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 시대 다원주의의 대응 - 자유, 다원주의, 상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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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실 시대 다원주의의 대응 - 자유, 다원주의, 상대주의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5.2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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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강연]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6강_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의 「자유, 다원주의, 상대주의」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첫째 섹션 ‘자유의 이념과 지향’ 제6강 서병훈 명예교수(숭실대 정치외교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탈진실 시대 다원주의의 대응 - 자유, 다원주의, 상대주의


서병훈 교수는 오늘의 현실을, “탈진실이 탈사실주의(post-factualism)를 불러일으키면서 플라톤이 비판했던 ‘욕망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으며 “진실을 외면하고 홀대하는 사회에서 확증편향이 심화되고 정치는 ‘흠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로 전락”하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바라본다. 이런 시대 진단은 “사람마다 확신에 차 자기 주장을 펴고 심지어 사실까지 왜곡하는 현실 앞에서 다원주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데, 그에 대해서는 “대표적 다원주의 이론가”라 할 “벌린(Isaiah Berlin)을 중심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한다. 다름 아닌 벌린의 다원주의가 “가치 일원론을 전면 배격하면서 동시에 상대주의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주고 있기 때문인바 “최소 보편성을 놓고 고민”하는 벌린을 따라 “경합하는 진실 중에서 진실을 선택”하는 “옹호자를 많이 늘리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오보자를 옹호자 수준으로 인도하는 것, 아니 더 현실적으로는 오도자를 최소화, 주변화(marginalize)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이야기한다. 

 

지난 5월 7일, 서병훈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문제의식

자유주의가 시대의 대세로 인정받은 지 오래지만 다원주의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다원주의(pluralism)는 여러 측면에서 자유주의와 비슷하다. 자유주의자들은 다원주의를 자유주의의 한 지파(支派) 정도로 간주한다. 그러나 다원주의자들은 두 사조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가 액면 그대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 그날로 자유주의는 문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시대의 대세는 다원주의여야 한다. 그렇다면 상대주의(relativism)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글은 탈진실의 철학적 뿌리로 ‘보편적 진실이란 없고 개개인의 작은 진실, 즉 한 시대의 문화 및 사회 세력이 형성하는 인식이 있을 뿐’이라는 상대주의를 지목한다. 많은 사람이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을 그 ‘원흉’으로 꼽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진실은 없다’는 명제로 압축될 수 있다. 진리가 허구라면 관점주의(perspectivism)밖에 남지 않는다. 관점주의가 횡행하면서 탈진실이 세계적 트렌드가 되고 있다.

이 글은 탈진실이 탈사실주의(post-factualism)를 불러일으키면서 ‘욕망의 정치’를 부추긴다고 본다. 진실을 외면하고 홀대하는 사회에서 확증편향이 심화되고 정치는 ‘흠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로 전락하기 쉽다. 그렇다고 이 시대에 가치 일원론(value monism)을 다시 불러올 수도 없다. 진실은 존재하지만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다원주의가 현실적이고 더 설득력이 있다. 문제는 그 다원적 진실을 규정하고 그 진실들 사이의 다툼을 해결할 길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이 글은 대표적 다원주의 이론가인 벌린(Isaiah Berlin)을 중심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본다. 벌린의 다원주의는 가치 일원론을 전면 배격하면서 동시에 상대주의의 한계를 넘어가고자 한다. 그는 최소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는데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2. 벌린의 다원주의

1) 벌린의 생애

벌린은 자신을 자유주의 전통을 따르는 정치 이론가로 자리매김했지만 방법론이나 내용에서 주류 자유주의자들과 이질적이었다. 보편주의(universalism)와 특수주의(particularism), 개인주의와 공동체성(communalities) 사이의 묘한 긴장 관계에 천착한 비주류(unorthodox)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다원주의 사상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 가치 일원론 비판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목적을 추구한다. 벌린은 각 개인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똑같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고, 똑같이 궁극적이며, 무엇보다도 똑같이 객관적’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벌린은 최상의 가치 중 일부는 상호 공존이 불가능하며 이것을 개념적 진실이라고 규정한다. 벌린의 다원주의는 다음 세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될 수 있다: 양립 불가능(incompatibility), 비교 불가능(incomparability), 통약 불가능(incommensurability).

