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평등·박애라는 위대한 혁명 이념에 감추어진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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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평등·박애라는 위대한 혁명 이념에 감추어진 폭력성
  • 김응종 충남대 명예교수·프랑스사
  • 승인 2022.06.26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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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김응종 지음, 푸른역사, 644쪽, 2022.05)

 

필자가 애초에 정한 제목은 ‘혁명과 폭력 – 다시 생각하는 프랑스혁명’이었다. 자유·평등·박애라는 위대한 혁명 이념에만 환호할 뿐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혁명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정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의 프랑스혁명사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균형 잡힌 인식을 모색하려는 의도였다. 프랑스혁명을 설명하는 유력한 해석으로는 정통해석(마르크스주의 해석, 사회경제적 해석이라고도 볼 수 있다)과 수정해석(자유주의적 해석, 정치적 해석이라고도 볼 수 있다)이 있는데,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나 대학교재 등에 기술된 해석은 정통해석에 가깝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에 수정해석이 등장하여 오늘날에는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한 데 반해 한국에서는 여전히 정통해석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정통을 숭배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전통적인 교조주의 풍조가 여기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출판사 편집자는 ‘혁명과 폭력’이라는 제목이 너무나 강해 감당할 수 없다며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이라는 제목을 제안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출판사 편집자가 망설인 구체적인 이유는 이 책의 주요 예상 고객인 역사교사들이 대체로 진보적이어서 수정해석을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출판사 편집자의 이야기도 결국 한국의 프랑스혁명사 이해 수준이 정통해석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 생각에 역사교사들이 이념적으로나 본능적으로 수정해석을 거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혁명사 지식이라는 것은 혁명사 연구자들이 선택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그 혁명사 연구자들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구 학계의 연구 성과를 선택적으로 수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교사들이 프랑스혁명에 대한 사실적인 이야기와 다양한 이야기를 접한다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고, 그 기대는 지금도 계속된다.

결국, 역사는 무엇보다도 ‘사실’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사실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역사는 결국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고,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해석이 불과한 것이 아닌가? 라고 원론적으로 항변할 수 있지만(철학자들은 대체로 그렇게 한다) 그렇다고 ‘본래 그것이 어떠했나’를 포기하는 사람은 역사가가 아니다. 역사가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어도 사실에 접근하도록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발견된 ‘사실’을 통해 자기의 이념이나 기존 해석을 수정한다. 과학자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다가 실험 결과에 따라 가설을 수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이 나온 후 전문가 수준의 독자들은 대체로 필자의 집필 의도에 동의해주었고, 정통해석과 수정해석의 논쟁이 현재 얼마나 진화했는지 궁금해 했다. 그러나 철학을 전공하는 듯한 한 독자의 반응은 필자의 논의가 식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헤겔의 프랑스혁명 해석 그리고 거기에 대한 지젝의 해석 같은 ‘논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역사학적인 논의나 사실에는 관심도 없고 기대도 없다. 그러나 과연 헤겔식으로 프랑스혁명사의 쟁점인 공포정치는 추상적 공포이고 절대적 자유이며 이러한 공포정치가 있어야만 필연적으로 구체적 자유를 위한 공간이 열리니, 그런 점에서 공포정치는 근대정치가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자 근대정치의 원년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헤겔의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된 철학자들의 논리는 결국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의 정당화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공포정치라는 ‘반’이 있어야 구체적 자유와 근대정치라는 반(反)의 반(反) 즉 합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니, 이러한 추상적 논리를 통해서 공포정치는 역사적인 정당성과 필연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공포정치를 긍정할 수 있을까? 헤겔을 위시한 철학자들이 공포정치의 실상에 대해 알고는 있었을까? 그들은 아마도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문 정도는 조금 읽었을 테지만 공포정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반혁명파’로 낙인찍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그들은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문에서 ‘덕의 공화국’ 이야기를 보고 그가 정말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덕이 지배하는 국가를 세우려 한다고 환호했겠지만 그가 말하는 덕의 공화국이 스파르타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였다는 것을 알고서 덕의 공화국을 찬양했을까? 그들은 로베스피에르를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수사학에 속은 것이 아닐까? 필자는 이 문제를 제11장 “로베스피에르 – 혁명의 수사학”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정치가이지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를 사상가로 다루는 것은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절대적 자유니 추상적 공포니 근대국가니 하는 개념은 너무나 막연해서 역사적 이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포정치를 변호하는 역사가들은 공포정치는 존망지추에 빠진 국가를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 필요악이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의 이야기보다는 훨씬 구체적이다. 
 
