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시대에 왜 자본의 분석은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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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시대에 왜 자본의 분석은 사라졌는가?
  • 임영호 부산대학교·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 승인 2022.06.1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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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왜 다시 미디어 정치경제학인가』 (임영호 지음, 컬처룩, 272쪽, 2022.04)

 

1999년 대기업 사내벤처이던 한 중소업체가 네이버(컴)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당시 이 벤처기업의 중요성에 주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네이버는 정보 검색을 제공하는 IT 업체를 넘어서 한국 경제에서 시총 기준 최상위의 대기업으로 떠올랐다. 이제는 미디어 생태계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포털일 뿐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 플랫폼 기업으로 떠오른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에서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메타(페이스북)는 대표적인 기업으로서 이른바 ‘빅 파이브’(Big Five)로 통한다. 플랫폼은 전통적인 미디어의 기능을 아우르는 사회적 소통망의 핵심으로 시장 비중 면에서도 전통적 미디어를 훌쩍 넘어서는 거대 미디어 자본이다. 검색 시장에서 주변적 존재에 불과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빙(Bing)’이 거두어들이는 광고 매출액만 해도 전통적 미디어의 대표 주자격인 <뉴욕타임스>의 20배가 넘는다(2021년 기준). 플랫폼은 정보 유통 부문뿐 아니라 제품 유통, 소프트웨어, 금융 등 온갖 업종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의 근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플랫폼 자본은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학자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관심사로 부상한 것이다.

미디어 연구에서 자본의 영역을 파고든 대표적인 접근방식이자 이론적 패러다임은 미디어 정치경제학이다. 미디어 정치경제학은 1980년대라는 시대가 낳은 산물이었다. 이는 당시의 범학문적 화두이던 자본주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미디어라는 영역을 통해 구현하려 했다. 주로 소장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학문적 움직임은, 냉철한 이성보다는 열정이 앞섰다. 이러한 학문 운동이 결실을 채 맺기도 전에 열정의 시대는 빠르게 저물었다. 제도 사회주의의 붕괴와 정치 민주화와 더불어 대학에도 신자유주의적 경쟁력의 바람이 불었고,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은 점차 식어갔다. 이론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고, 플랫폼 자본의 시대 도래와 같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진단하는 성과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 책은 왜 미디어 정치경제학이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게 되었는지를 이론적 차원에서 진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 정치경제학의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시대적 과업에 걸맞은 이론적 역량을 갖출 방안을 모색한다.

그동안 미디어 정치경제학이 드러낸 난점은 미디어 상품의 특수성 문제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미디어 상품은 노동 시간에 근거한 가치 법칙을 적용하기 어려운 특수한 현상이어서 <자본론>의 분석틀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미디어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경제적 토대에 속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기능도 수행하는 상부구조의 성격도 띤다. 이 때문에 실질적인 분석에서는 추상과 구체 수준 간에, 선언적 분석과 실제 분석 수준 간에 균열이 흔히 발생했다. 국내 정치경제학의 초기에는 자본론의 가치 이론에 관한 추상적 논의에서 출발하면서도 주로 그래엄 머독이나 피터 골딩 등 영국의 경험주의적 연구 경향을 본떠 미디어 소유구조 등의 정태적 실태 분석에 주력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와 더불어 선언적이고 추상적 수준에서는 자본론에 나오는 자본의 기본도식을 표방하지만, 실제 연구에서는 편의에 따라 이데올로기 기구로 보거나 상품으로 보는 식의 가변적 틀을 적용한 것이 또 다른 예다. 

미디어의 특수성이라는 이론적 난점에 대한 임기응변적 대응은 흔히 정치경제학의 무분별한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서 다른 (문화연구의 이데올로기 분석 등의) 비판적 접근이나 다른 거시적 경제 분석(제도주의 경제사)과 차별성이 점차 희석되었다. 총체성 선언은 이러한 비체계적이고 다원론적 영역 확장에 대한 립서비스성 알리바이에 그쳤다. 이러한 문제점의 징후는 미디어 정치경제학이란 용어의 남용과 엄밀성 결여 형태로 나타났다. 미디어 정치경제학이란 용어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물론이고 단순히 비판적 문제의식, 경제적 분석, 때로는 거시적 이론 등의 의미로 연구자나 주제에 따라서 일관성 없이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자본의 운동이라는 경제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분석 틀을 개발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경향은 미디어 정치경제학이 ‘경제’ 현상 분석에 갖는 유용성에 의문을 초래하게 됐다. 

