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미술사의 사각지대를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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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미술사의 사각지대를 밝히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5.3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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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4 조선: 건축 불교미술 능묘조각 민속미술 | 유홍준 지음 | 눌와 | 392쪽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네 번째 권은 조선시대 건축, 불교미술, 능묘조각, 민속미술을 다룬다. 한국미술사를 교양과 상식으로서 이해하려는 일반인과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을 위한 한국미술사 입문서이다. 

이번 권의 가장 큰 특징은 그동안 미술사의 체계에서 소외되었던 분야들을 대거 부각하여 정식으로 서술하였다는 점이다. 건축 파트에서는 서울의 종묘를 시작으로 조선의 다섯 궁궐과 한양도성 등 조선왕조의 핵심적인 건축물들을 고루 다루는 것은 물론,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조선시대 관아도 집중 조명한다. 조선시대 불교미술은 그 양이 방대하고 수준도 높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의 불교미술과 비교되어, 혹은 여전히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여 미술사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 불교미술을 건축, 회화, 조각, 공예로 나누고 각각 별개의 장으로 다루어 독자들에게 심도 있게 소개한다. 조선시대 석물조각을 대표하는 장르로서 왕릉에 세워진 석인과 석수(石獸), 그 외 사대부 묘에 세워진 동자석 등 능묘조각을 다루었으며 마지막으로 민속학의 영역에서만 주로 연구되었던 장승을 미술사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실었다.

유교를 국시로 하여 건국된 조선은 새로운 수도 한양을 세우면서 건축에서도 유교 경전을 따라 종묘와 사직, 궁궐을 배치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언덕과 물줄기 같은 자연환경과 어울리게 변용하는 등 고유한 방식으로 세련시켰다. 또한 한양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의 말대로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게’ 하여 예로부터 이어진 우리 고유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종묘, 그리고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쓰였던 창덕궁이다. 조선왕조의 왕릉 또한 엄격한 격식에 따라 예를 구현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한양의 중앙 관청들을 비롯하여 각 고을의 지방 관아들은 행정실무를 맡은 것은 물론 나라의 권위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고, 이후로도 제대로 주목을 받지도 못하였다. 이 책에서는 [장용영 본영도형], 《숙천제아도》와 같은 옛 그림과 화첩을 통해 사라진 관청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지방 관아와 향교 건물들도 다루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불타버리고 말았지만 흑백사진과 《관서십경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성천 동명관의 웅장한 모습은 조선시대 건축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의 민가 건축의 대표는 서원과 양반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서원은 고유한 양식과 문화적 가치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양반주택은 생활의 지혜와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어울린 건축물이다. 또한 휴식과 풍류를 위한 공간이었던 정원과 원림, 정사, 누정과 구곡의 개념을 정리하고 대표적인 사례들을 소개하였다.

조선은 숭유억불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 불교는 억압의 대상이 되어 많은 절들이 폐사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임금들 중에서도 태조, 세종, 세조 등은 불교를 존중하였고 왕실의 여인들은 꾸준히 불교를 믿어 왔다. 특히 문정왕후 시절에는 불교가 중흥하여 고려불화의 전통을 잇는 세련된 명작들이 대거 탄생하였고 그 전후로도 불화들이 여럿 제작되어 지금도 전한다. 명종의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제작된 회암사 무차대회의 화려한 금니 불화, 채색 불화들 그리고 왕실·종친이 발원하여 그려진 [도갑사 관음32응신도], [안락국태자경변상도]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활약을 계기로 불교는 국가의 공인을 받아 여러 사찰에 중층 불전이 지어지는 등 대대적인 불사가 일어났고 불교 회화와 조각, 공예 또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수도처이자 기도처가 된 절들은 산사(山寺)라는 하나의 전형을 이루었고, 지금도 대부분의 절들은 당시의 구조와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의 불화는 고려불화와 비교해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조선불화는 귀족적인 고려불화에 비해 대중적이고 서사적인 구성과 개성을 택하였을 뿐, 그 가치나 수준이 더 낮다고 볼 수 없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감로탱과 팔상도, 시왕도 등 수많은 불화들이 여전히 각 사찰에 신앙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데 각각 그 목적에 맞는 고유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영산재 등 대규모 야외법회에서 쓰이는 괘불탱은 대부분 높이가 10미터가 넘는 대작이면서 동시에 화려함과 섬세함을 겸비하고 있어 조선불화의 대표라 할 만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7세기에는 현진, 수연, 인균, 무염 등 뛰어난 조각승들이 제각기 유파를 이루어 제자를 키우고 서로 교류하며 작품을 남겼다. 이 조각승들은 많게는 수십 명이 참여하는 공동작업을 통해 높이 5미터 전후의 대형 소조불상도 여럿 남겼다. 화려하고 섬세하기 그지없는 목각후불탱, 다채롭고 인간적인 모습을 구현한 나한상, 집체미의 절정을 보여주는 오백나한상과 천불상 등이 책에 다채롭게 소개되어 조선시대 불교조각의 성취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불교공예의 경우 여러 범종이 주조되어 한국종의 전통을 이었고, 향완과 청동운판, 금고도 여럿 전하고 있다. 또한 법고대, 업경대, 명경대, 등잔, 소대, 경장 등 예식에 쓰이고 불단을 장식하는 목조 공예품들이 있어 당대 공예의 수준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화려한 창살과 공포로 장식된 [예천 용문사 윤장대],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조각으로 가득한 수미단과 법당의 꽃창살 등은 그 정수라 할 만하다.