벌린은 궁극적 가치나 목적들이 서로 충돌할 때 그런 갈등을 명쾌하게 정리해줄 ‘최종 진리’를 원칙적으로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어떠한 종류의 가치 일원론도 배척한다. 인간의 삶에서 다원주의가 정답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이런 이유에서 선택하는 행위가 벌린의 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등하게 궁극적인 목적들과 동등하게 절대적인 요구들’이 서로 충돌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방법은 ‘하나를 실현하면 다른 것이 불가피하게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두고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은 인간 조건의 불가피한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벌린이 선택의 자유에 그토록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는 까닭이다.

 

3) 소극적 자유

벌린의 다원주의는 그의 독특한 ‘소극적 자유론’과 그 맥이 닿아 있다. 벌린은 외부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로 간주한다. 자유를 가로막는 것의 실체를 외부의 간섭이나 방해로 한정한다면 오직 소극적 자유(negative freedom)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그는 적극적 자유(positive freedom)론을 자유의 본질에 대한 오해나 무지의 결과로 단정한다. 벌린은 적극적 자유론자들이 ‘하나의 진리’를 공통적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용납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이 서로 다른 생각을 판정해줄 단일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벌린은 적극적 자유론의 철학적 기저(基底)에 자유 자체에 대한 부정과 핍박을 정당화할 근거가 숨어 있다면서 거세게 비판한다. 소극적 자유 외에 다른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벌린은 자신의 다원론이 일정 정도 ‘소극적’ 자유를 함유한다고 설명한다. 다원론은 인간의 목적이 다양하고 그 모두가 서로 교환 가능한 것은 아니며 일부는 서로 영원한 경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더 맞다.’ 적극적 자유론은 모든 가치가 하나의 척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질 수 있으므로 조사만 제대로 하면 어떤 가치가 최고인지 확정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 그것은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보는 우리의 앎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셈인데 그런 면에서 ‘덜 인간적’이다.

벌린은 다원주의와 소극적 자유가 인간적 상황을 넘어가는 데 최선의 방책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을 넘어 유일 진리 따위에 대해 환상을 가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오만이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덕적, 정치적 미숙(未熟)’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4) 존 스튜어트 밀 비판

벌린은 밀을 아주 좋아했다. 밀이 최종성(finality)을 ‘자유의 적’으로 불신했다는 점에서 전폭 공감했다. 그러나 벌린은 밀에 일말의 의구심이 없지 않았다. 밀이 “무엇이 사람들에게 가장 깊고 가장 영원한 관심사인지에 관한 자신의 확신이 진리”라는 데 많은 것을 걸었기 때문이다. 밀이 비록 경험론에 의탁하고 있지만 그의 명제 자체는 ‘전통적 자연권 이론가들이 형이상학적 근거 위에서 옹호’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벌린은 1969년 『자유론』 서문에서 밀과 철학적 단절을 선언한다. 벌린은 자신이 가치 상대성(relativity) 문제를 다루면서 밀의 견해로 ‘귀의’했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한 오해’라고 천명한다. 벌린이 볼 때, 밀은 가치 판단 영역에서 객관적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 진리가 소통 가능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경험주의의 탈을 쓴 케케묵은 객관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밀은 개인 특유의 잠재력이나 본성을 발현하는 차원에서 선택의 중요성을 역설했는데, 벌린은 그런 완전주의적(perfectionist) 발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3. 상대주의 비판

1) 상대주의

벌린은 결정론과 상대주의라는 두 신조가 현대의 사유 세계에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우려했다. 그가 볼 때, 둘 중 어느 것도 인간 경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벌린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판단이 그저 취향(taste)에 대한 표현, 진술 또는 감정적 태도나 관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진위를 결정해줄 객관적 상관성(correlate)이 없는 주장”을 상대주의라고 규정했다.

벌린은 두 종류의 상대주의를 구별한다. 그 하나는 강한 형태의 상대주의로서 사실 판단, 즉 사실에 관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 그 자체를 부인한다. 모든 신념은 사회 체계의 위치, 즉 이론가, 또는 그 이론가가 속한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것이다. 다른 한 종류는 가치 판단을 둘러싼 상대주의이다.

