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사회통합의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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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사회통합의 정치사상’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6.27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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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_ 한국정치사상학회·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공동학술회의

 

한국정치사상학회(회장 안외순 한서대 교수)는 지난 6월 18일(토) 서울대학교 종합교육연구동 201호에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과 공동주최로 <동서양 사회통합의 정치사상>를 주제로 한 공동학술회의를 개최했다.

김범수 서울대 교수의 사회로 제1부에서는 유불란 교수(서강대)의 “조선시대 향화인 정책과 사상: 통합 ‘시키기’와 통합 ‘되기’의 사이에서”, 김지훈 교수(서울대)의 “이민자 국가 미국은 다문화주의의 온상(溫床)이 될 수 있는가”, 임경석 교수(경기대)의 “독일통일과 동독인을 위한 사회통합 현황과 이념”이 발표됐으며, 각각에 대해 윤대식 교수(한국외대), 이국배 교수(성균관대), 오향미 교수(고려대)가 토론을 맡았다.

제2부는 박성우 서울대 교수의 사회로 심승우 교수(서울교대)가 “한국의 다문화주의와 사회통합의 과제”, 권숙도 교수(통일교육원)는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사회통합 정책과 이념”, 그리고 손민석 교수(서울과기대)가 “트랜스내셔널 이주 시대, 이방인 환대와 공생을 위한 모색”을 주제로 발표했으며, 각각에 대해 황옥자 교수(목포대), 박호성 교수(국제평화전략연구원), 조계원 교수(고려대)의 토론이 이어졌다.

 

※ 각 발표 내용의 결론부 중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제1부】

■ 제1발표: 유불란(서강대) - “조선시대 향화인 정책과 사상: 통합 ‘시키기’와 통합 ‘되기’의 사이에서”

공생이 갖는 윤리적 함의를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차이’에 대한 존중만으로 과연 효과적인 사회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이것만으로는 왜 우리가 저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지에 여전히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리고 북한 이탈주민에게 서로 함께 해야 할 필연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결국 그 밑바탕에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적 공통 가치로서 혼종적 구성 집단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근”, 즉 남・북 각자의 소아(小我) 를 아우를 한국인으로서의 대아(大我) 된 “공동 주체”로의 거듭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생이란 불가능할 터이다.

서로와의 접촉이 증대될수록 동질성보다는 ‘이질성’ 쪽을 점점 더 뚜렷하게 인지해 가고 있는 서로는, 허물어져 가는 단일민족 신화 너머의 우리 한국인으로서의 ‘공동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하면 좋은 것일까. 이 글에서는 이 같은 ‘우리 만들기’의 前史로서, 조선시대의 수세기에 걸친 ‘향화인(向化人)’ 관리정책의 긴 역사 속에서도 특히 위로부터의 공식적인 정체성 구축 시도와 그로부터 ‘황조인(皇朝人)’으로서 이데올로기화된 대상집단 스스로의 자기 정체성 구축・표방 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노정한 ‘구의사(九義士)’ 사례에 주목 한다. 구의사의 사례는, 정체성 구축이 위로부터의 전략으로서 만큼이나 아래로부터의 전략이기도 하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 해서 ‘우리’로 되는 것일까? 아마도 이를 이끄는 가장 기본적인 동인은, 남북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민족’ 같은 공동 정체성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당위성일 터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그런 정체성 확립을 위한 공식적인 기획사례는, 단지 그것을 위로부터 심는 것만으로 우리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됨’이란 그저 이러저러한 요건만 갖추면 포함시켜주는 어떤 고정된 자격 획득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정한 우리임을 끊임없이 증명해 내야 하는 실천적인, 그것도 지극히 경쟁적이기까지 한 과정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로부터 구의사 그룹의 진정한 황조 유민처럼 부여된 정체성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대항적이기도 한, 같지만 다르기도 한 각자의 무수한 정체성들로 확산되어 가는 양상마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즈음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북한 이탈주민들에서의 정체성의 다양화 그 자체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일 터이다. 하지만 그런 다양화는 우리가 됨을 향해 벌어지고 있는 분화인가? 이 점에서 영국으로의 탈남을 택한 일군의 북한 이탈주민들이 드러낸 “통일한국”이란 표현에 대한 거부감은 시사적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식 시스템으로 통일이 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남한 사람에게 북한 이탈주민이란 어떤 존재인가? 동시에 북한 이탈주민에게 남한은 무엇인가. 이렇듯 통일을 비롯해 민족이라는 기왕의 우리의식의 보루가 형해화 되어가고 있는 이때, 그런 현 상황에서 우리가 됨을 지향하게 할 기본 동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다시 던질 필요가 있다. 


