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기용 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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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용 자판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06.05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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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이번 학기에 한 대학의 교양과목 강사를 겸직하게 되었는데 그 과목 수강생 중에 농인 학생이 한 명 있다. 한국 수어를 제1언어로 쓰지만 청인(聽人)들이 쓰는 한국어로 된 글을 문제없이 읽을 수 있는 학생이라 내 수업 시간마다 그 학생 바로 옆에서 속기사 선생님이 속기를 해 주신다. 그 덕분에 속기용 자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속기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stenography’는 좁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단어 ‘στενός’를 어근으로 품고 있다. 속기에 사용하는 특수한 문자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속기용 자판이 나오면서 속기 문자 대신 한글과 로마자 표기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숙련된 속기사가 이 자판을 이용하면 말하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컴퓨터에 글자를 입력할 수 있다. 그 대신 속기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여러 글자를 동시에 입력하는 기술이다. 속기용 한글 자판은 보통 세벌식으로 만들어서 초성, 중성, 종성 키를 한꺼번에 누르게 되어 있다. 그 덕분에 글자 입력 속도를 현저하게 높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글 속기용 자판은 아직 표준화가 되지 않아서 현재 여러 종류의 자판들이 쓰이고 있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자판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자판을 만든 회사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니 속기용 자판뿐만 아니라 음성 인식 AI 같은 것도 개발하는 회사였다.

어쩌면 앞으로는 음성 인식 기술이 더 발전해서 속기를 할 필요가 없이 말소리를 글자로 정확하게 옮겨 주는 기계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기계의 음성 인식률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 이렇게 속기사들이 활약을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말에 묻어나는 뉘앙스나 감정 같은 것까지 기계가 판단해서 글자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는 일인 만큼 앞으로도 속기사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면 속기사들이 더욱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뒷받침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일단 경제적 부담부터 줄여 나가야 한다. 사진에 보이는 자판은 가격이 무려 300만 원을 넘는다고 한다. 이 비용을 합리적으로 줄일 수 있다면 속기사들의 부담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그 밖의 다른 문제들도 당국에서 잘 파악해서 속기사들이 편안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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