2) 상대주의의 자기모순

상대주의가 하나의 심각한 세계관으로 자임하며 도덕적 원칙에 대한 믿음을 일절 반대한다면 그것은 언어를 오용하는 것이다. 벌린은 사실 판단, 즉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자기모순적이라면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상대주의를 설명하는 명제 자체가 상대적이라면 상대주의는 서술될 수 없다.’ ‘모든 진실은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글자 그대로의 상대주의(relativism simplicité)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상대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어느 것이 옳은지 묻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객관적 기준을 전면 부정하는 허무주의(cynicism)로 인도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벌린은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다원주의는 회의주의를 품는 반면 허무주의는 배척한다.

벌린은 다원주의는 결코 상대주의가 아니라고 거듭 역설했다. 다원주의자는 현대 실증주의자, emotivists, 상대주의적 사회인류학자들처럼 감정적 태도에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인간의 공통 지평

상대주의자들은 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맥락의 흡인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벌린은 다원주의자답게 문화 상대주의의 논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 한편, 경계를 가로질러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벌린 다원주의의 핵심이고 또 그만큼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그는 가치의 상대성 및 주관적 본질에 대해 철학자들이 과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람들 처지는 다를 수 있지만 그 어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차이가 언제나 큰 것은 아니다. 논쟁의 상대라 할지라도 나와 완전히 의견이 다르지는 않다. 

벌린은 인간들 사이에 무엇인가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문화의 경계를 넘어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사실적” 세계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무언가 공통적인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공통 가치를 인간의 공통 지평(common human horizon)이라고 부른다. 인간을 한데 묶는 객관적 가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벌린은 ‘인간의 지평’이라는 관념 안에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또는 공유하는 가치 중에서 더 줄일 수 없는 최소한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인간적 도덕의 토대가 된다. 여기에서 관습, 전통, 법 등의 개념이 나온다는 것이다.

4. 다원주의 평가

1) 자유주의와의 관계

다원주의는 중심 가치(overriding value)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는 특정 가치, 특히 ‘좋은 삶’에 관한 특정 관점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는 분명 자유와 개인의 자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다원주의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다원주의가 자유주의의 도움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만큼 다양성을 보호하고 북돋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벌린이 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모호한 자세를 취한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 자신을 자유주의 전통과 동일시한다. 다원주의가 자유주의의 논리를 잠식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소극적 자유를 그 무엇보다 강조하는 논리 속에는 가치들 사이에 부분적 위계를 확립할 가능성도 보인다. 자유주의를 다원주의에 앞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동시에 그는 자유주의와 다원주의 사이에 논리적 연결점이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자유가 그 어떤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필요하다면 자유와 다른 가치를 교환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때로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자유가 그 어떤 근본적 가치를 함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저작을 훑어보아도 그의 속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다원주의가 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가장 번창할 수 있지만 두 이념 체계 사이에 논리적 접합점은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2) ‘최소 보편성’ 

벌린은 문화적 다양성을 예찬했지만 무제한 사회구성론(constructionism)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의 삶 가운데서 다양성의 최대한도를 설정해주는 최소한, 그러나 실재적인(substantive) 인간 본성 개념을 다듬었다.

벌린은 “우리는 궁극적 가치들을 둘러싼 갈등들이 본질적(genuine)이라는 사실을 안다. 우리는 도덕적 실재(moral reality)에 대해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근본적 가치 갈등은 도덕적 지식의 대상”이라고 했다. 이 점에서 그는 어느 정도 객관주의자였다. 그래서 벌린은 문화와 예술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종합하자면, 벌린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를 비판했지만 동시에 윤리와 가치에서 객관적 이성의 위치를 확고하게 신뢰했다. 벌린은 선험적으로 확고한 도덕관념은 부정했다. 그는 보편적으로 타당한 최고선(summum bonum)을 모색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적 상황에서 무엇이 가장 나쁜 것(summum malum)인지 찾아내는 일에는 자신감을 가졌다. 

벌린의 도덕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디엔가 지평선이 있어서 아래쪽에는 보편성, 위쪽에는 다원성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선의 위치이다. 그는 정부 형태는 선 위쪽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 기준이 절대적이지도, 엄밀할 수도 없음은 분명하다. 벌린 자신도 그것이 ‘모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벌린은 자신의 글 속에서 발견되는 불확실성에 고민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그 최소한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경험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이고 이것 이상 더 확실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소통 가능한 인간적 지식의 한계 바깥으로 가고 싶은 기원’을 피력하는 셈이라고 둘러댔다.

