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공간 - 공동체/마을, 고향, 민족, 국가, 세계,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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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공간 - 공동체/마을, 고향, 민족, 국가, 세계, 우주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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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삶의 지혜 40강>_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삶의 공간 - 공동체/마을, 고향, 민족, 국가, 세계, 우주」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섯 번째 시리즈 ‘삶의 지혜’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보람 있고 성숙한 삶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이번 시리즈는 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객관적인 사실, 또 보다 넓은 사고와 관점에서 처세와 이존(以存)을 보다 확실한 삶의 사실에 이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전체 50회로 구성되어 있다. 40강 김우창 교수(고려대 명예교수)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우창 교수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협동이 필요”하다고 전제한 뒤 이때 공동체란 “커다란 정치 조직”이나 “이념적으로는 세계와 우주를 포함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또 조직으로서 사람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마을 공동체”일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마을 공동체의 특징”을 “밖으로부터 부과되는 원리나 정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서 절로 자라나오는 힘으로써” 길러낸 데서 찾을 수 있고 그 “안에서 나오는 힘은, 궁극적으로, 삶의 필요보다는 더 깊은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라는 입장 아래 바로 이 “내적인 힘을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고 밝힌다. 물론 이 모든 논의들이 재귀적으로 “인간의 현실적 필요와 요구에 연결되어 생각되어야 할 것”이라는 단서를 둔 채로. 요컨대 “삶의 공간의 다양한 존재”에 대해 언급하되 그를 넘어 “보다 큰 개념적인 차원에서 삶의 공간의 필요를 말하고 그런 다음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생각”해보는 데 이어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진 공간에 대한 언급”과 “인간 심리에 뿌리내린, 삶의 보다 넓은 구성에 대한 요구?서사적 요구에 대한 언급”을 지나 “우주 공간의 문제를 간단히 생각”해보는 데까지 이르게 되리라고 이야기한다. 

▲ 지난 1월 11일, 김우창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1월 11일, 김우창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삶과 공간의 테두리

강연의 제목에 나와 있는 것은 사람의 삶의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틀이 되는 여러 범주이다. 공동체라든가, 그 구체적인 단위로서의 마을, 거기에서 출발하여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고향, 그것을 넘어 공동체적 삶을 규정하는 추상적인 틀로서의 민족, 국가, 세계 그리고, 극히 넓은 공간을 말하는 우주와 같은 것이 그러한 틀이다.

여기의 공간은 주로 우리가 감각하거나 지각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하여, 구체적인 공간, “삶의 공간”이다. “산다”는 것은 실제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넘어 거기에 테두리가 되는 공간을 가리킨다. 사람의 삶은 이러한 지역이나 지역의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전통적 조건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리고 이것을 초월하여 세계를 생각할 수도 있다.

가장 초보적인 의미에서 사람이 사는 데에는 여러 사람들과의 연결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사람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을 말하기보다 앞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 “코이노니코 조오(koinoniko zoo)”라는 사실일 것이다. 또는 사회라는 것도 조직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연결망(連結網) 속에 산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는지 모른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협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간단하게는 사회 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회 조직은 커다란 정치 조직이 될 수도 있고, 이념적으로는 세계와 우주를 포함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또 조직으로서 사람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마을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 공동체의 특징은 공동체를 밖으로부터 부과되는 원리나 정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서 절로 자라나오는 힘으로써 길러내자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안에서 나오는 힘은, 궁극적으로, 삶의 필요보다는 더 깊은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2. 공간과 정보와 집단에 대한 요구: 생물 충동/심리적 요구

사람이 주거를 필요로 하고, 그에 따르는 공간을 요구한다고 할 때,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그것이 모든 동물이 가진 본래적인 충동에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동물 생태학자는 모든 동물의 삶의 조건으로서 “영토성(territoriality)”이 있다고 하는데, 이 영토성을 절대적인 삶의 조건으로 격상하는 용어로 “지상명령으로서의 영토성(territorial imperative)”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땅은 특별한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필요라는 관점을 넘어 지적으로도 본능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땅은 또는 사람이 땅 위에 산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깊은 정신적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많은 경우 심미적인 의식으로 표현된다.

