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자유 개념에 관한 일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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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자유 개념에 관한 일 고찰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6.19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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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강연]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8강_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실존과 자유」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첫째 섹션 ‘자유의 이념과 지향’ 제8강 조광제 대표(철학아카데미)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사르트르의 자유 개념에 관한 일 고찰


조광제 교수는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제시하는 자유에 대한 개념”을 다루며 그가 얘기한 “우리는 자유로움을 중지할 자유가 없다.”라는 하나의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명하는 데 주력한다. 이를 위해 우선 “‘자유’를 핵심 주제로” 삼고 있는 그의 1943년 출간작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말하는 존재론을 일별한 끝에 사르트르에게 자유란 “대자(對自)인 의식으로서 끊임없이 즉자(卽自)인 의식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데서, 그럼으로써 의식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무(無)로 드러내는 데서 성립한다”라고 그 핵심을 정리한다. 즉 사르트르가 자유를 “인간을 규정하는 일체의 본질에 앞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근대의 정치철학자들이 말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다.”라는 언명을 철학적으로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에 덧붙여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기에 또한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자유의 조건으로 요구되는 상황”이 “무조건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매개로 대자 또는 자유에 의해 성립된다”라고 보는 까닭에 기어이 “내가 나의 상황에 대해 절대적으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다. 

 

지난 5월 21일, 조광제 대표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8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오늘 다룰 주제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제시하는 자유에 대한 개념입니다. 사르트르는 ‘자유’에 관해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 그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자면, “우리는 자유로움을 중지할 자유가 없다.(nous ne sommes pas libres de cesser d’être libre.)”입니다. 

. . . . .

3. 

사르트르의 존재론은 그가 1943년에 출간한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자유’를 핵심 주제로 삼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존재론은 자유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4. 

사르트르의 존재론은 대체로 이원적인 개념들로 되어 있습니다. (1) 의식(la conscience)과 사물(la chose), (2) 주체(le sujet)와 대상(l’objet), (3) 대자(對自, le pour-soi)와 즉자(卽自, l’en-soi), (4) 현전(現前, la présence)과 부재(不在, l’absence) (5) 무(無, le néant)와 존재(存在, l’être), (6) 현존(現存, l’existence)과 존재, (7) 현존(現存)과 본질(本質, l’essence), (8) 결여(缺如, le manque)와 충만(充滿, le plein), (9) 부정(否定, la négation)과 긍정(肯定, l’affirmation), (10) 나(Je)인 주체 또는 자아(自我, l’ego)와 타자(타자, l’autre) 또는 타인(他人, l’autrui) 등의 개념적인 대비들이 그러합니다.

그런가 하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개념들의 계열이 있습니다. 이 계열들 역시 서로 대비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는 <의식-주체-자기 현전(自己現前, présence à soi)-대자-무-현존-결여-부정-무화(無化, la néantisation)-초월(la transcendence)-불안(l’angoisse)-자유(la liberté)>의 계열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물-대상-즉자-충만-존재-긍정-본질-결정(la détermination)>의 계열입니다.

 

5. 

출발은 의식입니다. 의식은 이미 늘 ‘자기(soi)’ 앞에 현전합니다. 의식의 이러한 존재 방식을 ‘자기에의-현전(présence à soi)’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의식은 이미 늘 자신을 마주한 이른바 ‘대자(對自)’로 존재합니다. 

그러면서 의식은 이미 늘 자기를 부정합니다. 이러한 ‘자기 부정’을 통해 의식은 본질에 의한 자기의 규정을 벗어나고 그럼으로써 ‘저 자신을 초월’합니다. 자신이 어떠어떠한 것으로 규정되는 것을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의식은 저 자신을 ‘무’로 몰아세웁니다. 이처럼 의식은 저 자신을 ‘하나의 아무것도 아닌 것(un rien)’으로 가져가는데, 이를 의식의 ‘무화 작용(無化作用, néantisation)’이라 합니다. 

‘나인 주체’는 초월 작용으로서의 부정을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성립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인 것이 아니고 아니어야 하며, 나 아닌 것이고 이어야 한다.”라는 말이 주체로서의 의식에 관한 핵심 명제로 제시됩니다. 사르트르의 존재론에서 주체는 근본적으로 자기동일성(l’identité) 즉 “나는 나다”에 따라 성립하지 않고, ‘타이성(他異性, l’alterité)’ 즉 “나는 내가 아니다”에 따라 성립합니다.

이처럼 의식이 매 순간 저 자신을 본질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을 부정하고 그리하여 매 순간 그 본질의 내용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존재함을 ‘현존한다(exister → existe)’고 말합니다. 그래서 “현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라고 말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의식이 현존하는 것을 일컬어 ‘대자존재(l’être-pour-soi)’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이 본질에 있어 전혀 규정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 자신이 본질에 있어 규정되지 않으면 부정할 대상인 자기로서의 의식도 없어지고, 따라서 그렇게 자기를 부정하고 초월하는 대자로서의 의식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본질에 있어 규정되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적인 경험에 따라 가변적인 내용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규정되는 의식 자신을 일컬어 ‘존재한다(être → est)’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즉자존재(l’être-en-soi)’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식은 대자존재와 즉자존재의 두 존재 방식을 동시에 띠면서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대자로서의 의식은 내용을 지닌 즉자로서의 의식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의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의식은 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현존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결여’로 느끼고 그 결여를 메우고자 노력합니다. 

