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국경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가 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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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국경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가 태동했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5.3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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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 | 쑹녠선 지음 | 이지영·이원준 옮김 | 너머북스 | 464쪽

 

이 책은 두만강이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으로 확정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한 이후 1909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간도 협약으로 두만강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의 역사가 상세하게 복원된다. 

두만강 경계 획정의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국경을 정하는 것’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책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이 일어났던 위험한 시기에 ‘간도’라는 변경에서 서로 경쟁했던 여러 국민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주목한다. 이 지대의 땅과 인민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중국의 변경 건설 사업을 촉진했다. 한국은 국가를 잃은 상황에서 간도를 민족 결집의 상징적 공간으로 삼았으며, 일본은 식민사업을 촉발했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후기 제국(late imperial)’의 단계에서 우리가 ‘근대’라고 명명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복잡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기존의 연구가 두만강 북안의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했다면 이 책은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교류와 소통의 기억을 소환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단절하고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보는 민족국가 중심의 분절적 서사는 자칫 충돌과 대립을 필요 이상 강조하기 쉬우며, 두만강이란 변경에서 동아시아의 근대가 태동했던 그 지역사·지구사적 의의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전반부에서 수십 년에 걸친 두만강 경계 획정을 추적하고, 후반부에는 두만강 너머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과 토지를 두고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가 펼친 경쟁의 양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저자는 1880년대 조·청 국경 분쟁에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가장 안정적인 국경인 두만강과 압록강의 분계를 표시한 비석인 1712년(숙종 38년)의 백두산 정계비(중국에서는 이를 세운 청 관료 이름을 따서 ‘목극등비’라 칭한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석이 세워지고 170년도 넘어 조선인 빈농 수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 동남부의 황무지를 개간하자 이 모호함은 결국 공식적인 영토분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는 ‘간도’라 하고 중국에서는 옌볜(延邊)이라 하는 두만강 북쪽 지역의 한인 이주민에 대한 통치권이 어느 나라에 귀속되느냐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데 사안의 급박함은 러시아의 팽창과 결부되어 있었다. 즉 두만강 지역(또는 만주 전체)이 이미 몇몇 신구 강대국의 싸움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논쟁적이고 다변적인 분계강을 둘러싼 모순은 일본이 조선 통제를 확립한 뒤 만주를 식민화하려던 20세기 초에 청과 일본의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하며 장기화했다.

저자는 수십 년에 거친 국경 분쟁의 맥락을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여러 언어로 작성된 자료를 조사하여 한중일 3국의 시점에서 이 문제를 다층적으로 설명한다. 국경의 역사적 의미가 1712년의 정계비 설치에서 1885~7년의 1, 2차 조·청 국경회담, 1909년의 간도 협약까지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문제 상황을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의 맥락에서 이해하며 그 전화(轉化)와 생성의 원인을 탐구한다.

저자는 이 작은 변경지대에서 발생한 충돌과 담판, 타협에는 심각한 지역사·지구사적 의의가 담겨 있다고 했다. 두만강 국경 ‘만들기’ 과정은 바로 동아시아 삼국이 새롭게 건설되는 과정이었다. 간도 사람들이 ‘국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동아시아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 과정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도(연변)는 동아시아 근대의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이 책은 청의 ‘내지화’와 일본의 ‘식민화’, 한국의 ‘독립’이라는 세 종류의 ‘탈(脫)변경’의 각축전 속에서 국민, 국경, 국가, 영토 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등장했으며, 동아시아 3국이 모두 국가와 국민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계에서 동아시아의 근대가 창출된 것이다.

국권 피탈로 토지와 인민이 분리되고 민족과 국가가 따로 나뉘자 간도는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그들의 ‘상상된 공동체’를 건설한 공간을 제공했다. 교육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1910년대 간도는 당시의 한국 자체보다 더 ‘한국적’ 장소였다. 1919년 3월 13일 이른 아침 명동 학교와 다른 학교에서 온 학생과 교사들을 포함하여 한국인 약 2만 명이 인근 지역에서 용정으로 모여들었다. 3·1 운동이 ‘근대’라는 이름이 붙는 한국 민족주의의 시대를 출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 ‘근대’의 시대가 실제로는 한국 국경 너머 두만강 이북의 간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30년대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으로 한국과 만주의 국경이 사실상 없어졌을 때 일본인에 이은 2등 시민의 자격으로 더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었고 1940년대 초 연변에는 이미 63만 4천 명이 넘은 한국인이 터를 잡고 있었다. 만주의 한국인들은 글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국경을 초월한 사람의 집단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그들은 한국계 중국인이 되었다. 이 책은 두만강 국경이 만들어낸 중국 조선족 집단 형성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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