오늘날 사람은 정보 속에 산다. 그런데 사람이 갖는 정보도 이 영토 본능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영토 본능은 호기심의 배후에 있는 본능, 그러니까 지적 본능에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정보에 민감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영토 확인의 강박에도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호기심 자체가 생존 본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포함한다. 그리하여 세계의 모든 뉴스가 우리의 삶의 영토를 이룬다. 나라 안이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경우에는 특히 원근의 문제가 중요하다. 관찰자가 서 있는 관점에서 이렇게 원근법으로 정리 조정된 정보는 보다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거기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위험과 이익의 문제이다. 사람이 세상을 대하거나 타자를 대할 때, 우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타자에게 전략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여유 있는 관점도 가능하다. 그것은 전략의 관점이 아니라 이해의 관점이다. 이해는 타자적 세계를 거리를 가지고 타자로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세계는 객관적 실체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해의 노력이나 관조의 평정 속에서 세계가 비로소 세계로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이해타산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여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어진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영토적 정언명령”은 그다음의 요구, 생물체를 둘러싸고 있는 일정한 범위의 공간의 정보에 대한 요구가 된다. 그러면서 필요한 것은 당연히 이 공간의 방어 또는 방위 조처의 필요이다. 그중에도 두드러진 것은 집단을 이룸으로써 가능해지는 양극(兩極) 방어 체제이다. 양극화된 방어 체제는 사회적 제도나 물리적 장치로도 실현되지만, 개체적이고 집단적인, 일시적이거나 정기적인 행사를 통하여서도 실현이 된다.

집단행동에서 임계하게 될 때, 즉 정해진 양식의 경계에 이를 때, 정형화된 개인과 집단의 정의(定義)는 모호한 상태에 들어간다. 우선 자아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모호해진다. 자아 정체성의 해체는 집단과의 관계 그리고 집단의 정의도 흐려지고 모호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임계 상태에서 자아는 해체되면서, 집단 속에서 일체감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자아는 그것에 일치하는 황홀경 속에서 자아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확인한다. 자아가 속한 집단도 적극적 재확인에 이른다. 이것이 여러 사회에 존재하는 축제와 기타 놀이의 의미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토적 정언명령”은 이렇게 하여 수행된다. 자아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은 집단에 참여하는 것이다. 집단에 소속하는 것만으로도 방어막이 생길 수 있다. 그리하여 여기에 확인한 집단화 의지는, 영토 본능 그리고 정보 요구에 더하여 공간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숨은 힘이라고 할 수 있다.

3. 존재론적 세계

지각과 인지(認知) 그리고 지적 차원의 동기는 삶의 세계를 생각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삶의 세계는 여러 차원에서 발원하는 동기에 의하여 결정되고, 생물체로서의 인간의 필요나 안녕 그리고 정신적 안정이 그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사람이 일정한 장소에 터를 잡고 집을 짓고 산다는 매우 구체적인 사실에 관계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 철학적 또는 존재론적 반성은 우리의 이해를 심화한다. 그것은 모든 사실적이고 사변적인 이해에 대한 기초를 제공한다. 인간 존재에 대한 심각한 반성은 결국은 초월적인 차원을 지향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반성은 존재와 우주의 신비에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반성적 탐구에서 하이데거의 생각은 기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그의 성찰은 극히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듯하면서도, 구체적인 사실-우리가 실존적으로 부딪는 사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지구 위에 산다는 것은 “거주한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주거에 기초한다. 그것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무상한] 존재로서 지구 위에 머문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거주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이 고유한 자기 존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는 이 고유성으로 하여 환경적 조건이 드러나게 되거나 실현된다고 할 수도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거주한다는 것이고, 거주한다는 것은 지구 위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또 지구 위에 거주한다는 것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거주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지속적으로 버티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지속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사람이라는 말은 “죽어가는 존재(Die Sterbliche)”로 표현된다. 하이데거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네 개의 조건 하에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조건을 “사개항((四個項 das Geviert)”이라고 옮겨보았는데, 인간 존재는 ①지구 위에 거주하고, ②하늘 아래 있고, ③죽어가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지구(die Erde)”, “하늘(der Himmel)”, “죽어가는 인간[죽게 되어 있는 인간](die Sterbliche)”이 세 조건이다. 이에 더하여, 하이데거는 “신적(神的)인 것(die Goettliche)”을 포함시키고 이것을 “죽어가는 인간”이라는 조건 앞에 놓는다. 이것은 거주한다는 것이 인간 존재의 성스러운 근본에 관계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거주는, 말할 것도 없이 일정한 지점에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 지점은 공간의 일부이다. 그 지점은 “자리(Staette, Stelle)”이고, “곳(장소, Ort)”이고 “공간(Raum)”이다. 공간은 여러 빈자리, 간격(Raueme)이고, 보다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물리학이나 수학의 개념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생각에는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에 선행하는 것이 현실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나고 체험되는 공간이다.