이에 하나의 근본적인 욕망이 성립합니다. 충분히 대자적이면서도 즉자를 받아들여 완전한 충만을 이루었으면 하는 욕망입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의식이 즉자대자적이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 욕망의 실현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6. 

사르트르는 자유가 본질적인 내용으로 채워진 즉자로서의 의식 자신에 끌려가 침몰하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고 봅니다. 즉, 자유는 대자인 의식으로서 끊임없이 즉자인 의식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데서, 그럼으로써 의식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무로 드러내는 데서 성립한다고 봅니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인간을 규정하는 일체의 본질에 앞선 것임을 명시합니다. 이는 자유가 철저하게 의식의 대자적인 부정과 무화(無化)와 초월의 차원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말하자면, 사르트르는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의식인 한에서 대자적으로 현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언제나 내외부에서 주어지는 일체의 규정들을 부정하고 무화하고 초월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자유를 파악합니다. “인간 존재와 그의 자유로움에는 차이가 없다.”라는 말은 이를 압축해 표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근대의 정치철학자들이 말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다.”라는 언명을 철학적으로 달리 표현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7. 

사르트르는 “과거는 즉자에 의해 되잡히고 익사한 대자이다. 나의 본질은 과거에 있다. 이는 나의 본질의 존재적인 법칙이다.”(155, 249)라고 말합니다.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바 나의 본질을 구성하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그 본질로서의 과거를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성립한다고 여깁니다. 진정한 현존은 비록 대자가 아무것도 아닌 텅 빈 것이라 할지라도 그 대자로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데서 성립합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미래는 내가 그것일 수 없는 한에서 내가 그것이어야만 하는 것(ce que j’ai à être)이다.”라는(161, 257) 역설과 같은 말을 합니다. 사르트르는 “‘항상 미래적인 하나의 구멍(un creux toujours futur)’이 되어야 하는 것은 대자의 본성 자체다. 이 점에서, 현재에 있어서, 대자는 미래에 그것으로 되어 있을 바로 그것으로 되어버리는(devenu)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라는(163, 260) 식의 어려운 말을 덧붙입니다.

이처럼 본질로 작동하는 일체의 과거를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결여로서의 구멍에 불과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대자인 의식의 현존이고, 그 현존에서 다름 아닌 자유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현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저 유명한 말을 제시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8. 

“인간 존재와 그의 자유로움에는 차이가 없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듯이, 자유롭지 않은 자는 인간이 아님을 철학적인 표현으로 역설한 것이겠습니다. 

자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중심에 있는 무, 인간을 강제하여 존재하는 대신 스스로 자신을 만들도록 하는 무다. (...) 자유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자유는 인간의 존재, 즉 인간의 존재적인 무(néant d’être)다. (485, 208)

무가 곧 자유임을 역설합니다. 무는 의식이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대자적인 자기 부정에 의한 무화 작용에서 필연적으로 설립됩니다. 그러니까 무와 자유는 인간 존재의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 어떤 규정도, 심지어 모두가 바라는 선한 내용의 규정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데서 저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대자로서 저 자신과 거리를 둠으로써 무가 되는 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누구나 느낀다는 것입니다.

시간화는 우리가 무임으로써 객관적인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저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를 쉽게 말해 무가 우리 자신을 만들어낸다고 말합니다. 시간화가 곧 자유라는 것은, 실질로 보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뜻합니다.

9. 

그런데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인정하기를 끊임없이 거부하려 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존재에서 자신의 자유가 문제가 되는 그런 존재다.”(484/206)라고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우리 인간이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즉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유는 인간 됨의 사실이지 인간 됨의 당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우리는 자유로움을 중지할 자유가 없다.(nous ne sommes pas libres de cesser d'être libre.)”(484, 206)라고 말하고, 심지어 “자유롭다는 것, 그것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선고받은 것이다.(Etre libre, c’est être condamné à être libre.)”(164, 262)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자적인 의식으로 현존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지시한다 하겠습니다. 

사르트르 식의 존재 개념을 적용해서 말하자면, 과거는 존재하지만,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내 존재를 걸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저주받은” 상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은 끝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에서 불안(angoisse)은 자유의 존재 양식 그 자체입니다. 즉 자유로운 한에서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학적ㆍ실존철학적인 관점에서의 불안 개념은 흔히 생각하는 불안 개념과 크게 다릅니다. 사르트르는 불안을 자유와 대립하는 생명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자유와 불안이 서로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보면서 결합한 것으로 봅니다. 

생명은 여러모로 필연적인 본질과 결합해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생명 관련의 이러한 본질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하고 벗어나 초월하는 것이 곧 대자적인 의식의 필연적인 작용임을 역설하고, 거기에서 대자적인 의식이 “분비되는”바 무로서 자유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임을 역설하고, 바로 그렇게 일체의 본질을 부정하는 자유 자체가 불안하다고 역설합니다.

