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의 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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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학점제’의 정치경제학
  • 조상식 동국대·교육학
  • 승인 202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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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현 정부의 중요한 교육정책들 중의 하나가 고교학점제이다. 이미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은 선도학교와 연구학교를 지정 운영하고 있다. 교육당사자들 간의 정책적 논란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으며 제도적인 도입을 위한 준비 작업이 적지 않아 2025년에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발표된 상황이다. 현재의 고등학교 교육과정 운영이 최소 졸업단위와 수업일수를 충족시키면 졸업이 가능한 형태인 반면에, 고교학점제란 ‘과목별 이수 성취기준에 도달한 학생에게 학점을 부여함으로써, 학생이 선택한 각 교과별 학점이 누적되어 설정해 놓은 최소 졸업 학점에 도달하는 학생에게 졸업을 인정하는 고등학교 교육과정’(김정빈 외, 2017)을 말한다. 이처럼 고교학점제는 현재 교육과정 편성보다 교과목 구성이 세분화되고 학생 개인별 선택권이 확대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고교학점제 도입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고교학점제가 내신의 절대평가 시행, 교사의 평가 자율권 확대, 교과서 자유선택제 및 교과서 자유발행제 도입 등과 같은 긍정적인 정책적 부수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한다. 하지만 고교학점제는 교과목의 수직적 분화(난이도에 따른 단계 구분)와 수평적 분화(교과 세분화)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으며 학생의 과목 선택이 교과군 내에서 확장되어 학생 간의 이수 단위에서 차이를 낳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교학점제는 교원 양성과 수급, 학교 및 교사 수준의 교육과정 자율 권한 규정, 교실 개량, 평가와 교수법 개발, 대학입시제도 개선, 학교 내 교육과정 코칭 프로그램 운영, 공동운영 학교 간 교육과정 조정, on-line 강좌 개발 및 제반 규정, 학생 이동 수단 제공, 공강(空講) 시간 운영 방안 등과 같이 소프트한 교육정책의 수준을 넘어서는 정책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고교학점제를 단순히 학교 수준의 교육과정 개선에만 초점을 두게 되면 특정 교육정책이 가지는 사회·문화·정치적 관련성 및 귀결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순진한 접근을 1995년 5.31 교육개혁 이후 신자유주의 흐름에서 진보정권이 겪었던 패착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미국식 교육제도로서 입학사정관제와 전문대학원 체제가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제도로 변질되고 있는 사례에서 고교학점제도 예외가 아니다. 고교학점제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고교학점제는 일반보통국민교육의 단계인 고등학교의 역할과 위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한다는 점에서 일반계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보편교양교육(general education)이 아닌 전문 과정으로 재규정한다. 학생들의 조기진로를 보장하는 고교학점제를 통해 ‘불확실한 노동시장에서 학생들의 생존 경쟁력을 높인다’는 기대는, 곧 신자유주의가 생존에 대한 불안을 활용하여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종의 자기계발 담론과 다를 바 없다. 이는 고교학점제가 자유주의적 교육과정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의미한다. 고교학점제가 교육 부문으로의 신자유주의적 침해를 가속화하는 정책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학생들에게 교과 선택권을 폭넓게 부여한다는 담론은 일견 학생의 인권과 자율성의 확대라는 보편적 가치를 수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진로 코칭 및 컨설팅이라는 새로운 사교육 시장을 창출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학생 개개인의 교육과정 설계에 가정 배경 요인이 개입하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문화자본에 따른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고착화할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고교학점제는 타 학교 수강, 지역 기관 수강, 온라인 수강 등과 같이 교육적 공간을 확대함으로써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생들 간의 관계성이 약화되고 주체들의 익명성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교학점제의 정치경제학은 푸코(M. Foucault)의 통치성(governmentality) 개념으로 그 정책 담론의 성격을 드러나게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고교학점제 담론의 징표는 신자유주의의 권력과 학습자 중심 이데올로기이다. 먼저 고교학점제라는 정책 담론에 내재된 신자유주의 권력은, 카스텔(R. Castel)의 표현대로 경제 부문의 새로운 탈정치화를 진행시키고 기존의 사회 문제를 개개인의 책임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자립을 강제하는 생명정치(biopolitics)’에 전형적인 통치기술에 가깝다. 다음으로 학습자의 자기선택권을 보장하는 고교학점제는 일종의 학습자 중심 이데올로기를 내포한다. 이는 계층 분화가 심화되고 불평등이 사회구조적으로 정착되던 시기와 중산층의 문화로서 ‘개인의 자기 책무성 역량’이 파급되는 시기가 일치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1995년 5.31 개혁안에 나타난 교육의 시장편입 선언 이후 제7차 교육과정(1997년)과 현재의 2015 개정 교육과정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학습자 중심 패러다임’은, 고교학점제가 탄생한 미국에서 중산층 가정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교육정책이었음을 방증해준다.


조상식 동국대·교육학

서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독일 괴팅겐대학교(Georg-August Uni. Goettingen)에서 석사학위(교육학과 사회학 전공)와 박사학위(교육철학 전공)를 취득하였다. 현재 동국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다르마칼리지 학부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전공분야는 교육철학/사상 분야이며, 교원정책중점연구소 소장으로서 한국 교육의 실제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현상학과 교육학』, 『윌리엄 제임스』, 『쉽게 읽는 칸트 판단력비판』, 『독일교육학의 이해』, 『근대교육의 종말』, 『이성』(근간) 『푸코, 감옥에 가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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