진리는 하이데거에게는 드러남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드러나고 사라지고?변화무쌍한 환상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계속되는 사고 속에 확인되면서, 건축으로 그리고 문화적 관습으로 형태화된다. 진리, 또는 참된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심층에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현상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드러나게 하는 것(Erscheinenlassen)”이다. 그리하여 “물을 만한 것”을 묻는 것이 드러남의 계기이다. “드러낸다”는 것은 진리를 확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남의 과정에서 다시 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드러난 진리보다 진리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떠나서는 진리가 바르게 존재하지 않는다.

4. 고향

하이데거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자연 속에 거주하는 인간-이러한 주제에 깊은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인간의 영토 본능, 집과 자연, 자연 귀의(歸依), 사람이 사는 고장?이러한 것들에 하이데거의 생각은 최종적인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가 시사하는 정신적 의미가 삶의 중요한 체험의 일부임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보다 높은 위치로 올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하이데거는 슈바르츠발트의 농가를 말하고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옛날에는, 그들이 살던 시골집을 삶의 어떤 아름다운 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집이 있던 마을도 같은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이 마을이 흔히 말하는 고향이고, 그곳의 집이 고향집이다. 대체로는 조금 더 큰 그림이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고향이나 고향의 모습은 많은 문화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고, 시의 중요한 테마가 된다.

5. 도시와 인간적 공간

고향이 사라진 것이 오늘날이다. 그것을 대체하는 인간의 거주지는 도시이다. 도시는 현대인의 삶의 공간이다. 도시화의 핵심적 추동력은 산업이고 자본이고 경제이다. 그 중심에는 기술이 있다. 기술은 새로운 문명을 형성한다. 기술이 만들어내는 것은 문명의 이기(利器)이다. 문명의 편리한 도구는 삶의 기본 조건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의 모든 것을 공리적 목적의 틀 속에 넣어 재구성, 재편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현대 도시는 도구적 필요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도시의 전부라고만 할 수는 없다. 도시는 그 나름의 인간 본성의 요구에 대응하는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의 근본에 있는 여러 다른 요인의 관점에서, 도시는 새로 형성되는 외면적 형태에 자극되어 나타나는 삶의 공간?일단은 혼란된 공간이다.

도시는 도시대로 인간의 꿈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도시가 줄 수 있는 여러 기회 때문이다. 도시는 많은 경우, 권력과 금력 그리고 사회적 명망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물론 이러한 매력도 넓게는 영토 명령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삶의 다양한 면모들이다. 지적으로 또 감성적으로, 도시의 다양성은 인간 본능 본유(本有)의 정보(情報)욕을 충족시킨다. 또 다른 효과는 다양성이 우리의 마음을 섬세화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의 내용을 충만(充滿)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가는 사람들의 또 하나의 동기는 촌락 공동체의 의무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심정일 것이다. 도시는 인간 유대의 속박이 느슨해지는 곳인데, 그러면서도 사람의 테두리는 존재하는?더 강하게 존재하는 곳이다. 이것은 “영토 명령”에 복종하여 자신의 영토를 확인하면서, 사회적 구속은 줄여보겠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동체를 떠나면서 다시 더 큰 사회로 가는 것이다. 모순된 동기의 집단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평면 지역으로의 도시는 길을 잃기 쉬운 곳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개인들이 자기 나름으로 생활 구역을 마음에 익혀 내면적 생활 지도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으로써 촌락 공동체의 핍박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사회적 연대 공간을 구성한다. 이것은 삶의 편의와 필요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사회적 교환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이 없이는 대도시의 인간들은 소외와 고독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네트워크가 절실하게 된다.