필자는 미디어 정치경제학에서 경제라는 개념은 단순히 효용과 화폐만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는 더 근본적인 차원을 전제로 삼아 출발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미디어 정치경제학은 경제 현상에 초점을 두는 비판적 접근방식으로 체계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기본적 토대는 ‘가치 법칙’에 관한 논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미디어 상품의 특수성 역시 <자본론>의 틀로서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상품 생산의 장에만 초점을 두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상품 생산-유통-소비와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자본의 순환과정 전체, 혹은 ‘자본제 생산 과정 전반’이라는 큰 틀 안에서 현상을 새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자본은 노동 투입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지만 이를 유통과정에서 판매해 화폐 형태로 전환해야만 이윤으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디어의 경제적 측면에 대한 분석은 협소하게 상품 생산의 장에서 나타나는 특정 분석에 그쳐 자본의 역동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디어 상품은 첫 카피 생산에 높은 투자가 필요하지만 추가 카피 생산에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며 무임승차자를 배제하기 어려운 ‘공공재’적 특징을 지닌다. 더구나 미디어 기업의 매출액은 상품 생산 자체보다는 유통과 마케팅 영역에 속하는 광고 매출에서 창출된다. 광고와 마케팅을 노동에 기생하는 비생산적 노동으로 규정하는 전통적 정치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한, 미디어 정치경제학은 정작 경제적 가치 창출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는 경제 이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미디어 상품의 특수성이 고질적인 난제로 부각된 이유다. 

하지만 자본재 생산 과정 전반으로 시야를 확대하면 노동을 통해 가치가 ‘생산’되고 ‘실현’되는 메커니즘을 여전히 정치경제학적 틀로써 설명할 수 있다. 즉 노동자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가치에 관한 논의뿐 아니라 특별잉여가치, 독점이윤, 지대 이론, 수용자 노동론 등 다양한 논의가 정치경제학의 틀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플랫폼 상품은 알고리즘 노동자의 노동과 수용자 기여의 합작품이지만 무료 이용의 부산물로 나온 ‘네트워크 효과’라는 지대를 통해 이윤을 실현한다. 비록 댈러스 스마이드의 ‘수용자 상품’은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디어 상품 생산과정에서 유통과 소비가 기여하는 부분에 주목해 협소한 노동 영역을 넘어 미디어 정치경제학의 시야를 넓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필자는 전통적 매체인 텔레비전 뿐 아니라 새로운 플랫폼 자본인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의 이윤 창출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다양한 개념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았다. 미디어와 플랫폼 자본은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 특이할 뿐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다. 동시에 스마이드가 시대를 앞서 간파한 대로 수용자 노동의 측면이 미디어 상품 생산과 가치 실현 과정에서 갈수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추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주로 미디어 정치경제학의 한계를 살펴보면서 앞으로 연구 방향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제시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방향 재정립은 이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다. 미디어 정치경제학이 현실과 이론 사이의 괴리에 묶여 머뭇거리는 사이에 자본주의의 현실은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현실이 절박하고 불확실할수록 이론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론이야말로 현실을 진단하고 변화시키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임영호 부산대학교·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부산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저널리즘과 문화연구, 이론의 지식사 등을 연구하고 있다. 《왜 다시 미디어 정치경제학인가》, 《학문의 장, 지식의 제도화》 등을 비롯해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도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왔다. 한국연구재단 사회과학단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중앙일보〉와 〈부산일보〉 독자위원, 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 등으로도 활동했다. 여행으로 새로운 문화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 이들 책 외에도 《유럽과 소비에트 변방 기행: 조지아 · 우크라이나 · 벨라루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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