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새로운 혁명 윤리와 비폭력 끝장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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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새로운 혁명 윤리와 비폭력 끝장내기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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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자신을 방어하기 : 소수자들, 빼앗긴 폭력을 되찾다 | 엘자 도를랑 지음 | 윤김지영 옮김 | 그린비 | 376쪽

 

모든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는가.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비폭력만이 유일한 해답일까. 이 책은 폭력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향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수자와 비폭력, 여성과 평화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소수자의 정당성은 비폭력 반경 안에 머물 때만 비로소 확보가 가능해진다.

저자는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폭력의 활용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몰수돼 왔는지, 왜 여성들에게 비폭력을 본질화해 왔는지를 역사적 소수자 운동의 계보를 통해 설명한다. 이 책은 사회가 소수자들에게 허용하지 않아온 폭력의 활용문제를 적극 제시한다. 어떠한 몸은 스스로를 방어하며 다른 몸을 공격할 수 있지만, 또다른 몸은 자기방어의 권리조차 빼앗김으로써 권력의 불평등 구조가 유지된다.

소수자들은 심리·물리적 폭력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개념적·실천적 자원을 빼앗겨 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선량하고도 완전무결한 약자의 서사가 소수자들을 의식적인 차원은 물론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통치하는 지배술임을 폭로한다. 폭력의 체제는 소수자들에게 가만히 제자리를 지킬 것을, 분노의 포효를 그저 삼켜버릴 것을 강제함으로써 유지·강화됐다.

이 책은 정당방위가 사법·합법적 개념이자 사회적 다수의 지배 기술이라면, 자기방어는 소수자 대항의 역사와 밀접한 저항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다수에 대한 대항전술만이 아닌, 새로운 자기실천의 창조행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방어는 근육의 움직임으로부터 출발하는 가장 내밀한 신체적 변화이자 가장 강렬한 정치적 의식화이기 때문이다.

자기방어는 어떠한 위임이나 대리행위 없이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직접적으로 정치화하는 계기이다. 다시 말해, 자기방어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존재하는 법을 제창해내는 것이자 자신의 몸과 새롭게 관계를 맺고 새로운 신체 도식을 스스로 설계해내는 기획행위인 것이다.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자기방어를 전투적 실천이자 쟁투의 철학으로 구축해낸다. 저자는 여성의 폭력 활용을 통해 자신의 관점과 감각, 느끼는 바, 판단하는 바가 더 이상 부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 법을 제시한다. 또 너무나 당연시된 비폭력적 페미니스트 윤리에 문제를 제기한다. 지배받는 자가 지배하는 자에 대한 돌봄과 염려를 수행하는 것이 자연스런 애착과 관심이 아닌 강제에 의한 것임을 지적한다.

타인에 대한 돌봄과 염려가 여성의 유일한 본성이자 우월한 가치로 덕목화될 때, 정작 여성 자신의 관점과 세계는 지배하는 타자의 세계 뒤로 밀려나버린다. 돌봄노동의 의무는 타자의 욕망과 의도, 관점에 끊임없이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여성은 돌봄 노동의 무게로 인해 타자의 욕망과 관점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느끼며 해야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이를 통해, 타인에 대한 자기소진적 돌봄과 염려라는 성별노동분업은 여성 자신의 행위역량이 무엇인가에 대한 무지를 생산해내는 절차이자, 자신의 지배자에 대한 강박적 앎을 축적해내는 통치 기제임이 입증된다.

저자는 주류적 페미니스트 윤리학은 물론, 폭력에 대한 통념과도 대적하는 철학적 사유의 순간과 소수자들의 혁명적 폭력이라는 정치적 결집의 순간을 우리에게 강렬히 촉구한다. 이 불편하고도 예리한 역서는 우리가 그토록 미뤄왔던 문제들을 직면하게 함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초과하게 만든다.
 
이 책은 2018년 프란츠파농상을 수상한 저자의 대표작으로 한국에 처음 출간된다. 저자의 제자이자 페미니스트 철학자 윤김지영이 번역을 맡은 이 책은 이론적 도약을 모색하는 한국사회의 페미니즘에 새로운 사유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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