6. 민족국가와 세계

민족과 국가는 도시나 시골에 못지않게 삶의 공동체적 공간이다. 다만 그것은 지형적, 물리적 지각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실체를 느끼기 어려운 공간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라기보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그것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문화적 개념적 제재(製材)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이념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뜻한다.

민족이나 국가 의식은 우리의 삶을 튼튼하게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적이 될 만한 외부인에 대한 적대 의식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애국심을 양성하고, 더 구체적으로는, 동포애(同胞愛),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타인(他人)에 대한 배려심을 장려한다. 그러나 그 의식에 더 중요한 것은 타(他)에 대한 적대 의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의 심리는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를 수 있다. 그리하여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에 덧붙여, 이주의 경험이 일반화함으로써 서양인 사이에서는 민족과 국가를 분리하여 보는 관점이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모여, 삶의 틀로서의 민족, 국가의 힘을 완화하고, 그러한 것들을 초월하는 보편적 인간주의가 들어서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보편주의는 감성의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에서의 인간적 공감도 단순히 감성 차원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감성을 포함한다. 학문적 사고는 예로부터 세계의 모든 것을 하나로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인간의 본질, 인간성,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이러한 것들도 인간이 하나의 개념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의 공동체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현실에 있어서 감성이 아니라, 이성적인 차원에서, 보편적 인식이 필요하고, 거기에 기초한 여러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인식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은 삶의 사실적 환경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현상의 하나는 세계화이다. 그중에도 핵심에 있는 것은 세계적인 인간의 교류이다. 여기에서 일단 핵심에 있는 것은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다. 이것이 어떻게 함양되고 행동의 규칙이 되고 수정 변용되는가 하는 것은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보편적인 인간 존중이 행동 규범이 되고 격률(格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할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 보편주의이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개체적 삶이면서, 가족과 이웃과의 공동의 삶, 하이데거의 초기 저술의 용어를 빌리건대, “현존재/존재(Dasein/Sein)”이면서 “공존재(Mitsein)”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정서적 깨달음이면서,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한 번 보다 추상화되고 일반화되어 보편적 규범이 되고 법규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특히 정서적 공동체, 가족이나 이웃을 넘어서 넓은 사회를 포함하고, 특히 외래적 요소들을 포용해야 하는 사회에서, 이 직관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다시 한 번 확대되어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넓은 세계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적 위치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에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삶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일 수도 있고, 그것을 넘어가는 멀고 넓은 공간일 수도 있다. 그것은 세계가 되고 다시 우주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 여러 크기의 공간은 인간의 심성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삶의 공간은, 말하자면, “영토적 지상명령”에 의하여 삶의 조건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주 공간에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7. 우주 공간과 그 존재론적 의미

“우아한 우주”라는 말은 우주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그 원리와 법칙들이 수학적 공식에 거두어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공식의 단정함이 심미적 호소력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아함에 더하여 우주는 사람에게, 또 하나의 미적 체험, 즉 숭고함(sublime)의 체험을 준다. 그것은 거대하고 깊은 것에서 느끼는 심미적 체험이다. “숭고미”는 이성적 판단을 넘어가는 미적 현상이다. 물질의 세계에서 보게 되는 거대함, 무한대, 무한소(無限小)는 그 과학적 또는 수학적 정당성에 관계없이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여기의 감동은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미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숭고미의 의미에 대한 고찰은 공간에 거주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위상에 대한 중요한 통찰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숭고미는 큰 것, 거대한 것이 사람의 마음에 일으키는 감동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거대한 것에 대한 인간의 지적 인식이 계기가 되어 생겨나는 감동이다. 큰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무한(無限)한 것이다. 우주는 무한하다. 무한은 한이 없기 때문에 그 존재를 포괄하여 파악할 수 없다. 동시에 사람은 무한한 것을 하나로, 하나의 전체로 생각한다. 무한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 개의 개념이면서, 그것을 초월한다. 칸트의 숭고에 대한 논의도 주로 이 모순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숭고의 여러 가지 모순은 그 무한계성에 포함되어 있다. 숭고의 느낌을 주는 큰 것은 한없이 큰 것을 말한다. 크기는 수(數)로 표현될 수 있다. 수의 진행 또는 수열은 무한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모순을 포함한다. 무한한 것은 한없이 계속되는 것인 까닭에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전체성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큰 것 전체를 보고자 하는 상상력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스스로 마음 안에 그것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감동을 주는 만족감”을 얻는다. 여기에서 이 만족감이 말해주는 것은, 한편으로,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사람의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판단력이나 상상력으로는 큰 것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으로 큰 것, 전체라는 것은 대상물이 아니라 그것을 인지하는 주관과 주관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숭고의 개념이 순전히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의식으로 매개되는 이데아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은 사물을 드러내 보이는 기능을 갖는다. 숭고함이 드러내주는 것은 감각, 미, 오성의 관점에서는 혼란이지만, 이성의 관점에서는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인간의 지적 능력 속에 들어 있는 “초감각적인 능력(uebersinnliches Vermoegen)”이다. 숭고한 것은 그 거대함으로 인하여 객관적인 표상으로 표현하기가 힘든, 현상계를 넘어가는 어떤 질서의 세계를 시사하고, 이것은 대상이나 이미지로보다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 그것은 주관적 감정을 넘어서 이성의 세계의 판단 기준이 된다.

