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자유와 가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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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유와 가짜 자유
  • 민경국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경제철학
  • 승인 2022.06.05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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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국 칼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 이래 자유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간결하고 분명한 언어로 자유를 35번이나 반복하면서 “자유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촉구했다. 취임사를 ‘자유선언’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유다. 통합, 정의 같은 가치를 무시했다는 등, 윤 대통령의 ‘자유론’에 대한 비판도 다양하다. 

그중에서 “시장은 자유와 폭력이라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건 만고의 진리”라는 그리고 여론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송호근 교수의 비판(“출항 고동은 우렁찼는데 중앙일보 2022. 05. 17.)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좋지 못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자유의 가치를 조롱하고 희석화할 우려 때문이다. 

그 교수가 말하는 자유가 시장의 기반이 되는 진정한 자유인가? 자유만큼 혼란에 휩싸인 말은 드물다. 그 같은 왜곡된 자유 개념의 원조와 진정한 자유 개념을 찾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현대에 그런 혼란을 불러온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를 구분하여 이를 유행시킨 이사야 벌린(I. Berlin)이다. 그는 흥미롭게도 토머스 홉스를 소환해서 소극적 자유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즉, “자유로운 사람이란 (중략) 자신의 의지로 무슨 일을 하든 방해받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장애물이 적을수록, 다시 말하면 불간섭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내 자유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이 홉스-벌린 전통의 소극적 자유 개념이다. 

우선 우리의 지성사를 보자. 자유주의의 본질은 소극적 자유이고 홉스가 이런 자유 개념을 취했다는 이유에서 그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선구자로 기술한 것이다. 이런 이해가 얼마나 왜곡된 것인가는 애덤 스미스를 홉스 및 제러미 벤담과 같은 반열에 놓고 취급하고 있는 우리의 지식인 세계가 잘 보여준다.
 

자연적 자유: 홉스와 스미스

홉스-벌린의 소극적 자유 개념은 모든 사람이 자기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의 행동에 무제한으로 간섭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홉스는 이런 상황을 “자연적 자유”라고 말한다. 자연적 자유는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진다. “자연적 자유의 방해받지 않는 무제한 행사는 폭력과 불확실성을, 다시 말하면 사회적 카오스를 야기한다.”  카오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다. 인간의 삶은 “외롭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혹하고 수명도 짧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기, 배반, 권모술수 등 그 어떤 것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용하는 반(反)사회적이었다. 

그러나 홉스적 사고는 자유와 시장에 대한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조롱이야말로 여론을 호도하여 반(反)자본주의 정서를 불러일으킨 미신이다. 경제민주화,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는 명분의 좌파정권을 등장시켰던 게 바로 그런 미신이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겪는 빈곤층 확대, 실업, 저성장, 양극화, 사회 갈등이 아닌가! 윤 대통령의 진단은 얼마나 정확한가!

억압 아닌 자유가 시장의 본질이고 민주 정부라고 해도 정부는 억압이 본질이라는 게 만고의 진리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홉스에게 개인의 자유란 국가가 수호해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개인의 자유로부터 문명, 평화 그리고 번영도 기대할 수 없고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리바이어던’과 같은 국가뿐이라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자연적 자유는 홉스의 자연상태와는 전혀 다르다. 스미스에게 자연적 자유의 시스템은 누구도 타인에 대하여 강제를 행사하지 않는 그래서 자유로운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적인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 정의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한 누구든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도록 내버려 둔다고 해도 혼란이 아니라 번영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는 것이 스미스의 탁월한 인식이었다. 

자유와 시장이 풍요로운 번영을 가져온다는 스미스의 주장을 입증하는 사례는 오늘날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의 발전사도 자유와 시장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중국이 그나마 빈곤 퇴치와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도 친(親)시장과 개방의 덕택이다. 북유럽의 번영은 복지확대가 아닌 자유시장과 낮은 세금, 도덕적 품성의 재결합 덕분이다.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고 있던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 피었다”는 윤 대통령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그럼에도 좌파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들어 윤 대통령의 자유론의 가치를 깎아내린다. “고삐 풀린 자본과 시장이 초래한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금융위기는 주택시장에 대한 정부의 잘못된 개입과 통화량을 무진장 확장한 정책 때문임에도 좌파는 책임을 자유와 시장에 떠넘긴다. 그런 비판은 자유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이는 시장이 정부보다 현명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한 결과다.