■ 제2발표: 김지훈(서울대) - “이민자 국가 미국은 다문화주의의 온상(溫床)이 될 수 있는가”

듀이처럼 킹에게 중요했던 것은 연대를 통해 민주적 공동체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공동체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에 열려 있고, 서로 다른 접점을 개발하는 데 전념하며, 집단적 사고와 행동을 위한 새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정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이렇게 이민자와 소수 민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두 가지 모두는 모두가 공유하고 모두가 기여하는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공동체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러한 이상에 얼마만큼 다가와 있을까? 킹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어야 하는 과제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우리는 이러한 이상 추구가 정말로 올바른 방향인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방향이 옳다는 확신은 근대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해당한다. 인간은 ‘합리적’이기에 ‘합리적’인 방식으로 노력을 정진한다면, 우리가 다다르고자 하는 이상향에 다다를 수 있다는 ‘확신’은 근대 합리주의, 즉 계몽주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심의 다문화주의’를 통해 우리가 “긍정적인 방향의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 글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명확히 드러난다. 존 롤스(John Ralws)의 논의를 빌어 해당 글은 “합리적인 대화에서 합리적이란 협력의 공정한 조건으로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확신 하에 그 원칙들을 스스로 지킬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두가 받아들일 것으로 보는 규칙을 자신이 제시하듯이, 다른 사람이 제시하는 공정한 조건에 대해서도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의미한다”고 제시한다(김남국 2005, 104-5). 

이러한 주장과 관련해서 우리는 20세기 영국 철학자인 마이클 오크숏(Michael Oakeshott)의 염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크숏은 “이성적 판단에 따라 도덕적 이상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크게 자리 잡게”된 근대 상황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를 전한다.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 오크숏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이르고자 했던 바벨 도시 사람들이 “신과 자연(Nature)을 굴복시켜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데 걸림돌을 없애겠다는 하나의 (허황된) 이상(ideal)을 추구하는 노예가 스스로 되었다고 평가”한다. 실용주의자들, 그리고 이후에 다문화주의자들은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진실과 진리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주의’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이에 만약 우리가 비유와 실제, 그리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좀 더 신중한 태도를 지녀야 할지도 모른다. ‘심의 다문화주의’에서 전면적으로 주장하는 바도 유사하다. “사실 우리는 사안에 따라 달라질 타협의 내용을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타협에 이르는 최소한의 절차적인 규정들이다.”(김남국 2005, 103). 본고는 이러한 주장보다도 조금 더 유보적인 태도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를 오크숏의 제안을 통해 전하고자 한다. 


■ 제3발표: 임경석(경기대) - “독일통일과 동독인을 위한 사회통합 현황과 이념”

독일통일은 동·서독의 민주시민들이 주도적으로 강한 의지로 통일을 염원하고 관철하는 가운데 정치지도자들의 신속하고도 강력한 리더십의 추진력이 더해진 합작품이자 더 나아가 정치외교적인 성과로 전승국 4개국의 동의를 유도하는 가운데 평화적 합의로 이룩한 세계사적 외교과업의 사례인 점에서도 한반도 평화통일의 모델로 그 의미가 충분하다고 본다. 

