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고 명징한 현상학 안내서: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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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고 명징한 현상학 안내서: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
  • 김동규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 승인 2022.05.28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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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현상학 입문』(단 자하비 지음, 김동규 옮김, 길, 240쪽, 2022.04)

 

약 10년 넘게 주로 대학 바깥에서 현상학을 강의하며 이 혁신적 사유를 체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다. 강의를 하면서 정성껏 현상학에 대해 소개하면서도 이 사유의 난해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분들을 볼 때마다 강의자로서의 역량 부족에 적지 않은 책임 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이렇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현상학의 주변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게 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에 나는 현상학적 사유에 입문하려는 이들이 이 사유의 핵심 주제와 매력을 더 쉽게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 줄만한 책을 내놓기로 결심했고, 이에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의 번역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저자 자하비는 국내에도 여러 권의 책이 출간되어 현상학에 관심을 둔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철학자다. 코펜하겐대와 옥스퍼드대를 오가며 전방위적으로 현상학의 사유를 전파하고, 심리철학과 심리학, 인지과학, 심지어 불교적 사유나 수행과 현상학과의 연관성을 정립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는 자하비는 <<후설의 현상학>>을 통해 후설 철학에 대한 탁월한 개관을, <<현상학적 마음>>을 통해 인지과학적 성과와 현상학과의 연관성을, <<자기와 타자>>를 통해 자기성과 타자성, 체화와 수치심 등의 정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 책들은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 독자들의 손-가까이에 주어져 있다. 최근에는 자하비가 책임 편집한 <<자아와 무아>>가 우리말로 출간되어 독자들은 현상학과 불교적 사유의 친근성과 차이 등을 접할 수도 있게 되었다.

                        단 자하비

하지만 이 책들은 대체로 전문적인 입문서 내지 연구서로 작성된 것이기에 독자들은 현상학적 사유의 초심자로서 이 사유의 드넓은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접하는 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하비의 책 이외에 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나 현재는 절판된 허버트 스피겔버그의 <<현상학적 운동 1, 2>>, 또한 최근에 한국현상학회에서 기획하여 나온 <<현상학, 현대 철학을 열다>>라는 작품 역시 현상학 이해를 위한 훌륭한 지침서다. 그럼에도 이 책들은 모두 인물 중심, 역사 중심의 서술을 한다는 점에서 그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역사적, 인물 중심적 서술은 철학을 이해할 때 반드시 필요한 철학자 자체에 대한 이해와 사유의 형성 과정 및 발전 경로를 알려준다는 이점을 갖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접근은 하나의 기획이자 사유의 방향성으로서의 현상학적 사유 전반의 향방을 보여주기에는 부적절한 측면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본서 <<현상학 입문>>은 현상학의 핵심 개념인 현상, 지향성, 세계, 상호주관성 등, 현상학이 탐구하는 주제 자체에 대한 해명에 초점을 맞춘다는 이점이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인물이나 역사에 대한 정보가 아닌 현상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총괄적으로 안내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해명이나 인물 중심적 접근은 현상학의 발전 과정에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나 인물의 독특성을 보여주기 위해 거의 필연적으로 사건과 인물 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반면, <<현상학 입문>>은 일련의 현상학자들, 특히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가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냄으로써 현상학적 기획이 집중하는 바를 오롯이 보여준다.

이런 접근의 특성 덕분에, 독자들은 본서를 읽으면서 현상학적 사유가 현상과 지향성, 지향적 체험과 주체와 대상의 지향적 상관관계를 해명하는 데서부터 그보다 더 심층적인 시간성이나 공간성, 신체성, 타자와의 공감 및 상호주관성 등의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상학적 주제에 대한 이해의 밑그림을 그려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사회성, 공동체성, 세대간적 현상학 등 비교적 최근 현상학에서 심도 있게 다뤄지는 주제도 적절한 분량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다. 바로 이렇게 현상학이 주로 중요하게 탐구하는 논의들을 안내한다는 사실 역시 바로 본서가 지닌 소중한 미덕이며, 이 논의를 따라가는 가운데 독자들은 언급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해당 주제를 현상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까지 큰 틀에서 익힐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본서가 응용 현상학 분야까지 해명하고 있다는 점은 본서를 접하는 독자들이 현상학과 관련해서 가지고 있던 갈증을 한층 더 해소해줄 것이다. 현상학적 사유는 그 특성상 비단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인지과학, 종교 및 신학 등 다방면에서 유용한 연구 방법으로 채택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각 분과학문의 현장에서 현상학적 사유를 적용하기란 초심자들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본서는 현상학적 사회학, 현상학적 심리학, 현상학적 정신의학 및 현상학적 인터뷰 등이 현상학의 발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활용되고 적용되었는지를 충실하게 안내한다. 이를 통해서 독자들은 현상학이 분과 학문에 적용되는 방식에 대한 밑그림 역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장점이 많은 책이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있는데 그것은 본서가 앙리, 레비나스, 마리옹 등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현상학의 통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가 지향하는 현상학이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에 주로 기울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자하비는 이 철학자들이 안내하는 현상학이야말로 초창기 후설의 발견을 고유한 방식으로 계승한 결실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 철학자가 견지한 철학적 방향이라는 점에서 본서의 단점이라기보다는 그 나름의 사유의 결과이자 방향이다. 실제로 앙리, 레비나스, 마리옹은 그들의 각기 고유한 사유의 경로 곳곳에서 앞서 언급한 현상학자들과는 무척이나 결을 달리하는 철학적 결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로 섞일 수 없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위 현상학자들을 포함한 현상학의 공통 기획이나 새로운 기획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한 권의 책이 더 필요할 것이며, 언젠가 그러한 책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본서의 내용에 기대어 독자들에게 한 가지 권면을 하는 것으로 본서에 대한 추천의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많은 이들이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과 같은 전통 철학의 혁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미학, 종교학, 신학 등 각종 분과 학문에서 새로운 학문적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연구의 방법으로 현상학 주변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그 높은 진입 장벽 탓에, 방법의 엄밀함에 대한 부담감 탓에 그 주변에서만 서성이다 현상학적 사유에 들어서지 못한 채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 저자는 이렇게 권한다. 

“궁극적으로 응용현상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실용적인 태도를 채택해야 하고, 그 절차가 현상학을 적용하는 방법에 대한 후설이나 메를로-퐁티의 고유한 생각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라는 데에는 너무 많은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결국 결정적인 질문은 연구나 관행이 정통 현상학으로서의 자격을 가졌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높은 질적 수준을 가졌는가다. 좋은 현상학적 연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채택된 현상학적 도구는 그 우수성을 보여주어야 하고, 가치 있는 차이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를테면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거나 더 나은 치료적 개입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개입이 전달하는 결과에 근거해 그 절차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206~07). 

그동안 우리는 현상학의 엄밀함을 강조한 나머지 현상학의 적용에서 이론적 엄밀성을 갖췄는지만을 평가하는 데 열을 올렸는지 모른다. 본서를 읽는 이들이 저자 자하비의 이런 권유에 힘을 얻고 더 적극적으로 현상학적 사유의 적용과 실천에 도전해보기를 바란다. 이 책도 바로 그런 시도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니겠는가?

 
김동규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벨기에 루뱅 대학교(KU Leuven) 신학&종교학과에서 마리옹의 계시 현상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는 『과잉에 관하여: 포화된 현상에 관한 연구』,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탈출에 관해서』, 『해석에 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시론』(공역)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공저),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공저), 『선물과 신비: 장-뤽 마리옹의 신-담론』이 있다. 현재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의 운영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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