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 만나는 마야 문명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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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만나는 마야 문명의 시작과 끝
  • 송영복 경희대·메소아메리카학
  • 승인 2022.06.1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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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디에고 데 란다 지음, 송영복 옮김,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448쪽, 2022.04)

 

우리에게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라는 빵꾸 똥꾸 같은 말이 여전히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신대륙이라니! 유럽의 앞잡이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야단법석을 칠 때 이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새로운 곳을 발견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칠천만 명 정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일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 당시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 말이다. 그 숫자의 정확성은 중요하지 않다. 하여간 이미 1492년 이전에 큰 문명을 이루었으며, 많은 사람이 복작거리고 살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Ralación de las cosa de Yucatán]은 유럽침략 이전, 그렇게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달했던 마야문명에 대한 기록이다.

유럽침략이 있기 이전 마야 사람들은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다. 천문학이나 건축 등의 분야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와 인문을 발전시켰다. 그들 고유의 문자와 문법 체계를 가지고 역사와 문화를 방대한 양의 책으로 만들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이 더 발달하고 덜 발달했다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보아 당시 유럽이나 동양에 비하여 결코 뒤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책들이 전혀 이해도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를 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 여겨져 보는 족족 불태워졌다. 마야의 책을 만들거나 보면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런 혼란의 와중에도 마야 문자로 만들어진 3권의 책이 우여곡절 끝에 유럽에서 발견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떠한 경로를 거쳐 이것들이 유럽에까지 건너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자료들을 신기하게 여긴 유럽인들이 왕실에 선물로 바친 것이 남아 있거나 스페인 사람들이 몰래 유럽에 가지고 간 것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일단 3권밖에 없으니 아쉽기 그지없다. 그나마도 훼손되어 상태가 온전하지도 않다. 근데 그런 불평을 할 여지도 없다. 몇 안 되는 마야의 책마저도 그 내용을 정확히 알기 힘드니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구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마야의 문화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것이 바로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이다. 이 책은 스페인어로 쓰여 있다. 물론 16세기 스페인어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마야문자에 비하면 불평이 궁핍해진다. 거기다가 그 내용도 풍부하고 종합적이다. 마야 정복의 역사와 주변의 지리, 원주민들의 문화, 생활, 환경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한마디로 마야문명에 관한 현장에서 쓰인 종합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마야 지역에 대한 유럽침략의 역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들을 교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앞부분에 이어, 본격적으로 마야 원주민들의 삶이 주옥같이 펼쳐진다. 집 짓는 방법, 머리를 꾸미고 옷을 입는 방식, 음식과 음료, 그림과 문신, 산업, 교역, 화폐, 농업과 종자, 수를 세는 방법, 고아들의 상속(相續)과 후견(後見), 촌장의 승계, 결혼, 이혼, 결혼식. ... 이러한 것들이 각 챕터의 제목에 등장한다. 세례방식, 인신공양, 무기, 전쟁, 간음, 살인, 도둑질 등 생활의 모습들도 하나하나 다루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까딴 여자 인디오들의 정절과 교육”이라는 장이 따로 구성되어 있고 “초상(初喪)을 치르는 방법과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라는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들의 정신세계도 놓치지 않는다. 마야 사람들이 공을 들여 연구했던 천문학과 달력에 대한 기록도 꼼꼼하다. 달력의 원리에서 시작해서 연도계산 방법과 각종 의례에 대하여 월별로 설명하고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이곳의 자연환경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땅에서 나는 것들, 물고기, 이구아나와 악어, 뱀의 종류와 독을 가진 다른 동물들, 벌과 꿀이 각각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뒤를 이어 식물, 육지와 바다의 새와 같은 내용을 적고 있다. 이 정도 되면 마야 문명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다. 

내용을 서술함에서도 단순히 사실에 대한 언급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곳 사람들 생활의 내면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들은) 신중하고, 예의가 바르며,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인심 또한 매우 후하다. 비밀이 적고, ... (본문, 244)”, 젊은이들은 노인들을 매우 존경하며 그들의 조언을 따랐다, 그래서 (노인들은) 그들이 노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들려주었고...(본문, 234)

마야 사료가 별로 없다는 점과 대비되게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은 방대하고 상세하여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그래서 마야 문명을 공부하려는 사람에서부터 인간극장 마야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까지 이 책을 읽는다. 그러니 여러 가지 면에서 1492 아메리카 대륙의 유럽 침략 이전의 문명을 말할 때 항상 따라붙는 가장 유명한 사료이자 이야기책인 것이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고 난 직후인 16세기에 가톨릭교회의 신부로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마야 원주민들에게 선교 사업을 펼쳤던 디에고 데 란다(Fray Diego de Landa)라고 하는 괴짜 신부의 작품이다. 그는 신대륙(?)을 잘 교화(?)하기 위해 이곳에 파견된 서양 종교의 선봉을 담당했다. 식민지 백성들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하기에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마야어를 배워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그는 철저히 마야의 모든 문화와 종교를 부정하고 불태워버린 사람이기도 하다. 마니Mani라는 지방에서 그가 행한 종교재판의 참혹성에 관한 이야기는 아메리카 대륙 정복사에서도 끔찍하기로 유명하다. 결국 이 책의 저자인 디에고 데 란다와 마야는 애증의 관계였다. 그러다 보니 한 인간으로서 느낀 마야에 대한 다양한 감성 또한 구석구석에 녹아 있다. 이 책이 단순히 사료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 가치를 가지는 이유이다.

이런 정도의 의미가 있다 보니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많은 나라에서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마야 지역을 여행하는 관광객에서부터 학자와 문인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인 교양서가 된 것이다.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유럽어 번역본은 이미 100여 년 전에 출간되었고 일본어판만 하더라도 1982년에 나왔다. 

마야 문명을 공부해 보겠다고 무모하게 떠난 멕시코에서 이런 의미와 역사를 가진 책을 만나게 되니 욕심이 안 날 수 없었다. 한국어본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원전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필자가 멕시코 유학을 하던 시절인 1995년이다. 그런데 16세기 스페인어의 난해함이 작업을 더디게 했다. 또한 당시의 상황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마야 문명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도 필수였다. 그러나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이어가다 보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쉼표라도 하나 찍어 보자는 생각으로 탈고를 한 것이 2014년이다. 꼬박 20년이 걸린 작업인 셈이다. 게으르고 능력 없음을 탓한다 해도 징글징글하게 지리하고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이라고들 한다. 돈만 많다고 선진국이 되는 건 아닐 거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야기만 해서는 글로벌 시대라고 하기 힘들지 않겠나. 그리스 로마신화만 읽어서는 아쉽다. 다각화니 포스트모던이니 하는 시대적인 흐름을 보아도 이제는 중심과 주변이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적인 당장의 필요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화에 대한 이해는 필수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다양한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공감이 우리의 일상에 큰 울림을 준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이 그렇게 나의,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송영복 경희대·메소아메리카학

경희대학교 스페인어학과를 졸업하고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에서 멕시코사 석사와 메소아메리카학 박사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스페인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마야문명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정리한 마야 연구서 《마야(Los Mayas)》를 출간하는 등 국내 독보적인 마야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 밖의 지은 책으로 《마야 루트》 《라틴아메리카 강의 노트》 《멕시코의 인디오》 《라틴아메리카》(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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