특히 한반도의 무력긴장과 통일비용의 쟁점을 준비하고 단계적 해소방안을 모색하는 데에도 독일통일의 전후과정은 매우 좋은 선례를 제공한다. 한반도 통일의 주제로는 크게 1) 통일비용의 규모(시점, 통일 방식, 북한 주민의 소득 수준, 속도 등), 2) 재원조달 방식(국채발행, 세금 인상), 통일 이후 기금의 조성(관광지 입장료나 통일복권 등), 3) 사회보장 보험제도의 도입과 급료인상, 4) 정부 재정지출의 절약과 불필요한 분단 유지비용의 절약, 5) 소유권과 기업 및 국제사회의 투자유치방안 등 다양한 재정적 변수들의 준비, 6) 과거청산과 사회통합의 준비 등에도 매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더불어 한반도 통일 이후에 예상되는 북한지역의 막대한 재정지출비용의 조달문제와 합의문제 및 현실적 제반여건과도 관련해 유의할 사항인 1) 북한지역의 재정 건전성(북한의 임금과 연금수준과 남한수준의 격차 에 맞는 투자)을 높이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의 안정적이고도 변화상황에 부합하는 방향전환을 유도하며, 2) 경제규모의 지속적 확대노력을 통해 북한 주민의 일자리 창출과 소득향상을 실현하며, 3) 북한주민의 연금, 실업수당 및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비용의 지원을 위한 재원확보, 4) 북한의 도로, 항만, 주택건설, 학교, 병원 시설 등 사회간접설비의 자본투자를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방향설정, 5) 북한 이주민의 예상가능한 수용비용과 절차과정, 6) 북한의 대외부채 상환방안, 7) 통화단일화의 준비, 8)사회통합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방안제시 등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예상되고 있는 산적한 과제와 문제점을 사전 예방하는 데에도 통일독일의 사회통합의 경험 연구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제2부】

■ 제1발표: 심승우(서울교대) - “한국의 다문화주의와 사회통합의 과제”

앞으로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는 다문화 시대에 종족적·종교적 귀속감이 다르고 생활방식이 상이한 개인과 집단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정체성과 소속감을 넘어 사익이나 집단적 이해를 극복할 수 있는 공통의 정체성과 상호신뢰가 필요하기 때문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정서를 공유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헌정주의적, 민주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사회통합의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민족성 혹은 민족적 정체성을 동일적이고 획일적인 것, 고정불변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형성되어가는 진행형으로 사고해야 하며 특히 정주민 집단, 다수자 집단 내부의 성찰과 소수 집단의 포용 등을 통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미래 지향적인 민족성을 함양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종족적 주류 집단이든 새로운 인종집단이든 시민들 간 상호의존적인 공통운명체를 체감해가면서 시민들 간에 상호존중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다문화 시대의 민주적인 민족성을 재구성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가 다문화주의로 나아갈지, 동화주의 모형에서 사회통합을 추구해 갈지는 아 직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아직 이에 대해 국민적인 논의가 진지하고 광범위하며 치열 하게 전개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적 시선과 위계적 이분법의 극복은 다문 화주의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을 평등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대우해야 하는 민주주의 논리 에 의해서도 시급히 극복해야 할 과제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차별배제모형이든 동화주의 모형이든 평등주의적 다문화 사회이든, 어떤 다문화 사회를 지향할지라도, 대한민국이 인권공화국이고 민주주의 국가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권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논리를 심화, 확장시키고자 하며 불평등과 종속을 양산하는 자본주의를 순화시켜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다문화주의는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차이와 다양성의 조화와 공존 속에서도 쟁투를 통해 유기적인 연대와 유대를 성취하는 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


■ 제2발표: 권숙도(통일교육원) -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사회통합 정책과 이념”

국내 입국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착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북한이탈주민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지도 벌써 25년이 흘렀다. 하지만 이미 법이 제정될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법이 제정될 1997년 당시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며, 그동안의 수많은 남북관계의 상황변화에 따라 우리 국민들의 인식도 복잡해졌다. 또 다른 이민자들의 증가와 함께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정서와 인식도 더욱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북한 이탈주민 정착지원체계의 내용과 범위, 무엇보다도 정착지원체계의 근본목적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진정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북한이탈주민을 고려하고 그 지원정책을 마련해야 하지만 기존 지원체계는 각 분야별 재정지원, 자립지원 등에 중점을 두다보니 이러한 점에서 다소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북한이탈주민들이 우리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각종 지원정책 못지않게 우리 국민들이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갖는 인식과 태도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정착지원체계 전반을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북한이탈주민 지원체계를 전면 재점검하고, 향후 지속적으로 사회통합을 위한 북한이탈주민 지원체계의 새로운 방향을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이다.