필자는 역사가로서 프랑스혁명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본 것이다. 사실과 비판은 역사가의 고유 무기이다. 필자는 책의 결론부에서 공포정치의 희생자에 관해 상세히 소개했다. 공포정치는 역사의 진보에 ‘반’으로서 기능한다고 논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공포정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세어보는 것이 역사가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교과서나 대학교재에는 공포정치 기간에 50만 명이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 가운데 3만 5천 명이 처형당했다는 정도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 수치는 1년 동안의 공포정치 기간에 ‘정식’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거나 처형된 사람만을 가리킨다. 정식 처형 외에 다른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으며, 무죄로 석방된 사람들도 죽음 못지않은 고난을 당했다. 당시의 감옥은 식량부족과 각종 질병으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793년 공포정치의 희생자는 프랑스혁명기에 발생한 희생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할 때 발생한 희생자,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왕궁을 공격할 때 발생한 희생자, 1792년 9월학살 희생자, 1793년 3월 일어난 방데전쟁 중에 발생한 청군과 백군 희생자, 연방주의 반란 희생자, 슈앙 전쟁 희생자, 백색공포 희생자, 나폴레옹 전쟁 희생자를 더해야 할 것이다. 1789년에서 1800년까지의 혁명전쟁으로 40만 명, 나폴레옹 전쟁으로 백만 명, 내전과 공포정치로 60만 명, 총 200만 명의 프랑스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이 수치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사망한 프랑스인의 수와 비슷한데, 당시 인구를 감안하면 훨씬 치명적이었다.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으로 사망한 외국인은 포함하지 않았다.

공포정치로 죽은 사람들이 ‘반혁명파’였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반혁명파로 몰려서 죽었을 뿐이다. 위대한 계몽주의자이고 휴머니스트인 콩도르세도 ‘반혁명파’로 물려 죽임을 당했고 공포정치의 주역이었던 로베스피에르도 ‘반혁명파’로 몰려 처형당했으니, 혁명파니 반혁명파니 하는 구분은 권력다툼에서 승리한 자들의 자의적인 구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혁명기에 죽은 사람들이 모두 혁명에 반대해서 죽은, 그러므로 죽어 마땅한 사람은 아니었다. 혁명은 절대선이 아니었다. 혁명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여기는데 이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필자가 생뚱맞게 움베르토 에코가 위선을 고발하는 말로 책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혁명가들의 위선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자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프랑스혁명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했다. 제1부에서는 인권선언, 방데전쟁, 연방주의 반란, 슈앙 반혁명운동, 가톨릭교회의 수난, 열월정변(테르미도르 반동이라는 익숙한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정확히 공포정치 시기에 일어난 방데전쟁의 참상은 이 책의 집필 계기였다. 방데전쟁은 어리석은 농민들이 반동적인 사제들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반혁명전쟁으로 매도될 수 없다. 내전은 보복의 악순환이지만 혁명정부의 보복은 과도한 ‘국가폭력’이었다. 정확한 희생자 수를 알 수는 없지만 20만 명의 방데인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프랑스 역사가들 가운데에는 그 국가폭력을 ‘제노사이드’라고 단죄하는 사람도 있다. 나치가 자행한 제노사이드의 전조를 보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하며 혁명의 주도세력인 자코뱅에게서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견한 바 있다. 헤겔이 방데전쟁의 참상을 알았다면 그것을 그저 진보를 위한 ‘반’ 정도로 넘기지 않았을 것이며, 프랑스혁명에 대해 다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공포정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공포정치의 주역인 로베스피에르를 단죄하는 것은 반혁명파나 기회주의자나 배신자 등으로 폄하되어온 다른 주요 혁명가들을 재심하는 것이다. 필자는 책의 제2부에서 라파예트 후작, 시에예스 신부, 콩도르세,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 코르데 같은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라파예트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공화주의 사상을 가진 혁명가였으면서도 파리 국민방위대장으로서 ‘혁명과 질서’를 조화시키는 불가능한 일을 수행하다가 결국 혁명이 과격화되면서 프랑스를 탈출하다 오스트리아군에 붙잡혀 오스트리아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나폴레옹에 의해서 풀려난 인물이다. 그의 별명은 ‘두 세계의 영웅’이었다. 라파예트를 그저 배신자라고만 볼 수 있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당통에 대한 평가도 간단하지 않다. 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이지만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로베스피에르에 반대했다가 처형당한 인물이다. 구국의 영웅인가 부패한 기회주의자인가? 과거처럼 로베스피에르를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다른 모습이 보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로베스피에르보다 당통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마지막으로 제3부에서는 혁명에 대한 여러 해석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통해석을 대변하는 알베르 소불과 장클레망 마르탱의 해석, 수정해석을 대변하는 프랑수아 퓌레의 해석 외에도 버크와 페인의 논쟁, 미슐레의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 한나 아렌트의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 비교 등을 소개했다. 정통해석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의 해석이고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념에 갇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알베르 소불과 장클레망 마르탱의 혁명 해석에 대해서는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비판해보았다.

한국에서의 프랑스혁명 이해는 편향적이고 편중적이다. 정통주의 해석과 로베스피에르 중심에서 벗어나 다양한 해석과 여러 혁명가들에 대해 조명하고, 자유·평등·박애라는 위대한 혁명 이념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혁명의 폭력성에도 시선을 돌려, 혁명사에 대한 왜곡과 편견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혁명사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에서도 프랑스혁명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김응종 충남대 명예교수·프랑스사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후 프랑스 낭트대학교에서 석사, 프랑스 프랑쉬콩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장, 인문대학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아날학파》,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관용의 역사》, 역서로는 《프랑스혁명사》, 《유럽은 어떻게 관용사회가 되었나》,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의 회고록》, 이외 다수의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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