이러한 어려움과 모순은 숭고의 감정을 매우 착잡한 것이 되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대한 자연에 대한 우리의 감정 또는 감동의 문제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첫째, 주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고통 또는 불쾌(Unlust)와 쾌감(Lust)을 동시에 일으키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상상력으로 크기를 헤아려보고자 하는 심미적 판단력과 이성으로 그것을 알게 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과 모순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 전자(前者)에서 불가능한 것이 후자와의 연계에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숭고가 우리에게 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은 감각적 판단의 부적합성을 깨닫게 하는 것 자체가 쾌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쾌 불쾌, 또는 호(好) 불호 외에도 숭고는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우리의 감각적 기준의 부적절성이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하면서도 따르지 못하는 이성을 깨닫게 하고, “존경심(Achtung)”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이것은 전체성을 시사하는 대상을 향하는 것일 수 있으나, 실상은 인간 스스로가 따라야 할 “결정적 법칙/운명에 대한 존중(Achtung fuer unsere eigene Bestimmung)”이다.

8. 우주 공간, 지구의 시간, 인간의 삶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존경심을 배운다. 그것은 간단한 심미적 경험이 아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은 작고 작은 존재이다. 그러면서도 인간 정신은 우주의 거대함을 감성을 통해서, 또 오성을 통해서, 오성적 이해의 토대가 되는 이성을 통해서 접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주의 숭고함을 알고 그에 맞서는 또는 그에 포용될 수 있는 인간의 운명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한편으로, 방대한 우주에서의 인간의 존재의 작음을 알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면서도, 방대한 우주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지위를 또는 사명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겸허와 긍지를 함께 느끼게 한다. 그것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연과 무한 우주에 대한 존중으로 인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왜소함과 그로 인하여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허무감, 그리고 겸허감은 우주의 긴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인간의 역사, 생물의 역사를 살펴보면, 더욱 강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라 긍정적인 느낌을 도출한다면, 그것은 우주와 생명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런데 특히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그리고 그 왜소함과 무의미의 가능성에 대하여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지구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할 때이다.

우주에 비하여 지구는 더 작지만, 한없이 작지만, 그것도 인간 존재에 대한 허무감을 느끼게 하고 또 거대한 우주 또는 세계에서의 겸허함을 재확인하게 한다. 이러한 크기에 대한 느낌은 사람의 지각이 자신과 대상물의 비교를 무의식적으로 내포한다는 것을 말한다. 공룡은 완전히 멸종에 이른 생명체의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그것은 아무리 번창하는 생명체의 종(種)이라도 완전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이 참으로 진화의 끝자리에 있는가? 높은 지능이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인가? 환경 친화적인 삶의 형태를 가장 높게 치는 것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환경적 조건에 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조건 하에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적어도 잠시의 행복이 아니라 보다 큰 목적 그리고 보다 큰 원근법으로 볼 때, 그렇다. 환경과 그 변화에 따르는 것은 자연의 큰 원리에 승복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힘 앞에 승복하는 것이고, 스스로의 삶의 의지를 가진 인생을 포기하고 부정하는 것이고, 그 허무함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긍정적인 면을 건져내어본다면, 대자연 앞에서 겸허함을 배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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