토머스 홉스는 그런 자유주의 비전을 함께 하지 못했다.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누구도 타인에게 힘을 행사하지 않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이상적 구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 존재를, 즉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확장된 시장질서가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경우 시장에는 거래파트너의 독단적인 권력을 제거하여 누구나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회피할 수 있다. 타인에 의한 강제는 제거된다. 개인들은 진정 자유롭다. 

자유로움 속에서 개인·기업이 혁신적 활동을 하면, 빈곤, 저성장, 실업, 양극화의 문제를 시장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자유론이 전제한 시장관이다. 그의 믿음에는 시장은 애덤 스미스 이래 잘 알려진 자생적 질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좌파는 시장은 갖지 않은 자에겐 억압이고 가진 자에겐 자유라고 시장을 공격한다. 


자유와 법의 관계: 홉스와 스미스 

자유와 법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자유주의 여부가 결정된다. 불간섭의 자유는 결과적으로 법은 족쇄라는 의미에서 법과 자유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로 취급되고 있다. 벌린은 법과 자유의 관계에 관한 홉스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자유로운 사람이란 자신의 의지로 무슨 일을 하든 방해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법은 일종의 족쇄다. 설령 법보다 더 무거운 사슬, 예컨대 혼돈 또는 자의적 독재의 사슬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주는 것이 법이라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홉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 “법은 자유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제러미 벤담이다. 모든 법은 침해이고 자유는 법이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법의 족쇄보다도 더 무거운 족쇄, 예를 들면 더 억압적인 법이나 관습, 혹은 자의적인 독재나 카오스로 구속당하지 않도록 법은 사람들을 보호한다고 해도 말이다. 벤담은 홉스 전통의 자유 개념으로부터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으로서 공리주의를 확립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19세기 그런 전통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는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 그는 모든 행동 제약과 똑같이 모든 법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공익을 위해서 법으로써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인물이다. 공리주의로서 20세기를 거처 21세기에도 밀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리주의란 자유가 가져다줄 편익과 피해를 산정하여 최대의 편익을 주는 방향으로 자유를 확보하는 법과 제도를 선택한다. 예를 들면 인허가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대기업의 시장진입을 허용할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시장진입이 가져올 편익과 그런 진입이 중소상공인에게 주는 피해를 산정하여 결정한다. 

그래서 프랑스 전통에서 자유의 허용 여부는 공권력에 의존한다. 이는 사실상 자유가 아니라 면제 또는 허가를 뜻한다. 자유주의 전통을 확립한 존 로크의 자연권 사상은 자유와 법은 서로 대립 관계라고 본 것은 아니었다. ‘법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는 유명한 말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시민정부론』에서 법과 자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한 의미의 법은 이익을 제약하기보다는 자유롭게 하고 현명한 개인이 자신의 개별적인 이익을 추구하도록 인도한다. (중략) 법의 목적은 자유를 없애고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확장하는 데 있다. (중략) 법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자유란 타인의 속박과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법이 없으면 그게 불가능하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을 확립했던 스미스에게 자연적 자유의 시스템은 하이에크가 말하는 자생적 질서의 대표적 예로서 시장경제다. 자생적 질서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될 사적 영역을 전제로 한다. 이는 일반·추상적 행동규칙의 성격을 지닌 법을 통해서 확립된다. 즉 법의 지배를 통해서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될 일종의 울타리를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확보하는 것이다. 홉스와는 달리 스미스의 자유관도 로크와 같이 규칙과 결부된 자유다. 그런 성격의 행동규칙이 설정한 테두리 내에서 자유롭다. 자유를 지키는 행동규칙을 정의의 규칙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홉스, 오스틴, 벤덤, 아들과 아버지 밀 등의 자유는 수단적 가치일 뿐 목적은 아니다. 그 같은 왜곡된 자유 개념에서 도출되는 법은 명령으로서의 법이다. 그런 종류의 법은 위협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다수의 합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스미스의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진정한 자유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목적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것과도 - 부(富), 분배정의, 위대한 국위(國威) - 바꿀 수 없는 가치이다. 목적으로서 자유가 주어지면 그 자유는 우리에게 빈곤·실업·양극화의 해소 등 모든 개인에게 번영을 안겨준다는 의미에서 자유는 목적이요 수단이다. 


민경국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경제철학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경제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같은 대학 경제학과 명예교수이다.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과 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사)자유주의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하이에크, 자유의 길』, 『국가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국가철학』, 『자유주의의 도덕관과 법사상』,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시장경제의 법과 질서』, 『하이에크 자유주의 사상 연구』, 『경제사상사 여행』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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