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를 정면에서 직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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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를 정면에서 직면하라
  • 윤평중 한신대·사회철학
  • 승인 202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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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책임과 판단』 (한나 아렌트 지음, 서유경 옮김, 필로소픽, 2019.12)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 열기가 여전히 뜨겁다. 가히 ‘아렌트 르네상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렌트 주요 저작 대부분이 이미 우리말로 옮겨졌다. 대표적인 아렌트 전문가이자 한국 아렌트 학회 前 회장인 서유경 교수가 옮긴 『책임과 판단』(필로소픽, 2019)은 생애 마지막 시기 10여 년간 아렌트가 남긴 강의록, 연설문, 논문 등을 묶은 선집이다. 1부 「책임」, 2부 「판단」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특수한 질문에는 반드시 특수한 답이 주어져야만 한다”는 아렌트의 신념을 육화한 텍스트다. 1975년 사거할 때까지 당대를 강타한 구체적 현안들에 대한 정치철학적 성찰을 아렌트 특유의 심원한 방식으로 펼친 노작(勞作)이다. 보편성과 구체성의 모범적 결합이라 할 만하다.

언제나 그렇듯 서양사상사의 핵심에 정통한 아렌트는 베트남전쟁이나 아우슈비츠 같은 특정한 사건을 매개 삼아 독자나 청중에게 ‘스스로 사유(思惟)하라’고 권유한다. 사유하지 않은 ‘책상머리 살인마’ 아이히만 같은 개인이 역사의 특정 국면에서 치명적 반인륜성에 함몰될 수 있음을 ‘악의 평범성’ 테제가 웅변한다. 『책임과 판단』에서 아렌트는 이런 통찰을 심화시켜 정치의 세계와 도덕의 지평을 갈라놓는 깊은 단층을 이을 수 있는 방안을 탐색한다. 정치와 도덕의 대(大)분리 위에 정초된 근·현대 정치철학의 질곡을 돌파하려는 독창적 시도다.

아렌트의 사유는 ‘도덕적 고려의 중심엔 자아가 있고, 정치적 고려의 중심엔 세계가 있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바꿔 말하면 도덕적 책임은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정의되며, 정치적 판단은 복수(複數)의 인간들이 어울려 사는 세계의 차원에서 규정된다. 서 교수가 ‘옮긴이의 말’에서 예시하듯 한국인들에게 ‘조국 사태’는 그 생생한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하지만 깨어있는 시민으로서의 인간은 도덕적 책임과 정치적 판단의 두 영역과 동시에 수시로 접속한다. 이런 아렌트적 도식의 정합성을 수용한 기초 위에서 어떻게 정치적 판단과 도덕적 책임을 유기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겠는 지가 『책임과 판단』의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책임과 정치적 판단을 잇는 아렌트적 논술의 단초는 ‘책임’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정치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중대 사건들에 대해 심원한 의미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다. 그 말의 깊은 의미에서 ‘당대 한국인들 모두가 세월호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명제가 그 실제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는 선언은 아름답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우기 어렵게 되는 실천적 혼란을 낳는다. 나치 전범들이 법정에서 구사한 궤변이 전형적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도덕적 책임과 정치적 판단을 잇는 ‘정치적 책임’의 의미가 이런 방식으로 어지럽게 희석될 가능성을 경계하면서 도덕과 정치를 연결시키려 노력한다.

도덕과 정치를 연계하려는 아렌트의 시도는 칸트의 패러다임에 크게 의존한다. 『실천이성비판』의 칸트가 아니라 『판단력 비판』의 칸트가 아렌트 정치사상의 지렛대다. 잘 알려져 있듯 칸트가 논술한 취미판단은 보편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수한 개별자의 특성을 합리적으로 분별하는 미학적 판단능력이다. 그렇다면 특수한 개별자가 보편적 개념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이성적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이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이다.

같은 공동체에서 삶을 영위하는 여러 개별자들은 단일한 보편의 잣대에 예속되지 않으면서도 그 공동체를 관류하는 공통감각을 기반으로 서로 이성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아렌트는 이 공통감각을 정치철학으로 확장해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의 접점을 이끌어낸다. 이 지점은 아렌트적 맥락에서 도덕적 책임과 정치적 판단이 연결되는 핵심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아렌트는 책임과 판단을 통섭한 정치적 책임의 지평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다. 현대 공화주의 정치철학이 아렌트에게서 한 정점(頂點)에 이르게 되는 맥락이다. 공화정의 사상에서 우리는 개체와 공동체의 변증법을 목도한다. 성숙한 시민은 좋은 정치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다운 나라야말로 존재의 집이다.

아렌트는 특수성을 보편의 함정에 침몰시키는 서양 정치철학자들의 통폐를 비판하고 특수와 보편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면서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 특수한 답변을 이끌어낸다. 『책임과 판단』이 마치 신문과 잡지에 등장하는 것 같은 구체적 현안들을 부단히 소환해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아렌트의 사유는 쉬운 독서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글들도 음미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옮긴이의 내공이 아렌트 사유의 여정을 훨씬 매끄러운 것으로 만들어준다. ‘옮긴이의 말’을 읽은 후엔 3장 「집합적 책임」과 7장 「심판대에 오른 아우슈비츠」부터 먼저 읽는 걸 권하고 싶다. 아렌트 해설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책임과 판단』은 아렌트 사상의 정수에 육박해 갈 수 있는 빛나는 통로를 열어 준다.

나는 아렌트의 정치사상엔 놀라운 통찰과 함께 고유한 약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당대의 뜨거운 정치사회적 현안들과 정면 대결했다. 그 결과 아렌트는 보수·진보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독창적이고 보편적인 사유의 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20세기 최대 정치사상가의 한 사람이 된 이유다. 여기서 나는 ‘사상가 아렌트를 사랑하는 우리가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제대로 사유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현대사는 아렌트가 직면한 서양의 문제들을 포함함과 동시에 초월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의 이 땅이야말로 풍성하면서도 심원한 정치철학의 거대한 옥토(沃土)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조국 사태가 생생한 사례다. 아렌트가 우리에게 격려한다. 우리 시대를 철학적으로 정면에서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다. 


윤평중 한신대·사회철학

한신대 대학원장 및 철학과 교수로 「비평」, 「철학과 현실」의 편집위원이다.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남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사회철학 및 정치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역사학과, 미시간 주립대학 철학과, 뉴저지 럿거스 대학 정치학과에서 연구교수로 지냈으며 사회철학, 정치철학, 문화철학, 예술철학 등의 분야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최근에는 '급진자유주의의 정치철학', '영화존재론'의 기획을 학문적으로 정초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과 포스트마르크스 주의』, 『담론이론의 사회철학』, 『논쟁과 담론』, 『이성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주체개념의 비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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