조선시대 석물조각의 가장 훌륭한 사례는 임금과 왕비의 무덤인 왕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릉의 주변에 세워지는 석물들은 법전에 자세한 규정이 있어 대체로 이를 따라 세워졌다. 왕릉의 앞에는 문신석과 무신석, 석마가 세워졌으며 왕릉의 둘레에는 벽사의 의미를 담아 석양과 석호가 세워졌다. 이 석물들의 조각은 시대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국초에는 간결하고 사실적인 느낌의 조각 위주였으며, 갈수록 석물의 크기는 커지고 표현 또한 과장되어 효종 때 절정에 달했다가 숙종이 석물을 간소하게 할 것을 명하여 석인들의 크기가 대폭 축소되었다. 정조 대에 조성된 장조(사도세자) 융릉의 석인들은 당대의 융성한 문화를 반영하듯 대단히 정교한 조각이 베풀어져 있다. 석인들뿐 아니라 석양, 석호, 석마 등도 각 왕릉마다 고유한 개성이 있는데, 특히 석호의 경우 얼굴 표현과 자세 등이 정형화되지 않아 우람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유머까지 느껴지는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대부 묘의 경우 왕릉보다 훨씬 간소한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무덤에 따라서는 석인과 석수의 조각이 개성 있고 뛰어난 것도 있다. 다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석물인 동자석과 시자석으로, 특히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명창 묘의 동자석은 명작이라 할 만하다. 또한 전라도와 제주도의 동자석들은 소박하고 정감 넘치는 조각으로, 과감한 평면화와 단순화로 현대 조각을 방불케 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장승은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의 결과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의 일부이다. 본래는 절 등의 경계를 표시하는 표지석 등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그러한 본래 기능에 충실하게 절 입구의 지킴이 역할을 하는 사찰장승도 있으나, 마을의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는 동제문화 등과 결합하여 신앙의 대상이 된 마을장승도 있고,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전까지는 장승은 작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익명성 등의 이유로 민속학의 영역에서 주로 다루었으나, 이 책에서는 당대 민중의 미감과 제각기 독특한 개성을 표현한 미술품으로 보아 미술사의 체제에 포함시켰다.

돌장승의 경우 편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데, [남원 실상사 돌장승]처럼 위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경우도 있지만 [상주 남장사 돌장승]처럼 분노한 민중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라 불릴 정도로 친근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주 불회사 돌장승]과 같은 사례도 있다. 또한 제주도의 돌하르방 또한 관이 참여해 제작한 돌장승의 훌륭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나무장승의 경우 파격적인 조형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기존에는 본래의 장승이 수명을 다하면 새 장승을 그 자리에 대신 세우는 식으로 명맥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 명맥이 끊어진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는 미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례로 광주(廣州) 엄미리, 부여 무량사 입구 마을의 장승 등을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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