■ 제3발표: 손민석(서울과기대) - “트랜스내셔널 이주 시대, 이방인 환대와 공생을 위한 모색”

다음은 결론을 대신하는 몇 가지 생각할 지점이다. 먼저 집합적 기억과 정서적 차원에 주목하면서 환대와 공생을 서사화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축적된 경험에서 출발하고, 관계적 맥락에서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라와 지역마다 상이하게 진화해 온 역사적·문화적 경로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요청된다. 특히 환대와 공생이라는 “관계적 가치”를 둘러싼 담론과 서사를 구축하는 데, 역사와 무관한 ‘보편적’ 합리성 규범은 오히려 그 이면에서 작동되는 권력관계를 은폐하게 될 수도 있다. 

다음으로 생각할 지점은 유럽의 정체성-근본주의자들의 포퓰리즘 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 다. 우리의 문화·정치 공론장에서도 ‘순수사회’를 꿈꾸는 ‘정체성-근본주의자’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들의 공적 수사에는 ‘순수했던 황금기’와 ‘타락한 현재’, ‘복원될 순수세계’ 서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현실세계에서 ‘순수’를 향한 단일한 의지는 타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로 이어지곤 한다. 하지만 이 세계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순수한 동질사회는 없다. 만약 동질사회가 형성되었다면 이미 폭넓은 문화적·정치적 개입이 수반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환대와 공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설적인 상황에 대한 부분이다. 이방인 환대와 공생이 요청받는 자리는 배제와 차별이 만연한 세계이다. 환대는 모든 형태의 대립을 부정한다거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배제와 맞서 투쟁하는 대립이 없다면, 또한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면, 결국 배제를 배제할 수 없게 되는 자기붕괴적인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배제와 차별에 맞서 투쟁하지 않는 한 환대와 공생의 공간은 마련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이론적 물음은 배제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정체성-근본주의자’와 공생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배제와 싸우는 ‘환대를 실천하는 이’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 문제다. 보편적 합리성 호소 이면에 은폐된 주류세력의 ‘타자화’(othering) 문제, 피해자의 권위를 앞세우지만 뒤로는 자신의 입지를 생각하는 ‘본말도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사안 자체가 단순하지 않고, 다층성·교차성·복합성을 띨 경우, 어떤 범주부터,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것인지 자체가 논쟁이 되기도 한다. 공론장 참여자들의 서로 다른 ‘자리매김’(positionality)으로 야기된 편파성 및 한계는 판단을 어렵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다.

네 번째로 타자를 배제하는 정체성-근본주의자들과의 투쟁이 다른 형태의 타자 배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배제와 관련해서 정치신학자 볼프는 ‘구별’(differentiation)과 ‘배제’(exclusion)를 구분하고, 적절한 ‘판단’(judgment)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볼프는 정당한 ‘구별’과 부당한 ‘배제’가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적절하게 판단할 것을 요청한다. 

다섯 번째로, 다원화된 민주주의 세계에서 환대와 공생을 모색하기 위해 건강한 결사체(공동체, association)의 역할을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보편적 합리성 규범성에 과도하게 치우칠 경우, 국가와 개인을 매개할 수 있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다. 사회 통합 담론이 법·제도 차원을 넘어 “어떻게 정착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결사체 역할이 중요해진다. 풀뿌리 차원에서 환대의 공간을 마련하는 건강한 결사체들이 활성화된다면 극단주의적인 종교정치 포퓰리즘에 휘말리지 않는 다른 길을 내는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섯 번째로, 이민자 쟁점은 국경 혹은 국외의 문제를 초과해서, 국내 시민적 자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이방인과 난민들을 대상으로 타자를 배척하는 ‘면역학적 사고방식’은 점차 내부로 침투해 들어온다. ‘외부’와 ‘내부’는 연결되어 있다. 이민자 통제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한 국경/국외 문제를 초과한다. 그것은 국내에 들어온 이민자의 생활을 규제하고 감시, 관리 감독하는 체제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끝으로 ‘이방인 문제[물음]’(Question d’étranger)에는 다층적 차원이 존재한다. 현실정치에서 쟁점이 되는 난민이나, 이주노동자, 국내로 유입한 외국인과 관련된 문제를 의미할 수도 있고, 타자성에 대한 탐구로서 이방인 문제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고 벤하비브가 지적한 것처럼 “이방인이 ‘우리 인민’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이방인 됨’ 혹은 타자성이라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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