 

10. 

사르트르가 일체의 본질들을 벗어나고자 하는 대자로서의 의식을 자유로 본다고 누차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행위들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오로지 대자로서의 의식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이루어지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위할 때, 거기에는 동기(le motif)라든가 동인(le mobile) 그리고 목적(la fin) 그리고 목적에 대한 선택(le chiox) 등이 작동합니다. 사르트르는 동기가 객관적인 사태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동인은 주관적인 심적 사실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아 둘을 구분합니다. 그러면서 동기와 동인은 즉자적인 것으로서 대자적인 의식에 주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고 보면, 행위는 동기나 동인보다 대자적인 의식에 더욱 깊이 연결해 있다 할 것입니다. 이는 행동이 오로지 동기와 동인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함축합니다. 만약 그렇게 행위가 동기와 동인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면 대자적인 의식인바 자유는 설 자리가 없어질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그 어떤 종류의 결정론이라 할지라도 단호히 거부합니다.

이는 인간 존재 즉 인격과 동일시하는 대자적인 의식인 자유가 곧 선택임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행위함에 있어 실제로 숙고해서 결정하게 되는 여러 선택은 숙고하는 의식에 근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근본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로 숙고하는 의식이 이른바 심오한 선택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심오한 선택은 바로 대자적인 의식과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다름 아니라 자유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유와 선택은 하나이기 때문에 자유에 결정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11. 

흔히 결정론은 몸이 없이는 의식이 성립할 수 없고, 몸은 근본적으로 의식과 별개의 존재로서 의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바탕에서부터 결정하는 원인이 된다고 여기는 데서 성립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몸은 철저히 객관적인 물질적 존재로서 취급됩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몸에 관한 이러한 객관주의적인 관점을 근본적으로 거부합니다.

몸은 대자로서의 의식이 세계와 관계하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대자로서의 의식을 대타(對他, pour-autre)로서의 의식이게끔 합니다. 

현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을 때, 이는 현존이 철저하게 우연적임을 함축합니다. 그리고 현존은 대자로서의 의식에 근거해 성립합니다. 따라서 대자를 통해 확인되는 나의 존재 역시 철저하게 우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자가 갖는 그 우연성의 형식이 바로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대자가 대자인 것은 몸에 근거해서라고 해야 합니다. 이를 총괄적으로 파악하여 몸은 대자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몸은 물론 나의 몸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몸이 대자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와 동시에 대자의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사르트르는 대자로서의 의식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체의 즉자적이고 본질적인 규정들을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무를 분비할 때, 바로 그 무가 자유이고, 따라서 대자로서의 의식이 자유라고 했기에, 언뜻 보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오로지 의식 자체에서 성립하는 절대적인 것인 양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대자로서의 의식과 동일시되는 자유는 대자일 뿐인 몸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해 있고, 몸은 대자의 상황과 구분되지 않기에, 자유 역시 상황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자 또는 자유의 조건으로 요구되는 상황은 무조건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매개로 대자 또는 자유에 의해 성립된다고 해야 합니다. 상황은 근본적으로 대자인 나의 몸을 중심으로 세계로 확장되고 다시 몸으로 수렴됨으로써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자의 자유는 철저히 선택과 하나이고, 이러한 자유에 의해서만 상황이 성립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상황에 대해 절대적으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12. 

마지막으로 자유와 타인, 그리고 자유와 사랑의 문제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합니다. 사르트르에서 타인의 문제는 ‘시선(le regard)’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우선 사르트르가 그의 희곡 『닫힌 문』의 끝부분에서 등장인물 가르셍(Garcin)의 입을 빌려 절규했던 저 유명한 “지옥, 그것은 바로 타인들이다.”라는 유명한 언명을 염두에 두었으면 합니다. 나와 타인은 근본적으로 동시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입장입니다.

주시됨(être regardé), 그것은 알 수 없는 여러 평가, 특히 여러 가치 평가에 대해 부지불식간의 내가 대상으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 보여짐(être vu)은 나를, 나의 자유가 아닌 다른 하나의 자유에 대해 [즉 타인의 자유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있는 하나의 존재로 구성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나타나는 한, 우리가 우리를 ‘노예들’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306-307, 455-456)

이렇다면,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남으로써 노예로서 빼앗긴 나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 포획되는 다른 방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에서 일어나는 관계는 철저히 배타적이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시선 투쟁을 통해 결판이 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투쟁 관계는 더없이 힘겹고 고달픕니다. 이에 그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존재와 무』가 자유에 관한 존재론이라 할 정도로 자유가 중요한 주제라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랑에 관한 존재론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사랑에 관한 논의가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자유와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운위될 수 없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입장입니다. 

사랑에 빠진 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타인의 자유를, 특히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자유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런데 자신이 사랑하는 타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그 자유로써 자신을 선택해 사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예속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사랑과 자유의 관계는 그야말로 모순 감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실존과 자유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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