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중미 무역과 외교, 그 애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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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중미 무역과 외교, 그 애증의 역사
  • 이화승 서울디지털대·중국사
  • 승인 2022.06.04 2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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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중국과 미국, 무역과 외교 전쟁의 역사: 개방과 배척, 패권과 공존의 100년』 (왕위안총 지음, 이화승 옮김, 행성B, 540쪽, 2022.04)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세계사적 뉴스는 중국의 부상이었다. 중국 정부는 2000년 신년사에서 21세기를 중화세기(中華世紀)라 선포하고 50년 후에는 미국을 능가하겠다는 강한 의욕을 나타냈었다. 당시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열린 문화공연이 세계로 중계되는 것을 보면서 어떤 계량화된 수치도 중국의 거대한 잠재력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토의 광활함이나 인구수, 경제력 등 단순한 수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형성된 심오한 철학, 다양한 제도와 문화에서 뿜어 나오는 역동적 에너지 그 자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복잡하고 다양한 중국 문화의 특성은 세계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중국은 연 10%이상 초유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세계 경제의 공장으로서 가성비 높은 물건들을 생산하는 한편, 높은 소비력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경제적 성장에 따라 정치적 위상도 높아지면서 점차 미국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세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패권 경쟁”, “세계 경제의 숨은 뇌관” 등으로 표현되는 날카로운 대립에 세계 각국이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2021년 중국정부는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들의 침탈을 상기하며 “중화민족이 당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대내외에 선언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불과 20여 년 만에 중국은 경외감과 신비감에서 두려움이 추가되었다. 본질은 무엇일까! 중미 양국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추적해 본다면 의외로 쉽게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다른 서구 열강에 비해 비교적 늦은 1784년에서 비로서 중국과 교역을 시작했다. 미국 상선 중국 황후호부터 시작된 대중국무역은 신흥국가의 패기를 앞세워 비단, 칠기, 차 등 우아하고 깊은 풍미의 중국 문물을 실어 날라 미국 땅에 ‘중국풍’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심각한 무역 역조 현상을 피하기 위해 아편이라는 ‘독을 품은 꽃’ 밀무역에 참가하여 많은 수익을 거두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수익은 신생 조국 미국의 번영에 건실한 기초를 제공했다. 대서양 케이블, 동서 철도 등 기초 설비는 물론 대학, 도서관, 병원 등 사회 기반 건설에 기부해서 미국인의 부에 대한 정신적 가치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인들이 “손안의 담뱃대가 천조의 꿈을 날려버렸다”거나 “아편중독으로 죽어간 수많은 중국 연혼이 내뱉은 연기가 부강하고 근대화된 미국을 건설”했다는 자조가 나오는 부분이다. 

당시 중국은 자신 중심의 세계질서라는 전통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풍우표요(風雨飄搖: 폭풍에 흔들리는 모습)’에서 ‘판상어육(板上魚肉: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이 되는 치욕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폭풍 속에서 중국은 태평천국, 동치중흥, 백일 개혁 등 내적 혼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다른 서구 열강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유지했고 중국 동남부의 빈곤에 쫒긴 중국인들이 골드 러쉬를 쫒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저렴한 임금에도 세크라멘토 델타지역 개발, 아이다 호, 몬테나 황무지 개발, 광산, 철도 건설에 뛰어들어 미국 건설에 한 축을 담당했지만 노조를 결성하자는 다른 이민자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점차 사회의 구석으로 몰리게 되었다. 미국 내전이 종식되고 군대에서 나온 백인들이 서부로 일자리를 찾아오게 되자 중국인들은 더욱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에 몰려 1882년 결국 배화법안(排華法案)이 통과되고 중미 사이 민간 교류는 단절되었다. 1943년 이 법안이 영구 폐기되었지만 1979년 정식 외교관계가 다시 시작될 때까지 양국 관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870년, 2대 중국 공사로 부임했던 프레드릭 로우(Frederick Low)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과 과제를 워싱턴에 전달한 바 있었다. “미국은 중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하였다. “중국에는 차이가 나는 많은 제도가 있다. 어떤 개괄적 묘사도 완전히 믿을 만하거나 정확하지 않다. 만약 50개의 예를 들어 하나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100개의 예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온갖 다양성으로 가득 찬 중국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그의 충고에 미국 정가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은 개혁개방, 50여 년의 중흥을 거쳐 세계무대로 돌아왔다. 오늘날 중국은 과거의 역사를 거울삼아 대국의 풍모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뚜렷이 감지되지만, 미국의 태도는 19세기 때와 크게 다르지 않고 중국 문화 본질에 대한 이해 역시 제한적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대중국 외교는 여전히 경제 논리가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죽의 장막’ 너머를 보는 시각에 변화가 없는 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양국의 마찰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한국은 양국 충돌의 최전선에 자리하고 있다. 서로의 이익에 따라 외교 정책을 바꾸고, 무역 상황에 따라 경제가 요동칠 만큼 큰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갈등은 우리의 정치, 경제, 통일, 환경,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위기와 기회 속에서 매번 선택의 순간을 마주할 것이고 갈등이 격화할수록 삼국 사이의 복잡해진 방정식을 풀기 위해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양국에게 한국은 전략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파트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응하려면 과거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서로 간의 시각과 입장을 조절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성세대와 다르다. 전쟁이나 체제·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한자를 배우지 않았지만 소통에 어려움이 없다. 반도체나 K-CULTURE 등으로 대표되는 국가적 자신감도 강점이다. 그러나 지나친 반중 정서는 우려스럽다. 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단편적인 사건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과 자신감으로 복잡한 문제를 풀어가기에 본서는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화승 서울디지털대 중국학과 교수/중국 역사학자

역사학자. 타이완 국립 사범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중국 명·청사, 상업사를 전공했다. 《중국의 고리대금업》, 《상인 이야기》 등 저서와 《중국의 상업 혁명》,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 매판》, 《성세위언》, 《중국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제국의 상점》, 《장거정 평전》, 《조총과 장부》, 《관료로 산다는 것》 등 역서가 있다.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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