그는 거듭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적으로 허공에서 구름을 잡아 만들어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상대적, 주관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 . . . .

 

5. 다원주의의 대응

발라디에(Paul Valadier)는 탈진실 시대에는 사실(facts)이 왜곡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면서 무엇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고 묘사했다. 이제 우리는 탈진실뿐만 아니라 ‘사실에 관한 진술의 설득력이 약화되고 공적 영역에서 사실이 힘을 상실하게 되는’ 탈사실주의(post-factualism)의 만연까지 걱정해야 한다.

왜 탈진실 현상이 일어날까? 탈진실 문제가 심각한 진짜 이유는 이것이 정치적 우위를 공고히 하려는 메커니즘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진실이 밝혀지면 잃을 것이 많아 진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이익에 우리가 이바지해도 되겠는가?

어떻게 싸울 것인가? 우선 우리 속에 있는 탈진실 경향성부터 물리치자. 우리는 모두 탈진실로 이어질 수 있는 다양한 인지 편향을 타고난다.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진실도 의심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부터 사실에 근거한 도덕을 확립하겠다는 ‘인식의 미덕’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했듯이, ‘들으려 하지 않는 자’는 어쩔 수 없다는 비관론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사악한 이익(sinister interest)’에 눈이 어두워 진실을 왜곡하려 드는 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보다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가 거짓말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무지한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의도적 인식 회피 단계를 지나 본격적 부인주의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어떠한 사실이나 증거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을 막아야 한다. 거짓말쟁이와 일반 대중을 갈라놓아야 한다.

맥도널드(Hector Macdonald)는 『만들어진 진실』에서 진실을 인식하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즉, 경합하는 진실 중에서 진실을 선택하는 옹호자(advocator), 의도치 않게 현실을 왜곡하는 오보자(misinformer), 일부러 잘못된 현실 인식을 퍼뜨리는 오도자(misleader)가 바로 그것이다.

옹호자를 많이 늘리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오보자를 옹호자 수준으로 인도하는 것, 아니 더 현실적으로는 오도자를 최소화, 주변화(marginalize)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다. 우리가 거짓말에 맞서 싸우는 것은 거짓말쟁이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을 무력화 또는 주변부화하기 위해서다. 옹호자와 오보자를 향해 진실을 들려주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다. 이런 측면에서 벌린의 다원주의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벌린의 다원주의는 최소 보편성을 놓고 고민한다. 일원론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기본 도덕률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구체화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벌린은 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의 공통 지평을 상정했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은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이 글은 벌린의 최소 보편성을 민주주의 사회에 맞게 재구성하기 위해 두 차원으로 나누어 접근한다.

우선 사적 영역은 각 개인의 자율적 선택에 맡겨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해악의 원칙(harm principle)’에 입각하여,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어떤 선택이든 허용한다.

문제는 공적 영역, 특히 국가의 역할이다. 롤스(John Rawls)는 국가가 각 개인이 추구하는 목표들을 단일한 기준에 복속시키려 드는 것은 ‘비합리적인,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나간(mad) 짓’이라고 성토했다. 그러나 롤스 자신도 민주 국가가 특정 가치를 은연중 지향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했다. 이 글은 라즈의 완전주의 이론을 좀 더 구체화해서 평등한 자유(equal liberty)를 전제로 인간의 행복(human flourishing)을 추구하는 것이 공적 영역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각 공동체 상황에 맞게 구성되어야 한다.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기실현, 밀이 주장한 자기 발전 개념이 행복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행복 개념의 구성 요건 중의 하나로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특히 거짓말하는 것을 인간을 수단화하는 반인륜적 행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

벌린은 역사가가 경험적 증거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사실에 모종의 폭행을 가하는 셈’이라고 엄중 경고했다. 조지 오웰(George Owell)은 ‘명백한 사실을 거듭 외치는 것이 지성을 가진 사람의 첫 번째 의무’라고 했다.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라고 했다. ‘들을 용의’가 있는 사람들을 향해 최소 보편성 개념을 제시하고 그것을 보다 구체화하는 것이 탈진실에 맞서는 다원주의자들의 도리가 아닐까.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자유, 다원주의, 상대주의 (서병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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