을 말한다. 노자는 ‘교화’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반대한다. 노자의 이상적 통치자는 유위 대신 무위의 지배를 행하고, 언설에 의한 교화 대신 ‘말없는 가르침[不言之敎]’을 행한다. 그리고 강압적 힘에 의해 백성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백성들의 자기 화육[自化]을 지지한다. 노자의 성인은 백성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일[實腹, 强骨]에 주력하되, 허위의식과 이념적 열정은 약화시키고자 한다(虛心, 弱志). 이에 따라 총명과 재지(才智)는 부정되고 인ㆍ의의 가르침도 거부되며, 학(學)과 지혜의 전수도 폐기된다.

무위 정치는 군주의 무욕(無欲), 무사(無私), 무집(無執)에서 출발한다. 무위 정치는 불간섭과 비지배의 정치이자 부드러움을 숭상하는 온유함의 정치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정치이며 불평등을 시정하고 균평을 지향하는 정치이다. 저절로 균평을 지향하는 자연 세계의 움직임이 ‘무위’라면, 일부러 자연 세계와 반대의 길을 걷는 인간 세계의 현실은 ‘유위’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도를 체득한 성인은 자연 세계의 길(즉 천도)을 본받아 인간 세계에 균평을 실현하고자 한다.

‘무위’는 자의적인 권력의 남용을 배제하는 불간섭의 정치이지만, 문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관심하거나 무기력한 정치는 아니다. 분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조세 정책과 엄정한 수취 체계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백성들의 자화(自化)를 지원하기 위한 이러한 노력은 이미 남음이 있는 자에게 다시 보태주려는 ‘유위’의 노력이 아니라 ‘천도’의 균평함을 본받으려는 ‘무위’의 노력이다.

 

이처럼 무위의 정치를 통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는 상태”를 노자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최적의 정치 상황에서 백성들은 자기가 누리고 있는 풍요로운 삶이 군주의 훌륭한 통치 덕분이라고 여기기보다, 스스로의 힘에 의해 성취한 자화(自化)의 결과물이라 여기며 뿌듯해한다. 백성들의 ‘스스로 그러함’과 ‘저절로 그러함’은 군주에게 “힘이 안 드는” 가성비 높은 통치 방법이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남는 의문이 있다. 노자는 군주의 ‘무사’와 ‘무욕’을 좋은 정치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무사’와 ‘무욕’은 군주 자신(self)을 고결하게 도야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안정된 통치를 이루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인가? 또 군주가 백성들의 자기 화육[自化]을 지원하는 일은 백성 ‘그들 자신(them-selves)’을 위함인가, 아니면 백성들의 동요와 저항을 잠재워서 군주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인가?

‘무위’를 전적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 이론이라고 여기거나, 전적으로 군주만의 이익을 위한 통치술이라고 보는 견해는 잠시 보류해두는 것이 좋겠다. 무위의 정치는 백성들의 ‘자화’로 귀결되므로, 이는 종국적으로 백성에게도 좋고 군주에게도 좋은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의 정치 이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다시 말해서, 무위의 정치는 군주와 백성 쌍방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전통적으로 노자 무위ㆍ자연의 정치사상이 지향하는 궁극적 이상향은 소국과민(小國寡民)으로 알려져왔다. 『노자』의 ‘소국과민’ 장은 수많은 주석가와 독자들에 의해 지배자가 없는 사회,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이 사라진 사회, 무정부주의, 아나키즘, 원시 공산 사회, 원시 씨족 사회, 생태 공동체 등으로 읽혀왔다. 하지만 ‘소국과민’의 이상과는 정반대로, 춘추ㆍ전국 시대의 제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더 넓은 영토와 더 많은 인구를 얻기 위해 광토중민(廣土衆民) 정책을 펼쳤다. ‘진짜 정치(real politics)’의 관점에서 볼 때 ‘소국과민’ 장은 미스터리이다.

‘소국과민’에 관한 내용은 『노자』에서 제80장 말고는 발견할 수 없다. 이 장은 통행본(왕필본)에는 실려 있지만 곽점 초간본에는 들어 있지 않다. ‘소국과민’ 장을 그나마 합리적으로 독해하려면 제60장에 나오는 큰 나라의 경영 방략과 비교의 시각에서 읽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제60장에서는 큰 나라의 경영 방략과 관련하여 “큰 나라를 다스리려면 작은 생선을 요리하듯 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큰 나라(대국)를 지향하라는 말이 아니라 “큰 나라를 다스릴 경우라면” 작은 생선 요리하듯 조심스럽게 경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각종 법령과 정책을 자주 변경하다가는 나라 안에 커다란 혼란과 동요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소국과민’이라는 문구도 제60장처럼, “작은 영토 적은 인구의 나라라면”이라는 조건절로 읽는 것이 순통하다. 영토가 작고 인구도 적은 나라의 경우라면, 각종 법령과 제도를 지나치게 번거롭지 않도록 간소화하는 일이 필요하고, 군사 무기 개발과 전쟁 준비에 재화를 쏟아 붓기보다는 백성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려는 박실(樸實)의 정치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소국과민’ 장이 누구에 의해서 어떤 연유로 『노자』 안에 편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국 말기에 오랜 전란을 거쳐 천하가 일통(一統)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참혹하고 피폐해진 현실에 대한 반사(反思)로 ‘소국과민’의 이상향이 제시된 것은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아무튼 ‘소국과민’의 이상은 장자에게 계승되어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과 지덕지세(至德之世)의 관념으로 재현되었으며, 이는 도가적 유토피아의 전범으로 후세인들에게 각인되었다. 

 

7. 『노자』 이후

노자 무위ㆍ자연의 정치 이념은 진(秦)이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했지만, 한 대에 들어 확고하게 정립된 명교와 예교 질서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반(反)명교ㆍ반(反)예교의 지식인들에게 정신적 의지처가 되었다. 

『노자』 무위ㆍ자연의 정치사상이 다시 지성계에서 담론의 소재로 등장하게 된 것은 근대 초기의 일이다. 자유주의자인 옌푸(嚴復: 1854-1921)는 서양의 다양한 정치 서적을 번역ㆍ출간하였는데 그는 서양 서적에서 말하는 자연법, 개인, 자유, 방임, 민주, 평등의 가치를 『노자』와 『장자』라는 고전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아테네의 민주정을 『노자』의 ‘소국과민’처럼 작은 규모의 정치체에서 실현 가능한 정치 형태라고 이해하는 한편, 영국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방임과 불간섭은 『노자』가 말한 ‘무위지치’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서양의 자유주의 정치사상을 『노자』에 비부(比附)하는 이해 방식은 견강부회의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중국이 사회주의의 길을 걸으면서 중단되었던 ‘자유’를 향한 염원은 최근에 들어 서서히 되살아나는 징후가 감지된다. 이른바 ‘천도 자유주의’의 담론이 그것이다. 류쥔닝(劉軍寧)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정치 담론은 『노자』의 ‘천도’와 ‘무위’ 개념의 재해석을 통하여 서양의 자유주의 정치 이론과 중국의 문화 전통을 접목시키고자 한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천도 자유주의의 담론은 현실 중국에서 당장 구현되기는 어렵겠지만, “사회주의 이후(post-socialism)”를 대비한 정치적 자원의 구축과 문화적 포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자유’가 뿌리내릴 때까지 『노자』에 대한 자유주의적 재해석은 거듭될 것으로 예상된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도가의 자유관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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