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현대』로서 내딛는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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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현대』로서 내딛는 한 걸음
  • 이일수 군산대·영문학
  • 승인 2022.06.2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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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액체 현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필로소픽, 420쪽, 2022.04)

 

2017년 작고한 사회학자 바우만의 생애는 그의 대표 저서 『액체 현대』에 담긴 주제들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바로 그 변경적 가능성이다. 그는 폴란드의 유대계 출신으로 젊은 시절 사회학과 철학 공부를 했고 인종적 이슈로 인해 자신의 조국 폴란드로부터 추방된 뒤 이스라엘을 거쳐 영국에 영구 정착하여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연구자로 여생을 보냈다. 

그가 태어난 폴란드의 근대는 마치 한국의 근대처럼 주변 강국들에 둘러싸인 채 끊임없는 국가 간 권력관계의 역학과 파동에 시달린 측면이 있다. 또한 유대인이라는 그의 자전적 배경은 유럽 내 인종적 권력 지형에서 주변인으로 분류되어온 집단의 운명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촉발했을 법도 하다. 그래서일까. 국가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주변성”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을 가진 학자로서 바우만은 2012년 발간된 개정판 『액체 현대』를 통해 국가, 민족, 인종에 그치지 않고 시공간 같은 근대적 발명품들까지 덧대어져 치밀하게 설계된 전 지구적 시스템과 그 속에서의 개인의 삶을 찬찬히 해부해 들어간다. 그 시스템을 관통하는 핵심은 자본의 새로운 액체화된 속성이다. 이제 자본은 오늘날을 사는 모든 남녀 개개인들을 휘감아 도는, 마치 거대하고도 단일한 보편 질서의 소용돌이처럼 그간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용해한다. 

바우만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액체 현대” 개념은 우리가 눈치 챌 수 있듯이 마르크스가 근대성의 본질을 사유하면서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사라진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라고 선언했던 바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선언이 있었던 19세기 상황에서 “견고한 것들”이란 왕정과 신분제, 이에 기초한 토지 독점/세습 등 구체제 삶의 제반 양식이겠다. 그 19세기적 견고체들은 세계 각 지역의 시민 혁명과 기술적 진보의 힘을 빌어 용해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봉건적, 전근대적 견고체들을 녹여 없앤 바로 그 “고체 근대”가 다시금 거대한 힘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우만의 흥미로운 통찰 지점이 여기 있다. 현 시기는 “고체 근대”가 모든 것을 완전히 해체해버릴 것으로 기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러하지 못하다는 실망, 그리고 어디까지 해체해야 할지,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총체적 방향감각 상실의 결과가 빚어낸 “액체 현대”적 특성을 띤다고 본 점에서 그러하다. 

이채롭게도 바우만은 사회학자이면서도 동시대의 서구 철학자들과 깊은 맥락에서 만나기도 한다. 자본 중심적 세계에서의 소비와 노동을 설명할 때는 엄격한 비판 경제학의 사고를 드러내지만 21세기 현대의 개인들의 삶에 수시로 찾아드는 불안과 상실감의 기저를 파고들 때는, 그것이 반드시 자본의 위력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개개인의 무의식과 욕망의 예측 불가능한 개입이기도 한 측면을 소상히 살펴본다.

                              지그문트 바우만
                           지그문트 바우만

저자의 삶과 그의 저서의 또 다른 유사성은 그 명백한 융합성이다. 사회학, 정치철학, 심리학 등 제반 사회과학 및 인문학적 분야를 아우르는 그의 논의는 너나 할 것 없는 현대 개개인들의 일상생활을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을 다학제 간 접근을 통해 망라하려는 시도이다. 개인 내면의 고독과 불안을 다룰 때는 인문학, 빈부격차와 노동의 소외를 다룰 때는 경제학, 다인종 사회와 이민자, 지역 분쟁을 다룰 때는 정치학, 강박적 소비로 우리를 증명해야 한다고 느끼는 압박감, 수치화되고 표준화되길 종용당하는 우리의 신체, 우리가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하는 스마트폰의 전파 기반 네트워킹을 다룰 때는 정신분석학과 인류학이 자유롭게 그의 지면을 드나들며 현재 우리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규명하려는 지적 협업을 하는 듯하다. 

요약컨대, 이 책은 자본의 전 지구적 지배 양상을 근심 어린 시선으로 분석해온 서구 사회의 석학들의 연구 성과가 성실히 정리되어있는 한편으로, 자신의 삶에서,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 속에서 박탈을 감지하는 모든 독자들에게는 일회적 지적 자극을 넘어서는 기나긴 공부 길의 이정표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특히나 개개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능력에 따른 비교우위를 제외하고는 자신을 온전히 증명하고 충족감을 느끼기 어렵게 된 우리 사회의 현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주변인 내지는 변경인이 될 수밖에 없게끔 전 지구적 현상으로 작동 중인 액체 현대의 범람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게 되는 것, 그 출발점을 이 책이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일수 군산대·영문학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군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미소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Trespassing on Human Individuality in the State of Exception in D. H. Lawrence’s “The Prussian Officer”〉, 〈헨리 제임스의 《나사 돌리기》에서 읽는 판타지의 비결정성〉이 있으며, 소설 《덧없는 환영들》을 번역했고, 《영미문화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공간, 윤리, 권력》을 공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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