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의 삶을 통해 되돌아보는 해방 전후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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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의 삶을 통해 되돌아보는 해방 전후 현대사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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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박헌영 평전 | 안재성 지음 | 인문서원 | 696쪽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박헌영은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을 이끌고 월북해 김일성 체제의 북한정권 수립과 조선노동당 창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결국 미제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하고 만다.

그는 남한에서는 좌파 정당을 이끈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미 제국주의 간첩 및 국가 전복 음모’를 이유로 철처히 외면당했다. 객관적인 평가 자체가 거부돼 온 그는 세간의 평처럼 ‘적과 동지를 모두 배반한 반역자’, ‘원칙에만 빠져 현실을 보지 못하는 실패한 혁명가’였을까?

이 책은 박헌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과 광복 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꿈꿨던 남한의 공산주의 역사를 복원해 냈다. 저자는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와 증언으로 보건대, 박헌영을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거나 불세출의 영웅이라 찬양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에는 탁월했지만, 선동력과 포용력 등 대중정치가로서 필요한 정치적 수완은 거의 갖추지 못했고, 근본 성품은 온후하고 지성적이었지만 정치적 입장은 다분히 교조주의적이었다. 표범처럼 단단한 인상에 좀처럼 웃지 않는 과묵하고 비밀주의적인 성향은 지하운동의 지도자에게는 적합했을지라도 공개 정당의 지도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미국의 간첩 노릇을 했거나 비겁자인 적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박헌영은 식민지 후반기 내내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조직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돼 있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해방되자마자 그를 최고지도자로 옹립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칙적이고 교조적인 성향이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했다고 공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면모가 없었다면 애초에 공산당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요, 시대의 한계였다.
 
혁명은 그를 배신했고 몽상은 깨졌으며, 적과 동지가 모두 그를 반역자라고 불렀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의 한 명인 것도 부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식민지시대의 그는 온몸을 던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애국자였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파시즘에 맞서 민중이 주인 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보려고 애쓴 민주주의자였다.

이 책은 비운의 혁명가, 투사 박헌영을 넘어 인간 박헌영도 재조명했다. 저자는 구술자료와 인터뷰 등을 통해 박헌영의 삶과 정신세계를 복원해냈고, 이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생활인으로서의 인간적인 면모도 생생하게 담아냈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 직접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여 밥상을 차려내거나, 가벼운 농담을 하며 특유의 수줍은 듯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는 딸 비비안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버지로서의 절절한 부성애가 드러나고, 세 번째 부인 윤레나와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모습에서는 고단한 일상을 잊게 하는 작은 행복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인간 박헌영을 만나게 된다. 그가 진정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으며, 그의 일생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돌아보고, 우리 사회의 좌우 이념 대립의 사슬을 끊어내는데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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