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을 둘러싼 신화의 장막을 벗겨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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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을 둘러싼 신화의 장막을 벗겨내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6.28 0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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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틴의 러시아: 러시아의 굴곡진 현대사와 독재자의 탄생 | 대릴 커닝엄 글그림 | 장선하 옮김 | 어크로스 | 168쪽

 

2차 세계대전 후 레닌그라드의 허름한 공동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성마른 불량아에서 KGB의 여러 직급을 거치며 성장해 마침내 전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권력가로 등극한 독재자 블라디미르 푸틴에 관한 이야기다. 냉전 말기의 개혁개방, 소련 해체 후의 정경유착, 21세기 지정학적 분쟁 등 러시아의 굴곡진 현대사를 타고 푸틴이 무소불위의 독재자로 등극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전쟁, 암살, 테러, 사이버 공격, 자금 세탁 등 푸틴을 둘러싼 갖가지 스캔들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저자인 대릴 커닝엄은 영국의 그래픽 저널리스트로, 파괴적 인물들이 세상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을 폭넓은 자료 조사와 대담하고 간결한 묘사를 통해 밝혀왔다. “복잡한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평가에 걸맞게 이 책에서도 푸틴에 얽힌 무수한 의혹과 주변국과의 분쟁들을 두루 조망하며 2022년 현재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의 초상을 간결하고 신랄하게 그려냈다. 

커닝엄은 푸틴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용의주도한 인물이 아니라 과대망상에 빠진 독재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푸틴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조장하며 그를 막아서지 못하게 하는 해묵은 신화를 낱낱이 벗겨내고 그의 실체를 파헤치는 책이다.

1952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푸틴은 KGB가 되길 꿈꾸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KGB 요원이 되어서는 동독 드레스덴에 파견되어 비밀경찰 슈타지와 러시아 사이의 연락책으로 일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상황에서 푸틴의 지위는 상승하기 시작한다. 푸틴은 퇴임 후 자신을 지켜줄 후임자를 찾던 보리스 옐친의 눈에 들어 1999년 대통령 권한대행에 지명되었고, 2000년 러시아 대통령에 오른다.

이처럼 이 책은 푸틴의 권력 쟁취 과정을 추적하는 한편, 그가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벌인 일들을 함께 조명한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의 신흥 재벌(올리가르히)들을 숙청한 일이 그중 하나다. 아울러 2004년 베슬란 학교 테러 참사나 2014년 크름반도(크림반도) 합병 등 국내외 사건을 바탕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린 사례, 이민자와 동성애자 혐오 정서를 부추긴 사례도 짚는다. 독재자가 권력 연장을 위해 독재의 토양을 다지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푸틴의 영향력은 러시아 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2006년 런던에서 벌어진 알렉산더 리트비넨코 독살 사건(일명 ‘방사능 홍차 사건’), 2016년 미국 대선을 둘러싼 러시아 개입 의혹, 2018년 솔즈베리 독살 시도 사건 등이 조목조목 다루어진다. 정적들의 입은 틀어막고 자신과 결탁할 세력은 키우기 위해 푸틴이 벌였다고 추측되는 무법적 행위들이다.

 

해외를 통한 막대한 규모의 자금 세탁도 이 책이 파고드는 이슈다. 저자는 지난 수십 년간 러시아의 돈이 서구권으로 흘러들어 사업가와 정치인을 매수하고, 정치 체계를 교란했으며, 독재주의의 발흥을 지원했다고 비판한다. 푸틴이 전 세계 악당들을 후원하여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으며, 그의 성공이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푸틴이 주변국과 벌이는 전쟁이 막대한 피해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크름반도 합병 이후 끊임없이 내홍에 시달려왔고, 조지아의 남오세티야 주민 수천 명은 전쟁의 여파로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시리아에서는 화학무기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된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2020년 푸틴은 헌법 개정을 통해 2036년까지 집권 연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같은 해 연말에는 러시아의 대통령과 가족들에게 평생 형사고발 대상에서 제외되는 면책권을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심판받지 않는 권력을 점차 손에 넣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서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옛 소련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라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침공 직후 새로 쓴 서문에서 저자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푸틴이란 인물에 대해 그동안 잘못 판단해온 것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왔다고 통렬히 지적한다. 푸틴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고 계산적인 인물이 아니라 망상가, 독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푸틴을 둘러싼 여러 파렴치한 스캔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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